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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그놈의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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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단우 Apr 08. 2020

우리 아이도 천국에 갈 수 있나요?

무지개다리 너머... 우리 아이가 잘 있겠죠?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롬 5:12




 처음 성경을 읽게 되었을 때, 나는 “사망”이라는 단어에 강한 거부반응을 보였다. 종교를 가지기 전이나 가진 후에도 그런 거부반응은 비슷했다. 사망은 누군가의 일이 아니라 내 가족의 일과 곧 나의 일이 될 수 있기에.



  솔직히 디디가 가족이 되고 난 후 종교를 가지면서 심리적 갈등이 심했다. 그렇지만 굳이 내가 믿지 않겠다고 못박는다 하더라도, 진리는 진리로서 존재했다. 죽음을 피하는 행위는 그저 ‘회피’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사망이 존재한다는 것은 명백한 팩트이고, 종교의 가르침은 그에 대한 기원과 사실관계를 잘 풀어나가는 도구일 뿐이었다. 디디나 나나 죽는 것은 진리이자 팩트이다. 초신자였던 나는 죽음에 대한 강박으로 밝은 신앙생활을 누릴 수 없었다. 새신자로 분류된 자의 질문이 철학적이고 심오한 것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주변 사람들이 피곤하다는 듯이 슬금슬금 피하는 눈치였다.



  이쯤되니 교회에서 나는 철저하게 외톨이 철학자가 되었다. 누구 하나 나의 목마름이 해갈되도록 돕는 이가 없었다. 이 땅에 사망을 가져온 자가 누구인지 따지게 되었다. 당장 내 눈 앞에 잡아 족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에 준하는 댓가를 치르게 하고 싶었다. 인류에게 사망이라는 저주를 선사한, 인류의 조상.




고양이가 햇볕 앞에서 낮잠을 자려고 하고 있다. 이런 녀석을 바라보는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






  다시 성경을 펼쳐 말씀을 차근차근 읽어 내려갔다. 말씀에는 죽음에 대해 더 많은 정보들이 기록되어 있어, 어렵지 않게 죽음의 창조자를 찾을 수 있었다. 절대악과 신의 배신자. 이 둘이 사망의 원인이었다. 심지어 이들은 나와 내 개가 누려보지 못했던 천국의 세계를 충분히 누리고도, 그것에 대한 만족이 없었는지 신의 영역을 탐하려 했다. 특히 신의 배신자이자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이 커졌다. 나는 그 둘에게 욕지기를 내뱉었다.




  “나쁜놈들”




  통제할 수 없는 상황 속에 나를 몰아넣고, 쳇바퀴의 삶을 살다 죽는 이 시스템에 화가 났다. 신의 자비가 걷혀진, 이 암흑의 세상에서 나와 내 개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모든 생명이 사는 방법은 제각기 다르겠지만, 결국 그 끝은 죽음에서 방점을 찍고 있었다.



  내 안에서 분노가 커지는 만큼 에덴에 대한 갈망도 커졌다. 성경 속에서는 죽음이라는 공포와 고통이 없을 영원의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사망과 죽음이 쓰여진 이상으로 그 쓰임이 더 많았다. 에덴은 ‘생명’, ‘구원’,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기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사 11:6-9




  그 곳은 어린 아이가 뱀, 그것도 독사를 쥐고 놀아도 괜찮을 정도로 안전한 곳이었다. 약육강식의 법칙을 깨고 모든 생명이 공존하는 곳. 인간 뿐만 아니라 동물에게도 은혜가 미치는 곳. 서로 해치거나 상해를 당할 일도 없이, 존재 자체만로도 충분하고 넉넉한 에덴.



  무엇보다 에덴의 시간이 마음에 들었다. 에덴에서는 “영원”이 모든 시간의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는 디디와 영원히 행복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설렜다. 디디뿐만 아니라 나의 손을 스쳐간 수많은 아이들도... 그런 이유로 죽음은 나와 디디의 관계를 찢어내는데 있어 상당히 무의미해졌다. 신학적으로 장황한 설명을 하며 공격하는 분도 더러 있었지만, 말씀 속 창조주는 당신의 파라다이스에 피조물을 위한 자리를 넓게 마련하셨기에 디디의 자리도 분명히 있다! 디디뿐만 아니라 모든 아이들이 그 곳에서 자신의 가족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산책로 앞 방범대 옥상은 고양이들의 파라다이스다. 동네 냥이들의 에덴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계속 디디를 내 곁에 두고 싶다. 펫로스 증후군 따위와 거리가 먼 사람이 되고 싶다. 그렇지만 디디의 시간은 나보다 더 빨리 흘러간다.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시간이 느리고도 빠르다. 사망이 존재하는 현실에서 파라다이스가 있다고 확신하며, 노령견을 케어하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당장 언제 죽을 지 모르는 노령견을 데리고 날마다 마음의 준비를 해야만 한다.



  다만 오늘의 시간이 사망에 지배당하지 않고 낙원에 머물기를 기도해야 한다. 아담과 하와를 원망할 힘으로 기도에 정진해야 한다. 기도의 삶으로 인도해준 디디에게, 신에게 감사함마저 든다.



  저녁 산책을 나서는 디디의 등을 쓰담아주었다. 이유 모를 칭찬에 기분이 좋아보인다. 녀석이 언제까지고 살아 있기를 바래본다. 사망의 세상 너머 저 높은 파라다이스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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