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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잎 클로버만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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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딤돌
다운로드 (4).jpg (네이버)


나는 살아가면서 행복하다는 감정을 상대적으로 덜 느끼는 것 같다. 소소한 일에서 감동을 받지 못하고 같은 상황이라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어서 일 것이다. 행복을 느끼고 못 느끼고는 유전적 요인이 절반을 차지한다고 한다. 그렇다고 생겨 난 데로 산다는 건 억울한 일이다. 감탄의 감도가 무디면 조금은 예민하게 반응하는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부와 권력은 소수가 독점한다지만 행복만큼은 누구나 자신의 노력과 세상을 보는 관점에 따라 가져갈 수 있는 선물이 아닌가 한다. 행복하지 않은 모습은 주위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밝지 않은 사람이 옆에 있으면 덩달아 기가 빠진다. 타고난 기질은 바꾸기 어렵다고 하니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해 보인다. 행복의 기준이 대단히 주관적이므로 스스로에게 맞는 행복 요인을 발견해 내는 지혜가 필요하다.


대단한 일만이 행복을 가져다줄 거라는 생각이 문제다. 소소한 곳에서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클로버 잎은 세 개가 정상이다. 게다가 꽃말이 행복이다.” 그렇다면 세 잎 클로버를 보면서 행복감을 느낄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들을 짓밟으며 굳이 네 잎을 찾아 헤맨다. 어렵사리 발견하면 기뻐하며 행운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는다. 아마 우리는 잔잔한 행복 대신 단발성이면서 충격이 센 신기루만 좇는 것일지도 모른다.


행복과 혼동하는 횡재는 아주 낮은 확률로 취할 수 있는 운(運) 일뿐이다. 반면에 행복은 스펙트럼이 넓다. 큰 것에서 소소한 것까지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감정이다. 행복해지기 위한 방법을 설명한 책이 많다. 보고 듣는 순간은 구구절절 지당하여 고개를 끄덕이지만 자신의 것으로 체화하기는 어렵다. 스스로 훈련을 하지 않으면 가질 수 있는 감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평범한 것에서부터 행복의 발견을 시작해야 자연스럽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걸 감사함으로 바꾸어 생각하는 것이다. 아프거나 속 썩이는 자식을 둔 부모를 보면 그나마 내 자식들은 자기 앞 가름은 하고 있으니 행복하고 주위의 지인들이 여러 사유로 하나 둘 떠나기 시작하는데 아침에 눈을 뜰 수 있어 행복하고 주변 도움 없이도 기본적인 의식주 해결은 할 수 있으니 행복하다.


너무 행복타령해도 욕심일 수 있다 하니 적당해야 할 것 같다. 어느 정도 나이가 되어보니 너무 치열한 삶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앞만 보고 살기에는 세상이 너무 넓고 경험할 것 또한 많다. 일정 나이가 되면 조금씩 내려놓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두 눈에 쌍심지를 켜고 산다 한들 별반 달라질 게 없을 것 같다. 전성기 때 이루지 못했다면 자신의 한계를 알아채는 게 본인과 모두에게 이롭다.


능력의 차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불행해진다. 세상의 이치가 불공평, 불공정하다는 사실을 거부할수록 힘만 들뿐이다. 삶과 죽음마저 초월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 정도의 세상 부조리를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다. 행복은 누가 가져다줄 수 있는 게 아니다. 스스로 느끼고 키워야 할 그 무엇이다.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일부러 향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장자크 루소는 “ 행복이란 돈이 있고, 잘 먹고, 소화를 잘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조금 수정을 하고자 한다. ‘ 아프면 병원 찾을 수 있고, 가까운 곳이라도 나들이를 할 힘이 있고, 속마음을 얘기할 수 있는 상대가 있다면 행복의 기본 요건은 갖추었다고 생각한다.’ 행복 역시 선택의 문제이고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가까이할 수 있는 감정이다. 모든 걸 갖추어도 항상 목마르다면 기질인가 보다 하고 살아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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