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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백삼십여 년 전 정조 임금께서는 경복궁을 나선 후 지금의 노들 섬 북단에 멈추었다. 한강을 넘기 위하여 배다리를 이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관(官)과 민간인의 배가 총출동하여 교각역할을 했다. 당시 기술력이나 물리적 여건 아래서는 대단한 도하작전이었을 것이다.
강을 건넌 후 휴식을 취했는데 장소는 지금의 한강대교 남단 어귀에 있는 “용양봉저정”이다. 서울시 유적으로서 관리를 하고 있어 한번쯤 둘러볼만하다. 임금께서는 한강 동. 서쪽과 맞은편 북한산 일대를 바라보며 마치 용과 봉황이 노니는 것처럼 풍광이 뛰어난 점에 착안하여 정자이름을 작명했다고 한다. 정자 안에는 능 행차 일행을 그린 단원 김홍도의 작품 사본이 전시되어 있다.
나는 임금님 일행이 걸었던 중간지역을 도보로는 걸을 수 없기에 부득이(?) 사당역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수원화성으로 향했다. 목적지 정류장에서 내리자마자 화성일대에 쉽게 접근할 수 있어 놀라웠다. 구시가지 한복판에 위치한 것으로 보인다. 역사 문화공간을 넘어 치유의 장소로도 손색이 없다. 성곽 주변을 따라 걸어가니 경치가 매우 아름답고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장소가 아주 많다.
정조 임금은 개혁군주로 알려져 있다. 문무(文武)를 겸비한 왕이었다. 또한 정도를 넘는 애주가였다고 한다. 화성 축조에 중심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정약용 선생과의 일화도 있다. 대취(大醉) 하지 않으면 자리를 뜰 수 없게 했고 신체적으로 강인해져야 한다면서 수시로 활을 쏘게 했다고 한다. 선생께서 오죽하면 후손에게 술을 경계하라는 글을 남겼겠는가!
임금의 유년시절은 정서적으로 아주 힘들었음을 역사를 통해 알고 있다. 사도세자를 부친으로 두고 할아버지로부터 왕권을 물려받은 예외적인 사례였다. 외형적으로는 죄인의 아들이었고 비정상적인 승계였으니 자신의 입지가 얼마나 좁은지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반대 정치세력 과의 교감과 대화를 중요시했다. 현재의 우리 정치가 본받을 부분이다.
부친을 과오보다는 시대의 어쩔 수 없는 희생자로 부각해 명예를 회복시켜 주고 싶었고, 비운의 젊은 나날을 보낸 어머니 (혜경궁 홍 씨)를 위로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정통성도 확립하고 백성들에겐 효도의 상징으로 길이 남기고 싶어 축조한 이 행궁과 성곽이, 오늘날의 멋진 문화유산으로 탄생한 계기가 됐다고 생각한다.
행궁(行宮)이란 말이 의미하듯 움직이는 왕실이다. 부친 묘소를 목전에 두고 내시와 궁녀의 도움을 받아 의관을 정제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회한을 떠올렸을 것이다. 미망인이었던 어머니를 위해서 잔치를 베풀었던 모습이 고증을 통해 모형으로 전시되어 있다. 홀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정은 보통사람의 감정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행궁 안을 둘러보니 옛 분들의 숨결이 들리는 듯했다. 사극을 통해 간접적으로 상상해보곤 했지만 궁인들의 삶이 다시 궁금해졌다. 필요에 의해서 생겨난 제도겠지만 ‘내시는 자발적으로 원해서 그런 자리에 갔을까?’ 끝내 ‘왕의 은총을 받지 못한 궁녀는 인생의 마지막을 어떻게 보냈을까?’ 지금 시각으론 참으로 비인도적이다.
밖으로 나서니 커다란 광장 주변에는 맛 집들이 도열해 있다. 안내 표지를 보니 수제돈가스라는 명칭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젊은 시절 경양식집에서 경험했던 추억이 떠올라 문을 열었다. 오래된 한옥을 개조했는데 분위기가 제대로다. 느끼함을 잡으려고 맥주가 있느냐 물었더니 팔지 않는단다. 아쉽지만 주인의 철학을 존중한다. '융건릉은 다음 행선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