득의담연-실의태연
< 得意淡然, 失意泰然 (4)>
(정상에선 득의양양하기 쉽다 네이버)
득의양양(得意揚揚)과 일희일비(一喜一悲)를 경계하라는 말이다. 평소 다짐해 두면 좋을 말이지만 현실에선 쉽지 않은 마음가짐이다.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소속된 곳에서 활동을 멈추어야 만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저런 눈치 보며 어렵게 지켜오던 자리를 타의에 의해 종점이 아닌 곳에서 내리기란 서글픈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실의태연의 자세를 견지할 수 있다면 패배의식으로부터 조금 더 빨리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당장은 상처가 쓰라리겠지만, 어차피 살면서 겪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정신적으로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도 넓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의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 다음과 같은 문제가 야기된다.
스스로를 왜소하고 초라하게 만든다. 자신감 상실은 더 깊은 나락으로 밀어 넣을 뿐이다. 세상에서 더 이상의 역할이 없어진 듯하여 형언하기 어려운 상실감이 찾아온다. 누가 뭐라 하지도 않았는데 괜스레 주눅이 들고, 모든 얘기가 비비 꼬여 들리니 반응이 부드러울 리 만무하다. 인품마저 동반하여 추락한다.
세상이 원망스럽다. 자책(自責)을 하는 사람은 그래도 다행이다.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보통은 핑곗거리를 찾게 된다. 잘못의 원인을 밖으로부터 찾으려 하기 때문에 과도한 분노를 유발하게 되며 원망이 커지게 되어 꼭 필요한 관계마저 헝클어지게 한다. 폭발 일보 직전의 사람 옆에는 누구든 가까이 다가서려 하지 않는다.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우울증이나 공황장애를 친구로 만든다. 모든 걸 경제적 손익(損益)의 관점으로 보니 항상 피해를 입는 것처럼 느껴져 울화가 생기게 되고, 급기야 마음의 감기에 전염되어 주위사람까지 힘들게 만든다. 고립을 자초하고 분노와 외로움에 시달리면 갈 곳은 오직 한 곳, 병원뿐이다.
몸과 관련된 건강을 망친다. 마음이 무거우니 각종 신진대사(新陳代謝)가 정상적으로 작동될 리 없다. 같은 물을 마셔도 독으로 변한다. 건강할 땐 나타나지 않던 질환도 이런 상황에서는 고개를 내민다. 정신적인 면에서도 고통을 벗어나지 못하고 육체적인 건강까지 나빠지니 설상가상이다.
나 자신도 그렇게 길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감정에 파묻혀 지낸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가 없다. 원하지 않은 일련의 과정들이 한때는 괴로움을 주었으나, 세상이치가 그러하듯 잃은 게 있으면 좋은 측면도 많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일희일비할 이유가 없다.
(심산계곡에서도 솟아날 수 있다 네이버)
실의에 빠져도 태연 할 수 있으면 한층 성숙된 삶을 살 수 있다는 생각이다.
우선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갖게 된다. 젊은 시절에는 물론 경쟁도 필요하고 목표 달성을 위해 주변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능력과 좋은 평판이 나의 위치를 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십 대 중 후반 무렵부터는 앞만 보고 달릴게 아니라 주위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인생의 방향이 맞는지 중간점검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세상은 내가 보고 들은 게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파편에 지나지 않은 나만의 색안경을 가지고 세상을 보고 판단하는 건 자칫 위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실의에 빠진 시기에 자신을 돌아보는 건 큰 의미가 있다.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는 말도 있다.
득의양양 상태가 日常이라면 더 이상 무슨 짜릿함을 느낄 수 있겠는가? 실패도 경험하고 실의에 빠져보기도 해야 득의를 했을 때의 기쁨을 제대로 맛볼 수 있는 것이다. 어려운 상황에서 세상의 지혜를 더 발견할 수 있다. “세상살이에 곤란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는 말이 있다.
전쟁 같은 일터에 던져져 앞만 보고 달려오다 한 번 넘어졌다고 실의에 빠지지 않았으면 한다. 특히 은퇴를 목전에 둔 경우라면 충분히 열심히 살았고 책임도 성실히 수행했다. 더 갖지 못함을 괴로워 말고 앞으로는 경험을 사는데 집중하길 권한다. 이를 적극 실천한다면 인생의 마지막 장에 섰을 때 아쉬움이 덜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