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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내린 봄비는 제법 사나웠다. 이 비로 인해 말랐던 대지가 충분히 적셔졌지만 어느 개체에게만큼은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바로 아카시나무다. 꽃이 만개할 즈음에 내린 비로 인해 물기를 가득 머금은 꽃송이들은 속절없이 가지와 함께 무너져 내렸다. 주변 생태계엔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고달팠다. 달콤한 향기를 매해 선물하다가 올해는 자신들의 역할을 수행할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요즘은 워낙 꽃의 종류가 다양하다 보니 철에 따라 피는 대표적인 꽃이 무엇인지 조차 모를 정도로 혼란스럽다. 그러나 나만의 기준으로 꽃에 대한 생체시계가 작동되고 있는데, 이 무렵쯤이면 계절의 여왕이란 오월과 함께 한껏 자태를 뽐내던 장미도 자리를 내어 줄 준비를 한다. 다음 주인공은? 바로 밤나무 꽃이다. 엥? 밤꽃도 꽃이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유월의 어엿한 주인공은 밤나무다.
그런데 약점(?)이 있다. 꽃 자체가 화려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향기가 특이하다. 비릿한 냄새를 풍기기 때문에 사람들은 멈칫한다. 나는 견딜만한데 엄살이 심한 사람은 자신의 코를 붙잡고 자리를 피하기 일쑤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인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해당 나무를 심었고, "밤섬"이란 명칭은 섬의 모양이 밤 같아서 지어진 것이라는 주장도 있고 냄새가 싫어 별도 떨어진 곳에 집단으로 식재하여 생겨난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수확의 계절 초입에 접어들면 제일 먼저 등장하는 게 바로 토실토실한 알밤이다. 산토끼와 다람쥐에게는 꿈의 먹이일 테지만 우리의 욕심 때문에 그들의 차지는 많지 않다. 거친 가시가 알밤을 감싸고 있지만 신이 난 사람들의 발에 밟혀 자신을 보호하던 둥지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다. 밤은 예부터 제사나 차례상에 오를 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조율이시란 말을 들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작년 이맘때쯤 공주를 여행한 적이 있는데 그곳 특산물로써 밤막걸리가 유명하다는 걸 알았다.
한편 은행나무는 어떠한가? 88 올림픽을 전후하여 가로수로서 본격적으로 심었다. 생존력과 공기정화 능력이 뛰어나고 병충해에 강하다고 한다. 은행잎은 가을의 정취를 대변하는 상징물이기도 했고 나무가 산출해 낸 열매는 애주가들이 수시로 들렀던 선술집의 훌륭한 안주거리 역할도 했다. 그러나 이면엔 그늘도 있다. *자웅동주가 아닌 은행나무는 암수나무가 따로 있는데 열매를 맺는 암컷나무의 미래가 어둡다.
씨를 감싸고 있는 물질로부터 풍기는 냄새 때문인데 나에게도 편하지 않은 게 사실이다. 보행에 지장을 주고 미관에도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그 시간이 길지 않으므로 공존한다는 의미에서 조금 견뎠으면 하는 게 나의 바람이지만 우리에겐 자비가 부족해 보인다. 불편함을 참지 않는다. 가히 은행나무 수난시대가 도래했다. 인간은 전장에서 수컷이 베어지지만, 은행 알을 맺는 암컷나무는 가로에서, 정원에서 무참히 베어지고 있다.
운 좋게 숫나무는 목숨을 부지하고 있지만 과거 길가의 플라타너스 나무처럼 한순간에 사라질지 모를 운명에 처해 있는 것이다. 이런 표현이 떠오른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 우리들의 주특기다. 불편할 땐 그토록 푸대접하면서도 그들이 빚어내는 최종 과실(밤꿀, 알밤, 은행 잎. 알 등) 앞에선 서로 줍기 위해 두 눈을 부릅뜨고 주위를 서성거린다. 그래서 밤 껍데기엔 가시가 돋아나고 은행열매는 냄새를 풍길까?
은행나무는 우리의 건강에 도움을 주는 성분이 있어 의학적으로도 유용하다. 늦가을에 떨어지는 노란 은행 잎은 각박한 우리의 정신세계를 조금이나마 정화시켜 주는 공헌을 해왔다. 그럼에도 우리의 이중적인 태도로 인하여 밤섬처럼 '은행나무섬'도 출현할까? 나는 은행나무와 밤나무를 가까이에서 보길 원한다. 잠깐의 불편함 보다는 그들을 바라보며 얻는 위로가 훨씬 크기 때문이다.
*조율이시(棗栗梨柹) : 대추, 밤, 배, 감을 말한다
*자웅동주(雌雄同株) : 암꽃과 수꽃이 한그루에서 피는 식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