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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 톺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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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딤돌
20231222_200755.jpg (담양에서 대통 밥을 즐긴 후 연필통으로 활용 중이다)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누가 시켰으며, 속은 어찌 비었는가, 저렇게 사철에 푸르니 그를 좋아하노라> 고산 윤선도 선생의 오우가 중 대나무에 관한 칭송 부분이다. 옛적에는 군자가 지켜야 할 절개의 상징으로서, 지금은 자신의 할아버지 나라로 돌아간 귀여운 판다 곰 푸바오가 즐기는 "먹방"용 음식으로써? 대나무의 효용이 얘기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대나무라고 부르고 있지만 그들은 볏과에 속한 풀의 일종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엔 14종이 서식 중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나에게 대나무는 질긴 생명력으로 각인되어 있다. 분명 한낮에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간밤에 비가 조금 내렸다 싶으면 우후죽순이란 말처럼 여기저기서 중력을 거스리며 솟아나는 새순들이 그렇고, 히로시마 원폭 피해 지역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종이라는 사실에서도 그러한 추론이 가능하다.


어느 방송 오프닝 멘트에서 들은 말이다. 5월 말이면 일반 식물들은 신록이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는데, 유독 생기가 없고 시들시들한 모습을 보이는 개체가 있다. 바로 대나무라고 한다. 이유인즉슨 자신들의 새끼인 죽순이 잘 자랄 수 있도록 영양섭취를 최소화하기 때문이라는 거다. 아! 미물에서 인간에 이르기까지 자식에게만큼은 지극정성이구나! 그래서 지구가 푸른빛을 띠며 생동감을 보이는 대단한 별이구나!


우리나라의 경우 대나무는 원래 남도지방 따뜻한 곳에서만 자랐는데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중북부 지역에서까지 발견된다. 정말 대나무의 내리사랑이 특별한지 확인 겸 집 근처에 있는 대나무를 직접 관찰해 보았다. 놀라웠다. 주위는 푸르렀지만 이 친구들은 잎이 누르스름했다. 간혹 죽어가는 개체도 있었는데 아직까지는 상대적으로 추운 지역에서 적응하는 과정에서 도태된 게 아닐까 추측해 보았다.


20230530_163053.jpg (신록의 계절이지만 누르스름한 빛을 띠는 대나무)


대나무는 우리네 실생활에서도 유용했다. 우선 죽부인이 떠오르지 않는가? 호시탐탐 아낙네들 꽁무니를 쫒던 남정네 들마저 한 여름엔 본 처보다 두 번째 부인(?)을 먼저 챙긴 것 같다. 덥기는 마찬가지인 마나님도 아마 죽부인을 껴안고 꿈나라로 가있는 서방님이 얄밉지는 않았을 것이다. 전통 대나무 부채의 위엄(?)도 자못 대단하다. 옛적엔 선비들의 필수품이었고 전통가무에도 반드시 등장한다.


그 외에도 사용처가 화살 재료, 대바구니, 돗자리, 삿갓 등 헤아릴 수 없다. 요리사들은 죽순을 이용한 먹거리를 고안해 냈고 각종 공예품도 볼 수 있다. 내가 자란 곳은 눈이 적게 내려 정식 스케이트를 타는 문화가 거의 없었다. 대신 개구쟁이들은 대나무를 정 중앙으로 가른 다음, 상단에 홈을 낸 뒤 불로 약간 구우면 전면이 조금 들리면서 멋진 스케이트 대용품이 탄생하게 되는데 이걸 가지고 비탈진 길에서 신나게 놀곤 했다.


미끄러운 길에서 어르신이나 아가씨들이 엉덩방아를 찧는 날에는 동네 악동으로 지목되었고, 혼쭐을 내야 할 타도(?)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잽싸게 도망 다니느라 여념이 없었다. 나는 낚시를 좋아했다. 지금처럼 고급 진 접이용 낚싯대는 언감생심이었다. 적당한 두께에 끝부분이 낭창낭창한 걸 골라 잔가지를 제거한 다음 조그만 어깨 위에 낚싯대를 걸쳐 메고, 거리가 꽤 먼 저수지까지 걸어가 강태공을 흉내 내기도 했다.


바람 부는 계절엔 대나무와 창호지로 연을 만드는데, 이들이 자신의 몸을 갈라 튼튼한 연을 만드는데 도움을 주었고, 실컷 창공에서 휘날리다 다음 해 정월 보름께 가 되면 눈물을 머금고 주인과 헤어져야(보통 태우거나 연줄을 절단해 멀리 날려 보냈다)만 했다. 시골 초가집 빨랫줄 중간에는 으레 바짝 마른 이것이 버티고 서 있었다. 하중을 분산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빨랫줄엔 여름에는 제비가, 가을에는 잠자리가, 겨울에는 참새가 내려앉아 한적한 시골의 주인 행세를 했다.


좋은 추억만 함께 했던 건 아니다. 대나무 숲에 들어가면 순식간에 고달픈 육신으로 변한다. 너무 빽빽한 탓에 잎과 가지가, 드러난 사람의 살결을 무자비하게 공격한다. 여기에 문(蚊) 선생(모기)의 발호는 대단하다. 온 세상의 모기가 다 모여 피 빨기 경연대회라도 하는 것 같다. 한번 물리면 금방 벌겋게 부풀어 오른다. 잎에 쓸려서, 모기에 물려서 미치도록 가렵다. 운 없는 날에는 지네들도 시위를 하듯 지나간다. 어이쿠! 놀래라!


우연히 들은 방송 덕에 옛날의 추억을 소환했다. 나의 요즘 일상은 경험하고 알아보는 것이다. 체험하지 않으면 피상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직접 보고 느끼는 삶이 인생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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