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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에 관하여

< 3>

by 디딤돌


20240107_110027.jpg (며느리가 첫인사 올 때 가져온 선물이다)


글로만 이루어진 간판이 있어 자세히 보니 <아! 이노무 술잔> ? 전에 살던 동네 길 변에 있는 맥주 집 상호다. 주인장의 문학적 재능이 예사롭지 않다. 지긋이 간판을 쳐다보노라면 술을 앞에 두고 감개무량한 주당의 모습이 그려지기도 하고, 술 때문에 인생을 망친 주정뱅이의 회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우리네 삶의 희로애락에 술보다 더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게 또 있을까?


어쩌다가 집안 수납시설을 열어보면 포도주가 몇 병 보인다. 나는 술만큼은 욕심이 없다. 이 친구 들을 유난히 사랑하는 아우(형제라도 이렇게 다르다)에게 더러는 넘겨주기도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다시 채워지곤 한다. 나는 본디 술 냄새만 맡아도 취했던 이상 체질이다. 내 몸에, 술은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지만 우리의 광기 어린 음주문화 때문에 "나살려라!" 하면서 꿩처럼 머리를 박고 숨을 방도 밖에 없었다.

한국 남자라면 군대와 술 얘기는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나의 흑 역사를 적어 보겠다. 군 시절 회식이 있는 날이면 그날 밤이 제삿날이나 다름없었다. 일단 몇 잔 마시게 되면 외곽 경계 근무 교대도 할 수 없었고 인민군이 다시 내려온다 해도 별 방도가 없는 완전 무장 해제 상태가 되었다. 어느 날인가 나 때문에 내무반 불침번 교대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취침이 시작되고 내가 첫 근무자가 되었는데 앉아서 조느라 기상나팔이 불 때까지 본의 아니게 전우들의 근무까지 다 서준 것이었다. (아마 최전방 GOP에서 그랬다면?)


아침에 기상을 하면서 다들 이상하다는 표정들이었다. "내가 근무를 섰었나?" 내무반의 모든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바짝 긴장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졸병이 그 상태였다면 다음에 어떤 상황이 전개됐을지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으슥한 곳으로 끌려가 인간 샌드백이 되었다. 선임들은 이렇게 말했다. ("이자식이 고참이 따라준다고 다 받아마셔?" 그런데 안 마신다고 해도 인생이 꼬이긴 마찬가지였다. *갈참 왈, 취하는 건 군기가 빠져서 그렇다는데 할 말 없잖은가?)


사회 초년생 시절 직장 상사의 집에 간 일이 있다. 일차가 끝난 후 견디기가 어려워 극구 사양했는데 굳이 나를 끌고 가다시피 했다. 사모님은 남편의 직장 부하 직원들이 온다는 소식을 들었을 터이므로 집안을 깔끔하게 정돈해 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비극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예상했던 대로 큰 실례를 범했다. 청결한 화장실을 난장판으로 변신시키고 난 후 사모님의 실눈 뜬 모습을 차마 정면으로 응시할 수 없었다. 후에 확인까진 못했지만 상사께서는 아마 그날 저녁 혼쭐이 났을 것이다. 그래서 인사고과 평정이 바닥이었나?


주량도 모자라고 잡기에도 소질이 없었지만 평사원 시절은 책임이 적다 보니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었다. 인생이 계속하여 탄탄대로라면 얼마나 좋을까만 언젠가는 가시밭길도 반드시 만나는 법. 관리자가 되고 나니 VIP고객과의 접점이 많아졌다. 약속을 하면 당시 문화는 술자리가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강적(자수성가한 분들 중에 이런 유형이 많았다)들을 만나야 할 일이 넘쳐났다. 술 실력이 되는 직원을 삼고초려의 자세로 모시고, 함께 다녀 봤지만 상대는 나의 사사로운 애로사항 따윈 관심이 없었다.


언젠가는 점심시간에 대취하여 인사불성이 된 적도 있다. 상대가 막가파 출신인지 술잔크기가 달랐다. 양주고 소주고 물컵을 이용했다. 그 와중에 응급실에 실려가지 않은 것만도 천만다행이었다. 비몽사몽간에 일어서려는데 갑자기 눈앞의 땅이, 꺼지고 치솟아 오르기를 반복하고 나는 가만히 있는 것 같은데 주변 시설물이 전속력으로 나에게 달려드는 기분이 들었다. 영혼이 가출한 상태에서 속으로 돼 내었다. '나는 왜 술이 받지 않는 체질로 태어났는가?'... '아무래도 이 웬수같은 직장을 오래는 못 다닐 것 같아...' 지금은 은퇴하여 평화로운 상황이기에 천금을 준다 해도 그 시절로 돌아가지 않겠다.


술 때문에 발생한 안타까운 주위 사람들 얘기다. 시골 친구들의 부친은 거의 환갑 전후에 생을 마쳤다. 가혹한 노동도 원인이었겠지만, 세상의 시름과 육체적 고통을 잊고자, 제대로 먹지 못해 건강하지 못한 몸속으로 독한 술만 들이부었기 때문이다. 얼굴은 흑 빛이었고 결국은 간 등에 문제가 생겨 서둘러 세상을 떠났다. 친구 중에도 오십 대 초반에 생을 정리한 이들이 꽤 있다. 중독 상태가 되다 보니 이른 나이에 폐인이 되었다. 동창회에서 만나보면 그들의 동공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마약과 전혀 다르지 않은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떠나는 이야 자기 책임이 있어 어쩔 수 없다지만 남겨진 처자를 보는 나의 마음은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술에 대한 나의 생각은 이렇다. "술 좋아하는 사람치고 나쁜 사람 없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음주 행위에 비교적 관대한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 특히 음주운전은 정상참작 여지를 없애고 오히려 미필적 고의에 준하는 범죄로 엄하게 처벌을 해야 한다. 사고가 나면 피해자 가족의 삶을 완전히 파괴하는 중범죄이기 때문이다. 술 위주 접대 방식이 점진적으로 변화 중에 있긴 하지만 공연이나 야외활동 등 건전한 문화가 하루빨리 정착되었으면 좋겠다. 성인 놀이문화가 다채로워져야 한다. 몸도 가누지 못하면서 위험천만하게 택시를 기다리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위태롭다.


정조 임금님은 애주가를 넘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신하들이 대취하지 않으면 좌석 떠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니 술동무들이 얼마나 괴로웠을까? “정약용 선생이 가장 고달팠다고 한다.” 시쳇말로 ‘애로사항이 꽃피었다.’ 술도 약하고 완력도 세지 않은데 그토록 술을 마시게 했고 활을 쏘게 했다 한다. 오죽했으면 자식에게 술을 조심하라는 유언을 남겼을까? 나는 선생의 절박했던 심정을 누구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양평 가는 길에 있는 선생의 생가를 방문할 때면 뒤편에 누워계신 묘를 찾아 예를 갖추며 중얼거린다. 고생 참 많으셨다고.


술이 꼭 나쁘기만 할까? 독도 잘 쓰면 약이 된다고 했다. 술도 마찬가지다. 적당하기만 하다면 이보다 훌륭한 ‘삶의 윤활유’는 없어 보인다. 심약한 사람에게는 약간의 용기를 북돋아 주기도 하고 심각한 이에게는 마음근육을 이완하도록 도움을 준다. 서먹서먹한 자리에서는 말문이 쉽게 터지도록 한다. 정리하자면 ‘심신을 부드럽게 하는 신비로운 명 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시선이라 불렸던 이태백에게, 술은 그의 생애를 통하여 문학과 철학의 원천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독자 여러분이 대시인처럼 따라 하는 걸 권하지 않는다.


‘자신의 일과 술을 사랑하다’ 얼마나 멋진가! 일도 잘해야 하지만 풍류를 안다면 금상첨화다. 술을 전혀 못하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즐길 줄 아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술에 관한 말들이 넘치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구가 있다. “내가 술을 이기려 하지 않고, 술도 나를 이기지 않도록 한다.” 술이란 지혜로운 사람만이 가져갈 수 있는 선물이 아닐까 한다.


아 글쎄 주절주절 다 좋은데, '그래 50년 이상 불철주야 내공을 쌓은 나의 현재 주량은 얼마냐고?' 소주 반 병 정도다. (음... 투자 대비 효율 제로군!)


*갈참 : 특명을 받고 전역예정일이 얼마 남지 않은 선임병을 지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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