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냅다 도망쳤다.
매혹적인 세계를 가진 척 다가온 누군가는, 어느 순간 온전히 자신을 그저 이해하라고만 했다.
너는 이해해야지.
너는 알아줘야지.
너는 시키는 대로만 할 줄 알았어.
너는 안 그럴 줄 알았어.
너에게 실망한 나를 봐.
입으로 수차례, 눈으로는 수십 번을 들었을 말들.
누군가 원하는 대로 맞춰 내가 변할 순 없다는 건 당연한데, 그걸 모르는 사람이었다.
특히나 내 주변 어른들이 좀, 그랬다.
그래서 어느 순간, 그런 어른들을 대할 때면 난 기대하지 않는다 말하고,
되풀이되는 자기중심적인 행동에 원망도 미움도 없다며 무심한 척, 그랬다.
내 잘못이 아님에도 번번이, 어쩐지 미안한 탓에 내가 내 마음에 상처를 받았으니까.
사람사이에 마음을 주고받는 게 단순히 무언가 오고 가는 행위가 전부가 아닐 텐데.
내가 '2'를 줄 테니, 너는 '1'만 줘도 된단다.
너그럽게 말하지만, 당신은 자신에게서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은 2를 줘놓고
반면 나에겐 제법 중요한 1을 달라고, 번번이 무리한 요구를 참 쉽게도 해댄다.
내가 내놓아야 했던 그 '1'만큼의 일들은 어느새 내 의사는 안중에도 없이
'어른들이 알아서 결정할 일'로 결계를 치고, 내게 반복적으로 되풀이되는 통보로 나타나거나,
또는 그들이 멋대로 빚어둔 나에 대한 기대심 등등으로 버겁게 전해져 왔다.
어리숙한 나는 그걸 알면서도 '아, 얼마나 쉽게 마음을 열었던 가.'를 절실히 깨닫는 순간은 매번 늦는다.
손에 쥐어준 '2'에 결코 나를 온전히 위한 것은 없다는 걸 몇 번이고 학습했다.
그렇게 난 자연스레 실망하는 것에 빠르게 무뎌지고, 단숨에 멀어지는 것까지도 아주 편하게 하게 되었다.
내가 잠시 새아버지라 불렀던 분은 악의가 있는 사람은 물론 아니었다.
언제부턴가 그가 가진 특유의 고집스러운 성향들이 나에겐 조금씩 버겁게 느껴진다는 걸 느끼면서부턴
종종 서로 간엔 예측할 수 없는 트러블이 생기기 시작했다.
본인 머릿속에 울타리를 세우고, 그 틀 안에 나와 우리를 가두면 그게 확실한 행복이 될 거라던 그의
요상스러운 믿음은 시간이 갈수록 채워지지 못한 채 점점 못나져 갔다.
여물지 못하고, 상처만 남기고. 여기서든 저기 서든 불안하게 흔들렸다.
한 사람에겐 각자의 세계가 있다는 말이 어느 글귀에서 보았을 때처럼 낭만적이지만은 않았다.
내가 본 그의 세계(내면)는 어쩐지 단단하지 못한 것 같았고, 매사 불만 투성이었다.
그는 스스로가 채우지 못한 갈증을 나와 나머지 가족을 통해 채우려 애썼다.
본인의 행복을 나와 나머지 가족의 행복과 강하게 동일시시켰다. 자신을 기준으로 한 느닷없는 배려에 웃지 못하던 나를 야속해했다. 참을 수 있을 만큼은 버티는 것이 정답이라 생각했던 때, 예고 없이 내 일상을 흔들어 놔도 그 사람이 만든 울타리 안에서의 난 괜찮은 척 웃어야만 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의 전부라고 믿었다.
점점 자신이 정의해 둔 모습으로만 봐주길, 되어주길 집착하고, 때로는 내 생각들을 전하는 것이 '어른'인 자신을 무시하는 냥 엇나가는 듯 보이던 내게 서운해하며. 결국엔 내 기준 너르지 못한 그 어른의 마음은 참고, 참아 인정해 보려 노력했던 내 좋은 마음까지도 갉아먹기에 이르렀다.
누군가 보기엔 내게 부족한 부분(아버지의 공백)을 채워주며 곁에 있는 그는 과분하고 매혹적이었을 테지만, 수년을 지켜보아도 내 눈엔 그저 애매하고 혼란 투성이이던 것들이 전부였다.
내가 할 수 없는 것들만을 바라는 눈을 지켜보는 건 괴로웠다. 시간이 지나며 아닌 척하다가도 드러나는 원망 실린 시선과 한숨에 난 정신이 좀먹어 가는 기분에 더는 버티기 힘들었다.
한 사람이 오는 건 어마어마한 일,
그 일생이 오는 거라고, 온 마음이 오는 것이라고 하던데.
맞다. 겪어보니 그 일생과, 그 마음이 내겐 정말 어마어마하게 버거운 거다.
그래서, 냅다 도망쳤다. 더는 감당하지 못할 거라는 걸 알았다. 누군가는 이기적인 선택이라 하겠지만 결코 후회는 않는다. 이후에 난 더 이상 그 잘난 일생을 다 걸지 않아도 좋으니 자신의 세계를 강요하지 말라고 온 힘을 다해 전했다.
정말 온 힘을 다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고 또다시, 제 만족을 위해 다시 붙잡아 세워둔 내 일상을 흔들지도 모르니까.
나에게 누군가 정말 필요했다면, 자신의 세계를 강요하지 않으며,
함께하면 의지가 되고, 내 다름을 이해해 줄 수 있을 어른이었다.
그가 내게 말했다. '네가 이런 사람인 줄 몰랐다. 실망스럽다.'
난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지만, 전하지 못한 말을 혼자 조용히 곱씹어보긴 했다.
이젠 무슨 말들이 오고 갔던가마저 희미해지긴 했지만.
딱히 그가 불행하길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저, 더는 내게 어떠한 모습으로든 필요하지 않다는 것 정도만 전하는 게 다였다.
그것 말고는 아마도 아무 생각이 없었다는 게 맞을 것이다.
결국 난 그를 통해 나를 지키는 여러 가지 방법 중 하나정도는 얻어낸 셈이다.
괴로운 것에서 망설이지 않고 과감히 날 건져 올리는 힘.
냅다 돌아서서 도망칠 힘, 말이다.
나를 강하게 해 주었기에 결과적으로 보면 좋은 어른이라 할 수 있을지?
그건, 아직 결론을 내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