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심한 할배의 영어 말하기 도전

by 디딤돌

"프랑스어를 배우려면 프랑스인과 함께 지내야 한다" 미국의 문명 사학자 <윌 듀런트>가 쓴 교육에 대하여 란 글 중에 나오는 말이다. 그리스와 로마연구에 열정을 바쳤던 그가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공부하는 데 있어 많은 애를 먹었던 모양이다. 그는 해당 글에서 현지인과 소통 없이 책만을 통해서는 외국어를 제대로 배울 수 없다고 단언했다. 일상생활을 통하여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환경에 노출되지 않으면 다른 언어를 배운다는 일이 쉽지 않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차라리 모국어 실력을 최대치로 기르고 원서대신 자국어 번역본을 읽는 게 더 나을 것이라고도 했다. 물론 저자의 말이 전부 맞다고는 할 수 없다. 그는 AI나 영상화면을 통하여 학습할 수 있는 현재 상황은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직접 대면을 통한 소통 방식이 외국어를 습득하는 데 있어 가장 효율적이라는 지적은 부인할 수 없다. 앞뒤 정황, 표정, 제스처 등이 말만큼 중요해서다.


머리를 쓰다 보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현상이 있다. 우리 뇌는 매우 편향적이란 걸 알게 된다. 긴박하거나 생존과 연결된 영역에서는 뇌가 무한의 능력을 발휘한다. 반면 사용 빈도가 낮아 익숙하지 않은 단어가 머릿속을 방황하고 있다 싶으면, 우리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그 기억을 지워버린다는 사실이다. 힘들여 외운 단어를 금방 잊게 되는 이유다. 컴퓨터에 빗대면 사용빈도에 따른 기억장치 최적화 작업이다.


이 글은 중년 이상의 분들이 자기 계발 차원에서 영어회화를 원할 경우 도움이 될까 해서 나의 경험을 적었다. 나는 은퇴 후 취미 삼아 영어 회화를 공부 중이다. 두 가지 도구를 이용한다. 하나는 네이버에서 제공하는 영어 회화를 읽고, 쓰고, 발음 연습을 한다. 모바일 대화용 앱도 구매했다. 나의 현 수준은 하급 정도 수준이다. 외국인을 만나면 얘기를 걸어보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는 단계다.


영어가 현업이나 학업과 연관되어 있어 빈번한 사용이 불가피하다면, 긴장감을 유지하며 공부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경우는 당연히 노력 대비 효과가 비례하여 나타날 것이다. 반면 나처럼 느슨한 자세로 현지인과 기본적인 대화가 가능한 수준 정도를 목표로 삼는다면, 차라리 정형화된 대화 책자를 통째로 외우는 게 현명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했다. 물론 듣기 연습은 별도로 해야 한다는 전제가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현장 학습기회를 갖는 건 회화 능력 향상의 지름길이라고 말한다. 아쉬운 점은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외국인 대부분이 한국말을 어느 정도 한다는 사실이고 모바일을 통하여 어지간한 문제는 스스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실제로 그들과 대화를 나눠볼 기회를 찾기가 어렵다. 여기에다 젊은 엄마들은 아이들의 회화테스트 기회를 얻기 위해 대화 대상을 물색하느라 여념이 없는데 나이 든 사람까지 경쟁자로 뛰어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상황이 녹녹지 않아도 대화에 익숙해지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외국인과 눈 맞추기를 불편해하면 기회는 영영 없다. 내가 아는 지인 부부는 미국 뉴욕 외곽 한인지역에서 20년 가까이 살고 있지만 지금도 현지인과 자연스러운 대화가 불가능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자식과 동행하지 않으면 관공서 일 보는 게 수월하지 않다고도 했다. 적극적으로 현지인에게 가까이 가려는 노력이 없으면 외국어 습득이 그만큼 어렵다는 방증이다.


최근 나의 에피소드를 소개하겠다. 회화 실력을 테스트해보고 싶던 차에 우연히 젊은 외국인 커플과 짧은 대화를 나눌 시간이 생겼다. 장소는 동작동 현충원 내 구내식당이었다. 이곳은 원내 직원과 각종 예를 치르는 호국영령 유족들이 주로 이용한다. 나도 산책을 마치고 점심을 위해 모처럼 들린 날이었다. 점심 식사 피크타임은 지나고 십여 명 남짓 정도의 인원이 식사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나는 막 식사를 마치고 잔반을 처리 후 퇴장하려고 돌아섰다. 갑자기 젊은 외국인 커플이 식당으로 입장한다. 신기했다. 몇 년째 원내를 산책하고 있지만 보기 드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누군가 도와줄 사람을 찾는 눈치였으나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 대부분의 식객들이 나이가 지긋했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이때다 싶어 용기를 내어 말을 건넸다. 먼저, 한국말하세요?라고 우리말로 물었더니 무슨 말인 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영어가 필요하군' “ Can you speak Korean? 아차차 요즘은 Do you 형식으로 묻는다고 했지?” 순간적으로 버퍼링 현상이 일어났다. 책과 AI에게서 배운 대로 하지 못해 순간 당황했으나 고맙게도 상대는 이미 한국말을 못 한다고 대답했다. 나서긴 했으나 갑자기 난감해졌다. 단순히 몇 마디 대화로 해결될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눈동자는 나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용기를 다시 내야 했다.


이곳은 1층에서 식권을 먼저 구입 후 2층 식당으로 올라와 반찬은 셀프방식으로 챙겨야 하고 식사 후 잔반을 버리고 식판을 반납하는 방식이다. 위치의 특성상 그다지 음식의 가성비도 기대하기 어렵다. 이 많은 것을 어떻게 영어로 설명한단 말인가! 괜히 말을 걸었나 보다 하고 살짝 후회감이 싹텄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래 직진이다. 문법이 맞든 틀리든 간에 무조건 말을 해보자.


‘Do you guys want lunch?’ 그렇다고 했다. 음... 그렇다면 'You (need to) buy food tickets first on the first floor.' 이때 need to 빼고 말했었다. 짧은 영어를 신기하게도 알아듣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Follow me! 보무도 당당히 앞서서 계단을 내려갔다. 그런데 식권판매를 하는 젊은 직원은 영어를 많이 미워하는 사람임이 분명했다. 하얀 머리 노인인 내가 역할을 끝까지 해 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오늘 메뉴는 설렁탕 단품이고 일반과 특별만 선택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책에서 본 대로 현재완료형 물음 방법을 기억해 냈다. Have you tried 설렁탕? ‘...’ 웬걸 무슨 음식인지 모른단다. 설렁탕에 대한 묘사능력은 불가능해서 서둘러 다음 단계로 나갔다. 이때 대화를 적극 해보겠다는 처음 의도와 달리 "빨리 헤어질 결심"이 마음속에서 처음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잠시 머릿속으로 영작을 한 다음 말을 꺼냈다.


' Which one do you want... usual, normal? 아닌가? 그럼 general or special?' 엉겁결에 물은 것 같은데 찰떡같이 알아듣고 일반을 선택하겠단다. 음... 그러면 합해서 이 만 원을 지불해야 한다고 안내해야 했다. 나는 숫자를 보고 즉시 영어로 말하는 게 가장 어렵다. 에.. 그러니까 ‘토털 어마운트 퉈니 싸우전드 원, 오케이?’ 학창 시절 배운 영국식과 현재의 미국식 발음이 뒤섞여 엉망인데도 남자친구가 'Got it.' 한다. 기특했다. 내가 출중하거나 그가 스마트한 청년임에 틀림없다.


순간 머리를 굴렸다. 다시 2층까지 따라가 배식받는 과정까지 관여해서 알려 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두고 고민했다. 자율배식, 콩나물 반찬, 잔반처리 방법을 영어로 설명한다는 것은 나에게 높은 산처럼 느껴졌다. 음... 이쯤에서 오늘의 현장학습은 마쳐야겠다고 다시 마음먹었다. 결제 절차를 마치자 추가 설명이 필요했다. 이번에는 버퍼링 시간이 단축되면서 조금 더 빨리 영어가 튀어나왔다.


' You need to return back on the second floor. And you should wait a moment. After a while, they will call your number. ' 그리고는 내 설명을 알아들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이어서 내가 먼저 인사말을 했다. 나름 잔머리를 쓴 것이다. 'Enjoy your meal!' 이 교활한 말로 인해 두 친구는 나로부터 추가안내는 받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음을 직감했을 것이다.


나의 인사말을 들은 여자 친구가 "Thank you so much "라고 말하며 웃는다. 의도와 달리 대화 실력이 달려 더 이상의 동행을 스스로 단절해 놓고서, 나는 변명 거리를 찾고 있었다. 바로 이렇게. ‘오지랖이 너무 넓어도 곤란해! 과잉친절은 아닐 수도 있어!' 다른 한편으론 조금 더 잘해 볼 수 있었는데 하며 아쉬움을 삼키며 집을 향했다. 내가 마무리까지 지어주진 못했지만 귀여웠던 그들이 특별한 점심을 즐겼기를 바란다.


외국어, 특히 회화를 배운다는 건 상당한 노고를 수반하는 일이다. 그러나 간단한 의사소통 정도를 목적으로 한다면 크게 스트레스받을 일은 아닌 것 같다. 꾸준하면 어느 선까지는 이를 수 있다는 생각이다. 나이 들어서까지 외국어를 공부로 받아들이면 또 다른 인생 숙제가 된다. 아는 표현만큼이라도 정확하게 구사하겠다는 꿈을 가져보면 어떨까 한다. ‘번역 앱’은 최후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외국어 회화를 제대로 하고픈 모든 시니어들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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