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육 백반(옥이네 집)
어린 시절 집을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을 먹은 적들이 많았다. 가족 간의 문제가 있거나 불만이 있어서는 전혀 아니다. 그냥 뭔가 궁금하였다. 내가 내 삶을 온전히 책임지고 나만의 공간을 확장시키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 말이다. 하지만 기회는 쉽사리 내게 찾아오지 못하였다. 입시사회 속에서 겨우 벗어났지만 어정쩡한 성적표는 결국 주저앉게 만들었다. 그리고 적응과 순응의 시간을 마주하면서 망각하고 삶을 살아갔다.
그런 나에게 의미는 무심하게 툭 던져졌다. 계절의 경계선 사이에서 내린 봄날의 봄비처럼 마음을 젖셨다. 처음이라는 단어가 중첩되어서 찾아온 기회는 떠날 수 있는 선택을 할 수 있게 하였다. 하지만 막연하게 꿈꾸는 것과 달리 망설임 사이에서 고려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마치 체납된 세금을 일시불로 내는 것처럼 시간과 비용을 허비하여야 하였다. 그렇게 처음이라는 단어 앞에서 나는 세상의 확장의 기회를 잡았다.
부산이라는 도시는 내게 의미가 크다. 울타리를 처음 벗어나 나의 삶의 텃밭을 처음으로 가꾸어 본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독 이 공간에 대한 애착이 크다. 사실 지금 살고 있는 대구가 이제는 보낸 시간이 더 길어졌음에도 시작이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부여를 무시할 수가 없는 것 같다. 약 4년 가까운 시간을 부산에서 살았었다. 이제야 추억이라는 앨범을 넘겨 보면 희로애락의 서사가 너무나 선명한 여운으로 느껴졌다.
고향을 벗어나 첫 타향살이에 호기심과 설렘으로 나는 이 도시에 흔적들을 마주하려 많은 곳들을 오가고 하였다. 그 때문인지 가끔 부산을 다시 가게 되어도 낯설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은 고향인 울산이 더 어색하게 느껴진다. 근데 부산에서도 유독 어색하면서 가봐야지 하는 공간과 지역이 있었다. 영도라 불리는 동네가 바로 그곳이다.
영도는 부산 남부에 위치한 섬으로 유사하게 도심에 있는 섬인 여의도 보다 무려 5배나 큰 면적의 공간이다. 그리고 섬 단위의 행정구역 중 유일하게 구로 분류된 곳이기도 하다. 신라부터 조선시대까지는 이곳을 절영도라고 불렀다고 한다. 당시 영도에 국가에서 말을 방목하여 관리하는 공간으로 국마장이 있었다. 근데 유독 이 지역 말들이 빨리 달렸다고 한다. 마치 그림자가 끊기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에 절영이라는 단어를 이 섬에 이름으로 명하였다고 한다.
이 섬의 신기한 점은 부산 지역 중 타지 출신 정착 비율이 가장 높다고 한다. 다수의 외지인이 제주도 출신이라고 하는데 제주 4.3 사건의 영향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신한은행으로 흡수되었지만 부산에 유일한 제주은행이 영도에 생기기도 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제주도의 여행 시 먹게 되는 고기국숫집이나 제주 자리돔집이 이 지역에 꽤나 있는 편이다.
내가 처음 영도라는 곳을 찾아가게 되었을 때 인상적인 부분은 바로 영도대교였다. 이 다리는 도개교로 큰 배가 이 밑으로 지날 갈 수 있도록 올라가게 구조가 되어있다. 하루에 딱 한번 오후 2시에 15분간 진행되는데 직접 보고 있으면 그 모습이 참으로 장관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1934년 국내 최초로 개통된 도개교 형식의 영도대교는 역사적으로 가치 있는 구조물이기도 하지만 이 공간에서 스며있는 피난민의 애환의 장소로서 의미가 크다.
우리 민족의 가장 슬픈 과거의 흔적 중 하나는 누가 뭐래도 한국전쟁이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수많은 피난민들이 전쟁을 피하기 위해 이곳 부산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혼란스러운 대피 과정에서 그들은 가족들에게 영도다리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피난민들이 이곳에서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그들의 애환과 슬픔이 깃든 공간이 되었다.
당시 구슬픈 현실을 반영하여 만들어진 곡이 바로 '굳세어라 금순아'이다. 이 노래를 부른 현인도 영도 출신이고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승달만 외로이 떴다'라는 가사를 통해 이 공간을 지칭하였다. 그래서 영도대교를 건너고 나면 현인의 동상을 마주한다. 사실 이러한 애환의 역사가 사무친 다리의 도개가 66년 이후로는 멈추게 된다. 심지어 교통량 증가와 상수도 간의 설치로 인해 철거 또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이 다리에 가지는 의미와 가치에 2013년도 재가설하여 도개가 다시 시작되었다. 지금은 토요일 하루만 이 도개의 장면을 마주할 수 있다.
영도대교를 건너는 버스를 타고 섬안으로 들어갔다. 구비 구비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가 영도에서 제일가보고 싶었던 공간이었던 곳이 점차 가까워졌다. 한국의 산토리니라는 공간으로 불리기도 하는 흰여울문화마을이 나의 종착지였다. 흰여울이라는 이름의 기원은 영도에 위치한 봉래산 기슭에서 여러 갈래로 내리쳐 바다로 흘러가는 모습을 보고 지었다고 한다. 흰 눈이 내리듯 빠른 물살이 물보라가 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이렇게 명칭 하였다고 한다.
과거에는 단순히 바다와 인접한 달동네에 이미지였지만 변호인, 무한도전, 범죄와의 전쟁의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이 공간에 이쁜 카페들과 소품샵이 생겨나며 특색 있는 공간으로 변모하였다. 그동안 영도의 명소로 태종대가 많이 거론되었는데 최근에는 이 섬을 대표하는 관광지로 흰여울마을이 더 많은 인지도와 관심을 갖는 곳이 되었다. 실질적으로 영도구에서도 이러한 분위기에 맞추어 더 밀어주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형형색색의 세월이 묻어져 있는 주택 그리고 좁은 골목들 사이로 걸어가면 그 끝은 항상 일렁이는 푸른 파도의 바다의 포근함이 느껴진다. 아마도 이런 매력 포인트들이 모여 산토리니와 비교되는 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흰여울마을은 한국전쟁에 피난 와 실향민이 된 이들이 밀리고 밀려 합판 판때기, 천막 천등으로 아무렇게나 집을 지은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다닥다닥 붙은 집들이 많다. 그 속에서 나는 괜스레 따사로운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다. 가난이라는 것이 애잔하다는 것이 그리움이라는 것이 건물의 세월 속에서 묻어져 있다. 좁디좁은 골목길을 하염없이 걸으면서 사람에 대한 미움과 괴로움을 잠시 내려놓는다. 코끝 사이로 느껴지는 해풍의 짠내와 머리카락을 적당히 스쳐 지나가는 시원함에 기분이 좋아졌다.
평소 같았으면 좁디좁고 오르락내리락하는 이 길을 회피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온전히 나는 발걸음 하나하나의 집중하며 걷고 있었다. 항상 불편하다는 것의 끝은 부정적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기에 편안함과 안락함에 안주를 하였다. 하지만 나의 여정의 시련은 언제나 쉴 틈 없이 나타났다. 그냥 즐길 수 있는 대범한 멘털은 아니지만 피하지는 말고 마주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길을 걷다 걷다 보면 펼쳐지는 바다처럼 말이다.
영도라는 공간에 느리게 흐르는 시계 사이에 유일하게 정상적으로 작동되는 시간이었다. 바로 나의 허기짐이었다. 꽤나 많은 거리를 걷다 보니 약간의 지침과 배고픔은 자연스레 나타났다. 무언가를 먹어야 했다는 생각과 영도스러운 음식을 찾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그렇게 네트워크 세상에 힘을 빌려 한 공간을 찾아내었고 왠지 그곳에서 식사를 하면 또 다른 느낌표를 찍을 수 있게 될 것 같았다.
정류장으로 가 목적지로 나를 이끄는 노선을 찾아보았다. 약간의 배차 간격이 길었음에 주변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정말 영도는 골목골목이 매력적이다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리고 이상하리만큼 그 사이에 너무나 귀엽게 나를 쳐다보는 길냥이들을 마주하였다. 한참을 아이컨택을 하고 거리를 좁혔지만 밀당의 귀재는 다가오니 도망쳤다. 그렇게 적당히 시간을 흘려보내다 이윽고 버스가 도착할 때가 되어 다시 돌아갔다.
올 때는 한참을 구비 굽이돌아 올라왔는데 하산의 길은 생각보다 빠르게 흘러갔다. 버스에서 내려 식당까지는 약 5분 정도를 걸어가야 하는 거리였다. 깡깡이마을이라는 곳을 지나쳐야 하는데 이곳에 안내판을 보니 그 유래가 재미있었다. 영도는 과거부터 부산항의 영향권이기 때문에 조선업이 성행하였다. 그래서 이 지역 사람들이 대부분이 배와 관련된 일을 하였다.
깡깡이마을에는 예전부터 선박수리소가 많았었다. 그래서 배의 녹슨 표면을 망치로 두드려 제거하는 작업을 하는 소리가 자주 들렸다. 바로 그 소리가 깡깡하는 효과음을 내어 이곳을 그렇게 명칭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재미난 기원을 알고 정박된 수많은 배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리 신경 써서 찍지 않았음에도 꽤나 만족스러운 결과물이 나왔다.
골목 사이사이의 선박 부속회사에서 작업하는 소리를 지나쳐 허기의 종착지에 도착하였다. 노포스러운 외관에서 무언가 매료된다. 나는 세월이 묻어진 공간들을 보면 마음이 포근해진다. 도시에서는 빠른 흐름에는 추억은 유지되기가 힘들다. 근데 이런 곳들은 누군가의 추억과 기억들이 짙게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 한편에 나도 조심스레 흔적을 남겨볼 수 있다는 게 설렌다.
옥이네 집 이름부터 내공이 느껴졌다. 골목 사이를 들어가 보이는 간판에는 돼지국밥, 물회가 같이 적혀있다. 국밥집에 물회라니 생뚱맞다는 생각을 하였지만 코 앞에 바다가 있는 점에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 납득이 되었다. 외부에 작은 테이블이 야장을 할 수 있게 설치되어 있었다. 와 운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바라보았는데 그곳은 이미 거나하게 반주를 하시는 일행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크지 않은 공간이 협소하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불편하지는 않았다. 빈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보았는데 정말 깜짝 놀랐다. 돼지국밥이 6천 원에 수육백반이 7천 원 밖에 하지 않는다는 것이 영도는 가격도 이리 느리 흘러가는 것인 가라 만족의 미소를 양껏 지었다. 사실 부산하면 국밥 자부심이 강하지만 그냥 괜스레 천 원을 더 내고 양껏 수육을 먹을 수 있는 수백이 가성비면에서 훨씬 매력적일 거라 판단하고 주문하였다.
생각보다 이른 시간 나의 테이블 앞에 놓인 음식은 상당히 푸짐하였다. 그리고 특이했던 것은 보통 국이 뚝배기에 담겨 나오는 것으로 생각될 텐데 이곳은 플라스틱 분식그릇에 나온다. 왠지 비주얼적으로 집밥을 먹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수저로 휘저어보니 국물 사이에 고기들은 생각보다 많은 양들이 들어 가있었다. 뭔가 이득을 본 거 같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한입 떠먹어 본 국물은 고소하고 묵직하게 입안에 전달되었다. 진한맛이 찐득하게 혀 끝을 자극한다. 고기도 퍼서 먹어보았다. 말랑 말랑한 식감은 마치 젤리 같은 식감이 드는데 머리 고기를 사용하였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가성비만 훌륭한 것이 아니라 음식도 상당히 내공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육은 비계가 적당히 섞여 있었다. 일단 잡내가 없어 좋았고 식감도 비계가 있지 않는 부분은 씹는 식감이 만족스러웠다. 적당히 먹다 남은 고기들은 국물에 넣어서 먹어 보았는데 이것도 꽤나 맛이 좋았다.
든든하게 한 끼의 식사를 마무리하면서 영도에서 시간을 복기하여 보았다. 느리지만 따뜻하고 외로운 곳이지만 차갑지 않은 섬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떠나고 나서야 나는 이 공간의 매력을 알게 된 건지 아쉽다는 마음이 들었다. 노포의 가게를 나오며 영도가 바뀌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보았다. 다음에도 또 이 행복을 마주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