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구원
듄이라는 영화는 한 편의 영웅의 서사시이다. 그동안 우리가 마주한 이와 같은 고전의 이야기들 속에는 수많은 은유가 압축되어 표현되어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며 의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이 꽤나 뭔가 숨은 그림 찾기를 하는 것처럼 즐거움을 주는 포인트가 되기도 한다. 내가 책장을 펼치고 찾은 이 서사의 중심이 된다고 생각하는 화두는 믿음과 구원이다.
이번 작품도 전편과 마찬가지로 대비되는 세력을 대칭적으로 설정해두고 있다. 프레맨과 베네 게세리트가 그 대상이다. 두 집단 모두 믿음에 대한 갈망을 한다. 그들을 구원으로 이끌 존재에 대한 등장 구원자의 재림을 말이다. 이러한 점에서 둘 다 같은 지향점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실질적으로 그들이 바라는 메시아는 같은 존재이다. 하지만 구원자가 이끌어 줄 것이라는 세계는 차이가 있다.
먼저 베네 게세리트는 퀴사체 헤드락이라는 존재의 등장을 기다린다. 그들은 오랜 세월 전 전쟁을 치렀다. 기술의 발달로 탄생한 인공지능에 따른 인간사회의 파괴를 위협하는 상황에 마주해 대항하고 그들만의 성전을 치렀다. 그리고 그 치열한 전쟁의 끝에서 얻은 것은 인본주의이다. 모든 것은 인간을 중심으로 그것을 위협하는 것은 배척을 해야 한다. 다시 기계가 인류를 위협하는 시간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는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선구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것이 바로 퀴사체 헤드락이며 그의 재림을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하다. 인류가 발견한 스파이스라는 광물을 그 수단으로 활용한다. 이것을 흡입함으로 능력의 각성을 하게 되고 여러 세대를 거치며 방대한 지식을 습득한다. 베네 게세리트의 능력으로는 거짓을 읽어 낼 수도 있고 말로 암시를 주어 행동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리고 태아의 성별까지 변경할 수 있는 힘도 있다. 이러한 능력을 통해 베네 게세리트는 90세대를 넘게 유망한 가문에 접촉하여 아이를 잉태하고 유전적으로 우성인자인지 판단하고 관리하였다.
이러한 행동은 오로지 구원자의 등장을 위한 준비 절차인 것이다. 하지만 그토록 베네 게세리트가 원하던 퀴사체 헤드락의 존재로서 폴의 자질이 느껴지자 두려움을 느낀다. 자신들의 믿음의 대상이 통제하지 못한 상황에서 탄생한 자이며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등장하였기에 오히려 반감이 든다. 그래서 베네 게세리트는 아이러니하게도 구원을 위해 구원자를 포기한다. 아트레이데스의 멸망을 부치고 폴과 제시카를 사지로 몰아붙인다. 이것이 영웅의 탄생에 필연적인 시련의 순간을 만들어 준 것이다.
또 다른 믿음의 집단인 프레맨도 구원자에 대한 갈망이 강렬하다. 리산알가입이라는 불리는 그들의 메시아는 이 척박한 땅에 생명을 불어넣어 프레맨을 낙원으로 인도한다고 믿는다. 그들이 사는 이 공간은 황폐한 사막만이 드넓게 펼쳐져있다. 생기가 느껴지지 않기에 그들은 세계로부터 외면받고 버림받았다. 하지만 스파이스가 유일하게 채취가능하다는 것에 이젠 또 다른 세계의 외부자들이 프래멘의 것을 착취하고 무너뜨린다. 자연의 생존 싸움에서 확장된 전쟁의 끝은 그들을 옥죄이고 괴롭힌다. 이제 이 투쟁의 종지부를 찍을 분열된 그들을 규합할 구원자의 등장을 간절히 기다린다.
이러한 점에서 아트레이데스가 아라키스에 이주하면서 등장한 폴의 모습은 흥미롭다. 외부 세계의 목소리라는 리산알가입의 은유에 적합한 인물로 보인다. 그리고 영웅이 세계로부터 버림받고 그들을 찾아오게 되면서는 믿음은 힘이 커진다. 프레맨들에게는 상황이 보이는 징후는 폴을 더더욱 리산알가입이라는 확신을 들게 만든다. 그들의 생존 방식과 문화를 그에게 알려주면서 변화하는 모습은 영웅의 성장을 이끌어낸다. 마치 새가 알을 깨고 나옴으로 폴은 프레맨들의 진정한 구원자인 리산알가입이 되어버린다.
리산알가입과 퀴사츠 헤드락은 같은 존재이다. 베네 게세리트가 아라키스에 그들의 구원자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기 위해 전파한 신화가 리산알가입이다. 근데 그렇게 고대한 존재가 눈앞에 나타나자 태도는 확연하게 차이가 있다. 한 곳은 구원을 위해 믿음을 버리고 또 다른 대체재를 찾고 또 다른 곳은 신념으로 하나가 되어 투쟁과 희생을 불사른다. 그렇게 이러한 과정에서 주인공 폴은 두 집단이 생각하는 구원자로 거듭나게 된다. 영웅의 서사시의 방점이 되며 영화는 끝이 난다.
구원자를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를 따라가다 보면 인물에 대한 몰입감이 자연스레 생겨진다. 믿음에서 나오는 영웅의 탄생에 감탄한다. 그리고 우리는 구원의 길을 걸어가는 외로운 이의 고뇌의 모습을 보며 감정적인 공감을 한다. 드니빌뇌브의 연출력은 너무나 이야기의 음영을 잘 조절하여 표현하고 있다.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이 시간대별로 변해가는 것들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며 인상적이었다. 폴에 대한 믿음의 끝에는 어떠한 구원의 결말이 있을지 다음 편이 기대가 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