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눈치를 일상 속의 양념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눈치가 있기 위해서는 분위기 파악과 공감 능력이 필요하다. 우리 민족 고유 감정이라는 情도 사실은 눈치와 상관관계가 깊어 보인다. 그래서 눈치가 없으면 관계가 경색되고 민폐로 이어지기도 한다.
눈치를 바라보는 시선은 극좌와 극우의 대립만큼 간극이 크다. 동일한 행위를 두고서 한쪽은 아부의 달인이라고 말하고 다른 쪽은 사려가 깊다고 한다. 한편은 눈치 보고 살 것 없다고 하며 다른 편은 남을 위한 눈치를 보는 건 지능이 높아 그렇다고 말한다.
병장 한 명을 이등병 열 명과도 바꾸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경험과 눈치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다. 같은 이치로, 나이가 들었으면 그만큼 다양한 사람을 만났을 것이고 경험이 켜켜이 쌓였기에 눈치가 빠를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생각한다. 정치권에선 눈치 100단도 있다고 한다.
과연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이라고 해서 타인의 감정과 상황을 읽는 능력이 탁월해질까? 전반적인 사회 통념을 이해하는 정상인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는 데 동의한다. 아쉽게도 그렇지 못한 부류는 반드시 존재한다. 눈치가 없게 되는 이유는 다양해 보인다.
대표적으로 자기 중심성이 강하면 눈치가 없을 확률이 높다. 주위 사람들의 표정이나 행동을 읽는 능력이 애초부터 결여되었거나 고의적으로 배제하는 성향을 가졌기 때문이다. 절망스럽게도 이 흠결은 나이가 들어간다고 크게 개선될 가능성이 없어 보여 문제가 된다.
따라서, 강자가 공감이 결여된 말과 행동을 여과장치 없이 표출했을 때 상대에게 상처를 준다는 점이고 특히 권력자가 그런 성향일 경우 사회에 미치는 악영향이 너무 크다는 점이다. 계엄관련자들을 보면 그들이 눈치 없이 얼마나 국민의 보편감정과 멀리 있는지 알 수 있다.
거꾸로 약자라면 따돌림을 당하거나 비자발적 왕따의 길로 들어서게 만든다. 내가 현역 복무하던 시절, 군대에서는 눈치 없는 대원을 고문관이라고 불렀다. 다수가 충분한 근거 없이 조금 굼뜨고 상황파악이 늦다고 주홍글씨를 붙이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호모사피엔스의 본성적인 추잡함이다.
나이 든 이가 눈치가 없어 짜증을 유발하고 공공의 안녕을 파괴하는 사례를 몇 가지 보겠다.
"며느리는 며느리 사위는 사위다" 간혹 며느리를 딸 같다고 한다거나 사위를 아들 같다고 얘기한다. 물론 예뻐서 한 말인 줄은 안다. 쌍방이 그렇다고 생각하면 이보다 좋을 순 없는 일이다. 그러나 생각을 해보자. 친부모 친자식이라도 모르거나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하여 조그만 일로 틈이 생길 수 있다.
우리는 가깝다는 걸 상대를 헤아림에 있어 가벼이 해도 좋은 줄 종종 오해한다. 적절한 거리를 유지 못하고 모든 걸 알려하고 간섭하려 든다. 프라이버시는 가까울수록 존중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설 명절 연휴를 쇠고 있는 중이다. 자식 내외 엉덩이가 들썩거리면 감을 잡아야 한다. 그들도 편히 숨 쉬도록 빨리 보내주자.
“노인 출입 금지” 팻말이 나온 이유를 살펴보자. ‘노 시니어 존’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나이 든 이들 입장에선 당연히 차별로 비친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의 발단은 공공예절 준수 의식 결여, 종업원에 대한 무례, 성희롱에 준하는 낯 뜨거운 언행을 서슴지 않아 이런 사달을 스스로 불러 낸 면이 있다.
과거에는 무례한 언행이 유야무야 넘어갈 수 있었다. 지금은 상호 간 예절을 지키지 않은 경우 곧바로 법대로 하자는 세상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어른이 되는 길은 가리고 지켜야 할 게 많아 도덕을 준수하는 것처럼 불편하다. 그래서 그럴까? 아예 싹 무시하고 늙은이 소리 듣는 걸 주저하지 않는 것 같다.
“지공거사의 양심 결여” 부분 차례다. 우리 사회의 그늘 중 "갈 곳 없는 노인"이란 기사도 읽었다. 간혹 통계자료를 보게 되는데 OECD 국가 간 비교표를 보면 우리나라 노인의 빈곤율이 심각하여 서글프다. 무료 지하철이라도 이용해 세상 구경도 하고 소일거리를 찾을 수 있다면 다행이다.
그러나 생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직장인들이 그나마 수월하게 출퇴근할 수 있도록 러시아워를 피해 지하철을 이용하면 좋으련만 한사코 이른 새벽부터 움직인다. 노약자 석에서 빈 곳을 발견하지 못하면 일반석 앞으로 이동해 가자미 눈을 하고서 버드나무처럼 흐느적거린다. 대부분 무시하지만 마음 약한 이를 일어서게 만든다.
“좋은 말도 자주 들으면 화가 난다” 나이가 들면 같은 얘기를 반복하는 경향이 있다. 하긴 새로운 경험이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어 일면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참을성 많은 이들은 ‘노인의 말 많음을 자신의 한을 푸는 과정’ 쯤으로 온화하게 받아들이자는 제안을 한다.
현실에선 시시콜콜한 얘기는 집어치우라는 요청이 많으니 난처한 일이다. 하긴 요즘 젊은이들은 어른을 통해 배우는 상황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어른이라지만 사는데 급급하다 보니 머리가 가벼워 전수시킬 지혜랄 것도 별로 없는 것이 현실이다. 지금 길거리에는 저 잘났다고 온 사방이 정치인 현수막으로 도배되고 있는데 한 구석에 ‘다변은 공공의 적이다’는 경고문이 붙을지도 모를 일이다.
“노인도 어엿한 주권자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그러나 젊은 유권자들은 노인의 권리행사에 우호적이지 않다. 투표장에 행차하지 말고 차라리 집에서 쉬라고 권유도 받는다. 왜 그럴까? 바른 방향으로만 작동된다면 그분들의 경륜이 녹아들어 우리 사회에 긍정적인 면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작금의 사태를 보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자신의 권리만 주장하고 각종 볼썽사나운 시위대에서 한몫을 단단히 해내고 있어서다.
과연 후대의 본보기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노인이라 하면 이미지가 고집불통이며 대화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데 있어 일가견이 있는 달인들로 떠오른다. 자식과 손자세대를 고려하는지조차 의심이 들게 한다. 동굴 속의 네안데르탈인처럼 행동하고 있다. 정말 눈치코치 제로다.
“꼰대라는 훈장”을 그렇게도 받고 싶은지 모르겠다. 사람은 주체적인 동물이다. 당연히 간섭을 싫어한다. 젊은이들의 귀여운 일탈마저 참지를 못해서 눈에 핏대를 세우고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반발 심리로 그들은 지적 질을 해댄다고 덤벼든다.
무안한 마음에 딱 어울리는 가사를 떠올리는 수밖에 없다 ‘너는 늙어봤냐 나는 젊어봤단다’라는 노랫말이 멋쩍음을 감추어 줄 수 있을까? 이 땅의 어른들이여 제발 눈치를 좀 챙기고 살자! 먼저 묻지 않으면 말하지 않겠어! 란 자세를 생활화해 보자. 덤으로 가정까지 편해질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나도 아닌 척 하지만 타인의 눈엔 이상한 노인일지도 모른다.
*지공거사: 지하철을 공짜로 타는 사람들이 스스로 자조적인 의미로 사용했다는 설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