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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딤돌 Mar 26. 2024

천주교 성지를 다녀와서

<1>

(성지 입구에 설치된 표지석)

     

  나는 종교가 없지만 혹시 모를 사후 심판이나 업보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천당이나 극락에 가지 못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도 한다. 지옥은 싫고 연옥이라도 갈 수 있을지 몰라 가급적 양심불량한 행위를 하지 않으려 노력 중이다. 종교의 매우 중요한 기능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어머니께서는 생전에 고향에 있는 성당을 다니셨다. 시골집 안방에 성모상을 모시고 곁에 초를 켜두고서는  틈틈이 기도하셨는데 당신에겐 ‘가족의 안녕과 복 많이 받음’이 제일 우선이었다. 자식들의 건강, 세속적인 출세, 형제간 우애 지속등을 주문하셨다. 성실한 신도였다가 배교(背敎)까지는 아니지만 갈등도 있었다. 


  아버지께서 별세하셨을 때 성당관계자에게 장례미사를 부탁하였으나 부친이 비신도인 관계로 거절을 통보받았다. 성당 측도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었겠지만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아 어머니께서 많이 서운해하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하늘에서는 오해와 아쉬움을 푸셨는지 궁금하다.   

  

   형 내외 및 가족은 열성 신도다. 조카들을 신부와 수녀의 길을 걷게 하는 게 꿈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비신자인 나의 입장에서는, 성당에는 지극정성인데 부모 형제는 다음 순위인 것 같아 서운한 마음이 든 적도 있다. 지금은, 성당을 통하여 영성이 충만하고 평안한 삶을 누리는  형님가족의 신앙생활을 적극 지지한다. 


  큰아들이 며느리를 만나면서 둘 다 천주교 세례를 받았고 명동 성당에서 결혼하는 영예도 누렸다. 세례식과 결혼식을 거치면서 천주교를 새롭게 알게 되었다. 간결하면서도 세련되고 숭고함을 느끼게 하는 분위기가 참으로 좋았다. 자식들과 원만한 대화를 위해서라도 천주교에 대해 공부를 할 생각이다. 

 

(절두산 성지 내 김대건 신부 동상)


  얼마 전 지인 아들 결혼식에 참석했는데 장소가 이촌역 근처 한강성당이었다. 입구에 김대건 신부 동상이 있다. 이때 절두산 성지를 둘러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집에서 성지까지는 대중교통으로 한 시간 정도 소요된다. 약간 더운 듯했지만 날씨가 맑고 공기도 비교적 깨끗하여 도보로 이동하기에 최적이었다.


  합정역에서 하차하여 조금 걸으니  입구가 보인다.  꽃들이 만개는 아니지만 제법 자태를 뽐 낼 정도다. 꽃밭이 있는 곳은 벌과 나비 대신 역시 열혈 여성들의 영역이다. 어느 일행이 스스로 찍는 게 서툰 연배라서 그런지 나에게 촬영을 부탁했다. 세월의 흔적을 숨길 수 없는 나이였지만  예쁘게 찍어달라고 주문한다. "찍을게요~ 스마일 찰칵!" 스스로 젊고 예쁘다는 긍정적인 사고와 자세는 배우고 싶다. 자존감이 높아 나쁠 건 없다.

    

  성지에 대한 안내문을 자세히 읽었다. 천주교에 대해 새로운 내용을 더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김대건 신부 동상, 바오로 교황과 테레사 수녀의 흉상을 돌아보고 순교자들의 묘도 들렀다. 대원군이 세운 척화비와 김대건 신부의 좌상이 너무 가까이 인접해 있어 묘한 느낌이 들었다. 


  맞은편에는 근린공원이 있고 조그만 광장이 한강 산책로와 연결되어 있다. 카톨릭 신자여부를 떠나 힘들 때는 이곳을 거닐며 사색하는 것만으로도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될 것 같다. 최초 영세를 받은 이승훈 신도의 아담한 동상도 보인다. 당시 수많은 박해가 연이어 있었음에도 천주교는 어떻게 뿌리를 내릴 수 있었을까? 

     

(테레사 수녀 상)


  유교이념이 지배했던 시기에 조상 제사를 거부하고 신 앞의 평등사상을 주창했으니 당시 조선에는 엄청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인륜을 저버린 종교”라고도 했다. 여기다가 정치 파벌 간에 정적 제거의 수단으로 천주교를 끌어들인 면도 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당시 조선은 이웃 일본이 천주교를 어떻게 대하는지 알고 있었고 일부 선교사들의  일탈된 행동(노예 매매 관여)을 들은 바 있어 그들에 대한 반감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있었다. 조선 입장에서는 외국인 자체를 밀정, 염탐꾼으로 생각(하멜이 어렵게 일본으로 탈출하여 네덜란드로 돌아간 이유이기도 하다)했다. 청나라와 일본도 버거운데 추가로 서양세력의 진출을 정부는 불편해 했을 것이다.  


  정약용 선생의 큰형 (정약현) 사위인 “황사영의 백서사건”은 천주교 신도를 더욱 박해하게 되는 결정타가 되었다고 한다. 베이징 주교 앞으로 청원서를 보냈는데 내용이,  청나라를 개입시켜 조선의 박해를 중단시키고자 했던 것으로 이는 외세청탁으로 비치는 결과를 초래했다. 물론 최악의 상황에 처한 천주교인을 보호하고 포교를 위한 충정으로 이해되지만  독립국인 조선으로서는 심각한 사안으로 받아들인 듯하다. 

    

(*척화비)

 

  유럽 일대의 중세역사를 보면 어두운 면이 많은 것 또한 사실이다. 반면, 난폭하고 투쟁일변도인 동물 수준의 인간을 이 정도로 순화시키고 질서를 유지하게 만든 공로는 천주교의 최대 치적이라고 나처럼 평범한 사람도 동의한다. 참신앙인 들은 약자를 대변했고, 질식할 정도의 신분사회 그늘에서 방황하던 사람들에게 평등과 ‘희망’이란 복음을 전파했다. 그만큼 지켜내야만 할 가치가 있었기에 순교한 사람이 많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종교에 대해 중립이다. 사람이 다르듯 믿는 바도 다양해야 한다고 본다. 무언가 통일되고 획일적인 사회와 집단의 위험성을 보아왔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국민성과 지리적인 위치는 신앙 보전. 교리 유지에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정작 해당 종교의 발상지였던 국가(불교, 유교)는 뿌리가 흔들리는 듯하고, 전파를 받은 입장인 우리는 변색 없이 종교 근본 취지를 잘 지키고 있는 것 같다. 

 

  이곳은 “천주교 성지 겸 명상의 공원”이라 불릴만한 곳이다. 천주교에 실례가 되는 일인 줄 모르겠으나 개인적으로 “절두산”이란 명칭을 순화해서 부르면  어떨까 하고 제안하고 싶다. 물론 박해를 받던 신자들이 먼저 그렇게 불렀다 한다. 한자 의미를 잘 모르는 세대는 덜하겠지만 너무 비인도적인 끔찍한 모습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여론조사를 한다면 나는 ‘순교자의 산’ 이란 의견을 낼 것이다.  

   

  ‘천주교 박해의 사유가 될 수 있는 내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척화비(賣國.邪學)와, 수많은 순교자들이 피를 흘렸던 비극적인 장소!’ 도저히 양립할 수 없어 보이는데도 역사적 비극의 유산이 이곳에 함께 자리하고 있다. 우리 선조들의 회한과 아픔이 깊게 스며든 한강변의 야트막한 산!  공존, 믿음과 사랑이 왜 중요한지를 돌아보게 하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엄숙한 가르침을 주는 신성한 장소라는 느낌을 받았다.



* 척화비 내용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매 싸우지 않음은 곧 화친을 주장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함은 곧 나라를 파는 것이다.

  (계아만년자손 병인작 신미립)

우리 자손만대에 훈계하노라. 병인년(1866)에 만들고 신미년(1871)에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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