넥타이맨에서 박스맨이 되기까지

by 디딤돌

'음,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겠군!'


나는 아파트에 살고 있는데 어느 날 경비원들이 모두 떠났다. 돈에 눈 밝은 이들의 경제 논리가 끼어든 모양이다. '에스원-세콤' 직원들이 눈에 띄는 걸 보니 무인경비시스템을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 쓰레기를 버리러 가면 간혹 어떤 나이 든 분이 박스를 해체하여 모퉁이에 차곡차곡 쌓아놓곤 했다.

경비원들이 제 살길을 찾아 괴나리봇짐을 짊어진 이후 그들이 했던 일을 대신할 별도인원을 고용한 것 같다. 혼자 담당하는 구역이 많아서인지 공간 한구석에 안내문을 부착해 놓았다. "박스를 해체시킨 후 버려주세요!" 나는 자칭 모범생이다. 안내 문구를 본 이후부터는 팻말작성자의 지시를 따랐다.

김치가 전부 소진되어 간이김장을 했다. 자연스럽게 박스 등 부산물이 발생했다. 이 친구 들을 쓰레기장으로 인도 후 아무 생각 없이 해체작업을 시작했다. 뒤이어 삼사십 대로 보이는 입주민이 쓰레기를 버리러 왔다. 나를 보더니 "수고 많습니다." 하면서 인사를 했다. 나도 엉겁결에 "예"하고 대답을 했다.

"아저씨가 계시니까 이 박스 그냥 놓고 가겠습니다." ‘...’ 나는 ‘벙쪘다.’ 예도, 아니요!라고 말하기가 뭐 했다. 결국 "그러세요!"라고 대답했다. 그는 내가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으로 착각한 것 같다. 그는 죄가 없다. 검은색 계통 복장에 흰머리가 제대로 드러나는 검은 모자까지 쓰고 있었으니 그럴 수도 있었다.

나는 그가 요청한 작업까지 넉넉히 수행한 후 혼자 웃었다. "노인이 되면 미남미녀 구분마저 의미가 없어진다." 더니 정말인가 보다. 나도 한 때는 흰 와이셔츠에 양복을 입었었다. 55세에 은퇴를 했으니 딱 12년 만에 일반 노인으로 완벽히 동화된 셈이다. 모르고 지내던 사실을 입주민이 증명해 주어 고맙다.

직업의 귀천을 들먹인 게 아니다. 한 개인이 변해가는 여정을 지켜보면 누구나 대동소이하다는 사실을 얘기하고 싶어서다. 나이가 들수록 보이는 것에 의해 내가 누구인지 결정되는 것 같다. 사람의 내면은 알기 어렵다. 말년에는 '공자'마저 이런 말까지 들었다고 한다. "초라한 모습이 상갓집 개 같다."

나 같은 사람이, '박스-맨'*으로 비쳤다면 공자보다 후한 평가를 받은 것이다. 늙으면 서럽다고 옛 분들이 가르쳐 주었다. 오늘은 온몸으로 느낄 수 있도록 체험을 한 것뿐이다. 앞으로는 남에게 비치는 모습에 대한 예민한 반응은 내려놓을 예정이다. '세월 친화적'이 되겠다는 것이다. 쓰레기를 버리러 나오면서 양복에 넥타이를 맬 수는 없지 않은가? 차라리 박스맨으로 불리련다.


*넥타이-맨 Necktie-Man, 박스-맨 Box-Man : 필자가 임의로 지어 낸 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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