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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자생존하면 찰스 다윈을 연상하지만 실제로 이 용어를 최초 사용한 사람은 19C 영국의 사회학자 허버트 스펜서라고 한다. 여기서는 본래의 의미를 고찰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쓸모없는 생각이지만 힘들 때 그냥 웃어보자고 적는다. 책을 읽다가 어느 작가의 재치 있는 표현을 봤다.
“적는 자가 살아남는다.”라고 비유했다. 북한의 뉴스를 보면 젊은 지도자 앞, 옆에서 노구(老軀)의 군인, 관료들이 추운 겨울 날씨에 아랑곳하지 않고 조그만 수첩에 뭔가를 열심히 받아 적는 모습을 심심찮게 본다. 안타깝기도 하면서 산다는 게 저런 거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지금은 아니겠지만 과거에는 우리도 그랬다. 푸른 기와집에서 높은 분 주재 회의 중, 생각은 다른 곳에 가 있으면서 받아 적는 척하다가 회의와 관련 없는 필기 내용이 카메라에 잡혀 세간의 얘깃거리가 되기도 했다. 눈을 직접 맞추면서 대화하는 문화에 낯설다 보니 눈을 아래로 깔아야 차라리 속 편한 면도 있다. 나도 현역시절 회의에 참석하면 적는 척하는 게 경청하는 척 하기보다는 훨씬 쉽다는 것을 알았다.
사는 게 팍팍해지다 보니 일반 서민들은 적자(適者)를 적자(赤字) 인생으로 바꾸는 것만이 생존의 유일한 수단이 아닐까 한다. 마이너스 대출을 쓰지 않으면 살기 힘든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소득 창출 기회는 나날이 줄어들고 하늘 모르고 치솟는 물가는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실질소득이 지속적으로 하향 중에 있으므로 엥겔계수 산출 자체가 의미 없는 일이 되었다.
겨우 식료품 해결하고 나면 빈주머니다. 주부들이 가격이 오른 물건을 사지는 못하고 들었다 놓았다만 반복하는 영상을 보면 마치 내 일처럼 느껴진다. 이런 생각도 든다. 적자생존을 약간 넓게 해석하면 ‘적게 먹는 자가 생존한다.’는 말로도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최근 지구 전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기후 재앙을 보면 향후 인간의 먹거리가 제대로 공급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들기 때문이다.
채소가 금값인데 김치와 상추를 마음껏 먹겠다고 했다가는 식당 운영 관계자들의 공적(公敵)이 될 수 있다. 눈치껏 드시라! 적당해야 살아남을지 모른다. 스스로 지켜내지 못하면 도태되는 세상이다. “각자도생”이란 신조어가 유행하지만 불편하다. 피 튀는 경쟁과 공동체 의식의 파괴로 어느 누구도 어려운 이에게 손을 내밀지 않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진영을 가르고 정쟁에만 매몰되어 있다 보니, 국가는 고유의 책무를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 건지 조차도 모르겠다. 모든 시스템 작동이 적시성을 잃고 매끄럽지 못하다. 아쉽지만 당분간 우리의 선택은 하나다. 위 여러 사례 중 어느 하나의 적자가 되는 길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