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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딤돌 Jun 01. 2024

하늘의 백장미

<5>

   

  매년 6월 1일 이 되면 가까운 이를 잃었을 때처럼 가슴이 찡한 하루를 맞는다.

낙하훈련 중 수송기 추락사고가 발생(1982.6.1)했던 적이 있었다. 공수 250기 교육생들 중 일부가 탑승했던 비행기 한대가 청계산 매봉 근처에서, 짙은 안개로 인해 산중턱에 추락한 사고였다. 이때 순직한 병사들의 묘비가 동작동 현충원 27번 묘역 전면에서 세 번째 줄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난 이후부터다.   

  

(동작동 현충원 27번 묘역)

  

  사고 당시 나는 대둔산 일대에서 야외 종합 훈련 중이었는데 선임하사를 통해 이 소식을 들었다. 당시에는 ‘참 안 됐다!’라는 인식 정도로 지나갔다. 나 자신도 언제 그런 운명을 맞이할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C-123라 불렸던 수송기는 불시에 추락한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것 없다는 느낌을 평소에 받았기 때문이다.  

   

  나도 해당사고가 나기 보름 전쯤, 대대 단위 훈련이었고 공중침투 방식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K-16 비행장으로 수송되었다. 산악복을 입고, 주낙하산. 예비낙하산을 착용 후 태권 도복 띠를 이용하여 무거운 군장을 허리에 묶고, 45도 정도 뒤로 누운 자세에서 수송기 탑승을 위해 대기하던 모습이 엊그제 일 같다.  

   

  온몸에 입고 걸친 군장이 무거워 오리 궁둥이 걸음으로 수송기에 올랐다. 약 1시간 여 비행 후 낙하시작을 알리는 신호가 떨어지고, 전라북도 소재 운장산 일대에서 집단 강하를 시작했다. 매번 낙하 훈련을 할 때마다  조금이라도 빨리 비행기를 이탈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왜 그런 기분이 들었을까? 


  해당 수송기를 경험한 사람은 똑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너무나 허술하고 불안전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1939-1945) 중에 활약했다 하니 당시 기준으로도 약 40여 년이 지난 고물 철 덩어리나 다름 아닌 셈이었다. 하지만 이륙을 위해 별로 달리지 않고서도 굉음과 함께 갑자기 하늘로 뜨는 게 신기할 정도다.    

  동체 내부에 보이는 것이라곤 얽히고설킨 전선줄과 전기시설 부품들, 그리고 낙하산 생명줄을 거는 철봉 두 개와 우리가 앉는 네열의 좁은 의자뿐이다. 낙하지점 도착을 알리는 요란한 사이렌소리 외에는 컴퓨터에 의한 통제 시스템이 아니었기에 점프 마스터의 육안에 의한 판단으로 낙하지점을 찾았고 모르긴 하지만 공군의 조종 관계자들도 항상 위험을 안은 채 자신들이 체득한 감에 상당 부분 의존해 비행을 했을 수도 있다.   

  

(C-123 수송기   네이버)


  당시에는 국력이 미미했고 모두가 힘든 시기라서 사람 우선하는 생각 자체가 약간 사치였을지도 모른다. 겉으로는 아닌 척했어도 인명경시 풍조가 만연 했다는 생각이다. 자조 섞인 말이었지만, 오죽하면 이런 말을 우리끼리 했을까? ‘ 비행기 한 번 뜨는데 드는 기름 값이 얼만데 기상악화라고 훈련을 중단해? 죽든 말든 비행기 밖으로 뛰쳐나가!’...     


  당시 미군들의 낙하훈련 규칙을 들어보면 어떻게 이토록 '사람 우선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훈련에 이용하는 수송기는 C-130E라는 기종이었고 모든 게 컴퓨터의 통제 하에 운영되는 첨단 수송기였으며 기상 조건 즉, 안개, 바람 속도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훈련여부를 결정한다고 들었다. 


  우리는 어려운 환경이었기에 전부 그들을 따라 할 순 없었다 하더라도 장병들의 인명을 중시하는 기조가 조금이라도 군대 내에 형성되어 있었다면 그토록 기상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무리한 훈련을 시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42년 전 오늘, 그들은 한 치 앞도 가리기 어려운 짙은 안갯속에서 낙하훈련을 수행하기 위해 하늘로 올랐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고 불귀의 객이 되었다. 


(44인 중 어느 병사의 묘비)

 

   그들은 자격 강하(4회 실시)를 위해 긴장감 반 설렘 반으로 처음 수송기에 올랐다. 그러나 이륙하자마자 기상 악조건으로 청계산 상공이 그들의 최후 장소가 되었다. 독수리 날개를 가슴에 달기 위해 몸부림치다가, 그들이 훈련 기간 중 그토록 불러댔을 군가 가사처럼 “이슬처럼” 사라진 것이다. 


  동체의 이상을 직감하고 사랑하는 가족과 지인들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을 것이고 너무 짧은 생이 사무치게 아쉬웠을 것이다. ‘그들은 죽었고 나는 지금껏 살아있다. 무엇이 이처럼 우리들의 운명을 결정지을까?’ 살아있다는 자체가 축복이라고 하는데 나는 왜 수시로 ‘삶’이란 정체 앞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종종 흔들리는 걸까?  

   

  많은 세월이 흘러, 이제 그들의 부모님들은 깊은 상처를 안고 하늘로의 여행을 준비할 나이가 되었고, 형제자매들은 머나먼 시절 아픈 기억정도로 희석되었을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그토록 비극적인 아픔이 없어야 할 터인데 그럴 수 없는 게 세상사인 모양이다. 최근에 들리는 훈련병 사망소식은 더욱 안타깝다.    


(기다랗게 일렬횡대로, 순직 대원들이 잠들어 있는 모습  / 붉은 장미꽃이 석조화병에 꽂혀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의식은 교육생 44명과 교관요원 5명 그리고 공군 조종 관계자 4명의 묘비 앞에서 잠시 추도의 시간을 갖는 것뿐이다. 다음과 같은 말을 속으로 되뇐다.  ‘그대들이 다하지 못한 목숨의 여분을 이어받아 살고 있는 나! 마지막 날까지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리다.’     


  만약, 만약에 사고가 없었다면 그들 44인은 비행기에서 이탈 후, (낙하산이 개방되면 순간적으로 사람을 약간 위로 낚아챈다. 철커덩!! 거리는 느낌은 가장 듣고 싶은 구세주 같은 소리다)"일마안, 이마안, 삼마안..."을 헤아리다 고개를 힘껏 쳐들고 이렇게 외쳤을 것이다.  "*산개(散開) 검사!"


  고개 위에 한없이 넓게 펼쳐진 생명의 구세주! 그들의 초롱했던 눈엔, 어릴 적 보았던 시골 초가집 지붕보다 더 큼직한 낙하산은 다름 아닌 백장미 자체였을 것이다. 


* 산개 검사 : 비행기에서 이탈 후 낙하산이 제대로 개방되었는지 확인하는 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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