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곰탕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다. 세월 앞에 변하지 않는 것은 드물다는 뜻이다.
나 역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많은 것이 바뀌었다. 희미하게 하나둘 생긴 잔주름, 탄력을 잃은 피부, 늘어난 뱃살만 봐도 예전 모습은 찾기 어렵다. 이 변화가 마냥 반갑지는 않지만, 가끔은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내가 이런 면도 있었나?' 하고 스스로 놀랄 때가 있다.
그중 요즘 내게 유독 즐거움을 주는 변화가 있다. 바로 입맛이다.
우리 몸의 장기는 소모품과 같다. 한결같지 않고 점점 마모되어 간다. 소화기관도 예외는 아니다. 예전에는 맵고 짜고 단, 자극적인 맛을 즐겼다. 그래서 몸은 늘 피곤했고 건강을 챙기지 못했다. 세월이 지나 마모된 소화기관은 더 이상 자극적인 맛을 반기지 않는다. 예전엔 좋아하던 음식들이 이제는 부담스럽다. 그만큼 그 음식이 주는 행복도 줄었다.
변화를 인정하자 시야가 넓어졌다. 자극에 익숙했던 편식쟁이인 나에게도 선택지는 많았다. 조심스럽게 하나둘 시작한 새로운 음식 탐험은 꽤 재미있었다. 마치 콜럼버스처럼 신대륙을 발견하는 기분이었다. 비록 익숙한 강산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 또 다른 뒷산이 생겼다. 그곳에서 만난 음식 중 가장 매력적이었던 건, 뜻밖에도 평양냉면이었다.
평양냉면은 참 독특한 음식이다.
남북이 분단된 사회에 살고 있지만, 이 음식은 세대를 가리지 않고 사랑받는다.한국전쟁을 겪은 세대가 평양냉면을 찾는 건 이해할 수 있다.실향민일 수도 있고, 고향의 맛을 떠올리고 싶은 본능적인 욕구가 작용할 수도 있다. 그런데 요즘 젊은 세대의 식탁에도 이 음식이 종종 오른다.
트렌드에 둔감한 나지만, 그들의 취향에 감정이입을 해본다. 그리고 문득 생각한다. 왜 나는 이 음식을 좋아하게 되었을까? 아마 ‘은은함’ 때문일 것이다. 자극적인 맛에 익숙해져 있던 내 혀는 어느 순간부터 휴식을 원했다. 우리는 음식도 첫인상으로 판단한다. 첫맛이 강하면 호불호도 쉽게 갈린다. 하지만 평양냉면의 첫인상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다.
마치 소심한 내 성격처럼, 조용히 다가와 심심하게 머문다. ‘이게 뭐지?’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 속에 은근한 매력이 호기심이 생겨진다. 평양냉면의 미니멀한 구성도 눈길을 끈다. 투명한 육수, 메밀면, 반쪽 계란, 고기, 채 썬 배 고명이 전부다. 단조롭고 복잡하지 않다. 나는 젊은이는 아니지만, 이런 단순함도 내 취향에 영향을 준 것 같다.
오늘은 내가 아끼는 ‘맛의 텃밭’ 중 하나, 대구의 평양냉면집에 대해 써보려 한다.
타지인으로서 대구를 경험하며 흥미로웠던 점은, 이곳에 면 요리가 유독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수준 높은 평양냉면집도 여럿 있다. 그중 한 곳이 입소문을 타며 추천받은 바로 이곳이다. 위치를 확인하고 근처에 도착해 네이버 지도를 켰다. 길치 기질이 있는 나는 한참을 휴대폰 액정을 들여다보며 방향을 다시 확인했다. 골목 안으로 들어서자 다행히도 커다란 간판이 보인다.
‘고운곰탕’이라는 큼직한 글자가 시선을 끈다. 곰탕집에서 평양냉면을 한다고? 고개를 갸웃할 수도 있다. 나 역시 처음엔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호기심이 앞섰고, 결국 방문을 결정했다. 매장 외관은 주택을 개조한 느낌이었다. 입구에 들어서기 전,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제면기였다. 저온 저속 방식으로 100% 순메밀면을 뽑는다고 한다. 이 방식은 메밀 고유의 향과 수분을 살려주는 역할을 한다고 했다.장인의 손길이 느껴지는 장비였다.
실내는 방 세 칸 구조였다. 예전 거실이었던 공간엔 큰 테이블이 있고, 칸막이로 나눠 혼자 온 손님도 편하게 앉을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었다.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훑어본다. 다양한 메뉴가 있었지만, 나의 목적은 분명했다. 평양냉면을 먼저 고르고, 추가로 왕만두를 선택했다.
사이드 메뉴로 만두를 고른 데는 이유가 있다. 혼자 식사할 땐 가격이나 양의 부담 때문에 추가 주문을 잘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곳은 반 개 구성으로 2개만 따로 판매했고, 가격도 3,500원으로 합리적이었다.
주문을 마치고 직원에게 메뉴를 전달했다. 그리고 음식이 나올 때까지 정해지지 않은 공백의 시간을 보내며, 매장 내부를 둘러봤다. 카운터 뒤편으로 주방이 살짝 보였고, 조리 과정도 엿보였다. 허기가 더해지며 입맛이 돌기 시작했다. 어서 평양냉면과 왕만두를 마주하고 싶어졌다. 내 마음을 눈치챈 걸까? 생각보다 음식이 빨리 나왔다.
정갈하게 담긴 찬과 음식들을 마주하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먼저 수저로 평양냉면의 국물을 떠 마셔본다. '수줍음 많은 아이 같다'는 생각이 들 만큼, 국물은 슴슴하고 맑았다. 차 마니아들이 클래식 레트로카에 환호하듯, 이 은은한 맛에도 감탄이 나왔다. 이번에는 면발에 집중한다. 젓가락으로 국물 속 면을 휘휘 저어 적신 뒤, 한 움큼 집어 올려본다.
호르륵— 한입. 면발은 부드러웠고, 은은한 메밀 향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고명으로 올려진 고기도 한 점 집어본다. 질기지 않고, 부드러운 식감이 인상적이다. 이제는 온전히 평양냉면에만 집중하게 된다. 느릿한 성격이지만, 좋아하는 것을 마주하면 괜히 손이 빨라진다. 정신없이 면을 먹다, 잠시 젓가락을 멈추고 찬에 손을 뻗는다.
백김치와 무절임이 상큼한 맛으로 입맛을 돋워준다. 문득, 잊고 있던 왕만두가 떠오른다. 간장이 담긴 종지에 만두를 살짝 찍어 한입. 만두피가 부드럽게 으깨지는 순간, 속에서 육즙이 터져 나온다. 직접 빚었다는 말처럼, 맛의 완성도가 높았다. 얇은 피 안에 적절히 채워진 고기와 채소가 스르륵 녹아든다. 이 만두는 조연이 아니라, 준주연급이다. 색다르게 즐겨보고 싶어, 만두를 살짝 벌려 간장을 안에 적셔 넣었다. 짭조름한 간이 속에 베어들며 또 다른 맛을 선사했다.
면이 어느 정도 사라졌을 때, 계란 노른자를 으깨 국물에 섞었다. 그리고 식초를 한 바퀴 반쯤 둘러 부었다. 투명하던 육수가 탁해지는 순간, 고요한 호수에 잔잔한 파문이 번지는 느낌이 들었다. 노른자가 흩어지며 국물 속에 퍼지고, 고소한 풍미와 함께 약간의 농도를 더했다. 평양냉면 마니아들이 즐겨 하는 방식이라 해 한 번 따라 해봤는데,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면치기의 마지막 순간까지 평양냉면은 깊은 여운을 남겼다. 식사를 마치며 미소가 지어졌다. 역시 나는 이 거울처럼 맑고 담백한 음식을 좋아한다. 식사를 마무리하려던 찰나, 후식이 나왔다. 고소하고 따뜻한 메밀육수는 속을 편안하게 데워주었고, 양갱은 텁텁하지 않은 은근한 단맛으로 입 안을 정리해줬다.
드디어, 제대로 된 마무리. ‘오늘도 잘 먹었습니다’라는 말을 마음속으로 되뇌며 계산을 마쳤다.고운곰탕, 좋은 평양냉면집이다. 이 음식을 즐길 줄 아는 사람에게 꼭 추천하고 싶다.
� 주소
대구광역시 수성구 달구벌대로 2474-8 1층
⏰ 영업시간
11:30 – 21:00
⏸ 브레이크타임 15:00 – 17:00 (라스트오더 14:30 / 20:30)
� 일요일 휴무
� 대표 메뉴 & 가격
� 평양냉면 12,000 원
� 왕만두 5 알 8,000 원 / 2 알 3,500 원
�추천 포인트 요약
� 평양냉면 – 슴슴하고 은은한 육수, 100% 순메밀면의 깊은 풍미
� 왕만두 – 직접 빚은 부드러운 피와 가득 찬 속, 감칠맛 폭발
� 공간 구성 – 혼밥도 편안한 주택 개조형 실내, 조용한 분위기
�� 제면기와 저온제면 – 장인의 정성과 철학이 담긴 면 뽑기 방식
� 가성비 – 반개 구성의 만두로 혼자서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음
� 후식 – 고소한 메밀육수 + 단정한 양갱으로 완벽한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