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엄마 사랑하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엄마는 대수롭지 않게 밥을 먹다 말고 내게 말했다.
엄마랑 아빠는 이제 같이 살지 않을 거라고.
당시 '더 이상 같이 살지 않음.'이라는 말은.
이혼이란 조금은 복잡한 단어를 어린 내게 가장 빠르고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말이었을 테다.
상처가 없었다면 거짓이겠지만 그럭저럭 잘 지냈다.
크게 달라질 건 없었지만, 꽤나 인상 깊은 몇 개의 사소한 편린은 아직까지도 남아있긴 하다.
가정환경 조사시간에 매번 이혼가정은 번쩍 손을 들어야 했다, 그렇게 온 반 아이들에게 노출이 되면,
가끔 이유 없는 놀림을 당하거나. 담임 선생님이 다른 아이들보단 좀 덜 챙겨준다는 게 종종 느껴지는 정도랄까?뭐, 딱 그 정도가 다였다. 나이 들어서 그런 기억들은 되레 나를 어떤 상황에서도 '덜 상처받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해 주어서 차라리 도움이 되었다 친다.
다시 돌아와서, 내가 기억하는 가장 어린 시절부터 아빠는 늘 집에 없었고 사업을 해야 했고 늘 집보단 밖을 살피는 게 더 중요한 사람이었다. 늘 좋은 양복에, 좋은 시계, 좋은 차를 끌고 다녔다. 지금 떠올려보면 분수에 안 맞게 하고 다녔다 싶다. 그런 아빤 가끔 집에 올 때면 어린 내게 괜한 것들을 트집 잡아 혼을 내던 기억만 떠오른다.
느닷없이 불쑥 와서 하는 그런 행동들이 아비 노릇이라 생각했던 모양이었는지. 아무튼, 아빠는 애초부터 멀어질 사람이었으리라.
목련을 좋아하는 엄마는 우리 자매를 키우려 청춘을 바쳤다.
좋아하는 그 꽃을 닮아서였을까, 짧게 피었고, 세월에 저물어 갔다.
방문판매, 옷 가게, 사진관, 카페, 식당까지. 그 사이에도 여럿 일이 있었을 테고 언제나 꽃이었던 엄만
언젠가부턴 꽃이 아닌 척, 길고 긴 낮밤을 달려 나와 동생을 벌어먹였다.
그렇게, 하염없이 시간은 흘렀다.
엄마의 레퍼토리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말 1위는 단연코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시리즈이다. 무슨 말만 하다가 불리하거나 하면 꼭 저 시리즈가 나온다.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만원이 없어서 정말 힘들었어도 너희는 안 굶기려고...'
'내가 너희 둘을 키울 때, 혼자 새벽마다 시장 나가서..'
맞는 말이다.
그렇게나 고생해서 키웠는데, 그런 내가 사실은 엄마에겐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물(?)로 남았다.
엄마의 꽃처럼 피어난 지난 시간을 먹고 자란 난, 건너 건너 엄마의 친구 자식들처럼 좋은 회사도 들어가지 못했고, 다른 친구들의 자식들처럼 짝을 찾아 결혼을 한 것도 아니며, 늦게나마 하고 싶은 일에 도전했지만 당장의 수익이 보장되지도 않는 일을 (혼자) 신난다고 하고 있다.
그런 구제불능인 딸내미여도, 나는 엄마가 떨군 꽃잎이 씨가 되어 돋아 자라난 싹이다.
엄마의 뜻에는 모자라게 컸을지언정 그 넘치게 내려받은 사랑을, 그 온 마음을 결코 모르진 않는다.
친구들과 맛있는 식당을 가고, 정말 끝내주는 디저트를 먹거나, 좋은 전시, 재미있는 영화나 공연을 볼 때면 난 항상 엄마를 떠올린다. 거침없이 곧 함께 가겠다 약속하며 카톡을 보낸다.
무언가 궁금하거나 하면 엄마는 내가 마치 네이버 검색창인 것처럼 하나부터 열까지 묻는다. 어디 약속을 가거나, 초행길을 갈 때면 불안해하는 엄마를 위해 지도 앱을 켜 골목마다 캡처를 하고 길을 알려준다. 귀찮은 내색은 하지 않는다. 그렇게 나는 엄마 전용 시리(siri)가 되었다.
또, 내 마음과 같을 수 없는 턱없이 적은 금액일 테지만 엄마가 편히 쓸 수 있도록 내 카드를 건네 주었다.
기분이 좋다며 엄마가 고갤 갸웃, 코를 찡긋하며 웃었다.
나는 이렇게나 마음을 쓰고, 다정할 줄 아는 사람은 아니다.
그런데 이렇게 엄마에게 습관처럼 하고 있는 걸 굳이 나열하고 보니.
아, 알겠다.
나 엄마 사랑하네.
'엄마랑 아빠 이제 같이 안 살 아, 무슨 말인지 알지?'
아빠와의 이혼 사실을 어린 딸에게 말하던 젊은 엄마의 마음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그 말을 한참을 곱씹다 선물도 아닌 것을 조심스레 꺼내놓은 당신의 심정을 이제 와 뒤늦게 걱정한다.
괜찮다고, 나는 상처받지 않았으니, 받았어도 이젠 잊을 테니.
내겐 모든 날의 꽃이었던 당신도 괜찮았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