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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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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딤돌


다운로드 (1).jpg (네이버)


잔고와 잔액이란 용어는 실생활에서 동의어처럼 사용한다. 은행거래에서는 잔액이란 단어로 주로 표기하는 듯하다. 둘 다 “축적된 나머지”란 뜻에는 변함이 없다. 대부분은 잔고가 충분해야 뿌듯한 마음이 들고 근심거리도 줄어든다. 옛사람들은 땔감 충분히 준비하고 김장하고 쌀을 비축하면 겨울 걱정이 없다고 말했다.


요즘 유행하는 “텅장”이란 말이 있다. 돈이 예금통장을 스쳐만 지나갔지 남은 건 하나도 없다는 재미있는 비유다. 이처럼 텅장 인생도 서러운데 우리에게 남은 삶은 늘리는 게 어렵고 한여름 가뭄에 논물이 바짝 말라 가듯이 오로지 줄어들기만 한다. 잔고 지시표가 아래를 향해 깜박일 뿐 다시는 채워지지 않는다.


슬픈 일이긴 하지만, 대신 성찰을 통하여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지혜를 발견하게 한다. 육체의 노쇠는 피할 수 없다지만 정신세계는 얼마든지 잔고를 늘릴 수 있다. 마지막까지 배우는 자세를 견지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뇌건강 유지와 마음의 양식을 늘리기 위해 독서를 꾸준히 할 필요가 있다.


유독 잔고가 빨리 쌓이는 게 있다. 분노 게이지의 급상승이다. 우리 사회는 갈등과 분노로 가득 차 있다. 이념, 정치, 경제, 통합, 환경 등 어느 곳에서도 절충점을 찾지 못한다. 같은 하늘을 이고 사는 사이가 맞나 싶을 정도로 상호 간 공격성이 강하다. 금방이라도 넘칠 것 같은 끓는 냄비와 같은 수준이다.


압축성장과 민주화는 커다란 선물이었지만 그림자 또한 짙다.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고 하나 의식 수준은 아직 멀었다. ‘상호존중과 배려라는 덕목을 상실했다.’ 극한경쟁, 독식이라는 괴물이 배출한 독성으로 가득 채워졌다. 독(毒)의 잔고를 줄여야 살 수 있다. 마땅한 처방전이 없어 상당기간 고통은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잔고가 줄어들기만을 기다리는 부류도 있을 수 있겠다. 갇힌 몸이 된 자는 형기란 잔고가 빨리 줄기를 학수고대할 것이다. 오래전 군복무 시 괴팍한 선임병은 졸병들에게 매일 자신의 전역예정 날짜를 보고하게 했다. 나 역시 복무 잔고가 ‘텅’인 사람이 제일 부러웠던 이등병 시절이 있었다.


사람이란 교육을 받지 않으면 상당히 비도덕적인 존재다. 목숨과 재물은 무한대로 커지기를 기대하고 책임이나 부담은 피하려고 무척이나 애쓴다. 한마디로 자기 생각대로, 유리한대로 살고 싶다는 얘기다. 그런데 세상이 마냥 녹록한 곳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열이 나기 시작하고 이상증세가 찾아온다.


우리는 우주와 자연의 주인이 아닌 손님일 뿐이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게 내 것이 아니라 잠시 빌린 것이라고 현자들은 말한다. 결국 ‘모든 걸 반납해야만 한다.’ 잔고를 높이는 일에만 매달려 죽을 둥 살 둥 할 일이 아니다. 역설적이지만 비워낼 줄 알아야 오히려 삶의 충만함을 느낄 수 있다.


채우지 않은 공간과 여백은 우리에게 다시 새로운 것을 채워 넣을 여지를 마련해 주고 상상력을 선물한다. 고요함과 차분함은 꽉 채운 상태에서는 느낄 수 없는 감정이다. 맨 꼭대기 능선은 모든 게 드러난다. 불필요한 표적이 되기 쉽다는 뜻이다. 잔고가 조금 덜 찬 7~8부 능선이 안전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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