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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비는...

만들어지고 잃어버리고 잊힌다.

by 김군

삶의 푸석 푸석함을 지우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을 하는 편이다. 미간에 생겨나는 주름과 나이 듦에 탄력을 잃어버린 생기를 잃어버린 모습이 꽤나 신경이 쓰인다.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지만 현재의 시곗바늘은 온전히 그것을 지나치지 못하면 흘러가지 못한다. 수많은 네트워크망 속에서 만들어진 이미지라는 것이 나인지 타인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럼에도 그것을 부여잡고 두툼하게 질소가 가득한 과자봉지처럼 거대하게 부풀리려 한다.


무엇을 해야 더 눈길을 사로잡을까 아니 누군가의 뇌리에 남을 수 있을까 물음표를 슬쩍 거린다. 휴대폰 앱을 켜서 멋진 표본들을 보며 스크롤을 내린다. 그리고 그들과 동일한 존재가 될 수 없는 한숨을 짧게 그치고 상상을 해본다. 내가 저 프레임 속에 들어가면 어떨까라는 질문을 한다. 어색할까 이질적인 객체로 동떨어지지 않을까 아님 생각보다 그리 거슬리지 않는 존재가 될까 치고받는 공방들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내 추려진 항목들 사이에서 몇 가지를 장바구니에 담는다. 몇 번의 고민의 늪 속에서 다시 출발선으로 돌아가기고 아예 방향을 변화시켜 봄을 반복한다. 그리고 이내 얼마 남지 않은 답들 속에 가벼운 손가락질은 희열과 동시에 후회의 한숨을 일으킨다. 좀 더 최적화된 구성을 이뤄낼 수 있는데 성급하지 않았나라는 걱정 때문에 더더욱이 부정적인 것들이 마음에서 꿈틀 된다.


채점의 순간에서 마주하며 쏟아진 소나기들에 비수가 날아온다. 객관화되지 못한 나의 평가는 결국 낭비가 된다. 그럼에도 후회와 동반된 결과물에 온전히 책임을 져야 한다. 적당히 쌓인 데이터들 속에 나는 오답의 한숨을 첨가한다. 다음은 적어도 그것을 몇 스푼을 덜어내기 위해 조금 더 신중하자라는 마음을 다진다. 가끔은 운수 좋은 날의 김첨지처럼 일이 술술 풀리기도 한다. 그리고 일치된 당신과 나의 마음의 일치함 탄성을 지르면서 그 짜릿한 쾌감을 느낀다.


만들어진 나는 희석되어 내가 어떤 고유의 존재인지 가물 가물하게 만들었다. 한때는 나를 잃는다는 것이 불쾌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했었다. 하지만 문을 열고 나올 수밖에 없는 나는 결국 보이고 평가되기를 강요당한다. 그 설득 속에 나는 오늘도 때깔 좋은 모습을 위해 포장을 하고 꾸미려 스크롤을 내린다. 그리고 적당한 프레임을 찾아 선택을 하고 매칭을 해본다. 오늘 하루도 그렇게 소비를 해본다. 적어도 일말의 나의 조각 하나는 남기를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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