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바뀌면서 세운 목표가 하나 있다. 바로 이사를 하는 것이다. 2년이라는 시간 동안 머물렀던 공간을 떠나고자 하는 결심에는 오랜 고민이 있었다. 딱히 지금 살고 있는 곳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아니다. 회사와 가까운 거리에 시내에 걸어갈 수 있고 교통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내가 이사를 하고자 하는 이유는 이곳이 흘려보내고 싶은 지나간 시간을 붙잡고 있어서이다.
지독하게 여운이 길었던 인연이었다. 그래서 쉽사리 잊지도 도망치지도 못하고 있었다. 충분히 아파하고 슬퍼하여도 보였지만 내성이 생기지 않는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지에 남은 것은 용기였다. 그것이 새로운 곳에서의 시작이 그 첫 단추가 될 것이라 생각하였다.
이사에 있어 사실 정서적인 부분도 컸지만 경제적으로도 다달이 비싼 월세도 비중이 있었다. 전세로 전환하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었고 이번의 적기였다. 일단 계약기간이 만료가 두 달 정도 남았으니 집과 대출에 대해서 조금씩 알아보았다. 하지만 나이에 비해 경제관념이 없는 나이기에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웠다.
누군가의 자문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이런 일을 물어보고 상담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머릿속으로 생각을 해보았다. 순간 딱 떠오른 이가 있었다. 세연이. 경제관념도 뚜렷하고 이사를 자주 해보았고 은행에 다닌다는 것이 나를 인도하기에 바로 적격 중에 적격인 인물이었다. 휴대폰을 잡고 세연이 에게 카톡을 보냈다.
'세연아 나 상담할 거 있는데 이번 주 토요일 시간 되나?'
톡을 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알림이 뜨면서 답장이 왔다.
'뭔 일이야. 너 사고 친 거 있나. 음 일단 내가 조금 있다 스케줄 확인하고 연락 줄게'
구체적으로 대출과 이사라는 화두를 꺼냈다면 잔소리 핵폭탄을 투하되었을 것이다. 세연이의 답장을 보니 다시 한번 두리뭉실한 메시지는 좋은 선택이었다.
'일단 나 토요일 시간 됨. 그럼 6시 백석에서 보자. 뭔 일인지 모르겠지만 누나한테 혼날 준비하고 오그라.'
'알겠음. 토요일 봐.'
세연이와 약속을 잡고 나니 뭔가 든든한 정답지를 얻은 것 같았다. 다가오는 주말이 기다려지면서 만나서 잔소리를 덜 듣기 위해 나의 현재 상태에 대해 여러모로 복습을 하였다.
유독 한주의 기나긴 일의 굴레가 지나갔다. 그래서 휴일이 간절했고 마주한 이 시간이 꿀맛 같았다. 거울 속에 비친 몰골이 꽤나 보기 불편했다. 더부룩한 머리와 수염들 정리가 필요했다. 일단 면도를 하고 자주 가는 미용실에 예약을 잡았다. 예전에는 그냥 가까운 곳에서 해결하였는데 오히려 나이가 드니 더더욱 보이는 모습을 신경 쓰게 된다.
깔끔하게 머리를 정리를 하고 나오니 반나절의 시간이 지나갔다. 늦지 않기 위해 미리 나갈 필요가 있다. 오늘 같은 날 지각을 한다면 그 뒷감당이 꽤나 긴 시간 나를 괴롭힐 것이다. 간단히 챙겨 입고 약속 장소인 백석으로 향했다.
도착하기 직전 카톡으로 조금 늦는다는 세연이의 톡이 왔다. 나는 천천히 조심히 오고 안에서 기다리겠다고 하였다. 테이블에 앉아 휴대폰으로 전세 대출에 대해 검색을 해보았다. 한도 및 원금 및 이자율 등의 숫자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들었다. 스크롤을 내릴수록 대한민국에서 집 구하기 힘들고 비싸다는 푸념만 들었다.
휴대폰에 몰입되어 정신이 없을 때쯤 누군가 내 등짝을 쳤다. 반사적으로 놀라 뒤돌아 보았을 때 세연이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뭘 그리 그렇게 보냐. 사람 오는 기척도 못 느낄 정도로. 아 센스 없는 인간아 안주 미리 시켜야지 어이구"
정신없이 쏟아지는 폭격에 시작이 되었구나 마음을 굳게 먹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아 미안. 너 맥주는 맨날 먹던 걸로 안주는 감튀로 할게. 그리고 잔소리 시작은 일단 숨 좀 돌리고 부탁해."
주문한 메뉴들이 나오자 세연이의 입은 맥주에 잠깐의 시간을 내어주고 다시 나에게 향해왔다.
"너 오늘 상담이 혹시 윤서 이야기야. 아직도 생각하냐. 너 개 때문에 언제까지 힘들어할래. 만날 때도 그렇게 오락가락하면서 그랬잖아. 제발 정신 차려."
예기치 못하게 뼈를 때리는 말이다. 나를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흔들고 있는 존재 윤서라는 여자. 세연이는 알고 있다. 나와 그녀의 연애의 시작과 끝을 지켜보았었다. 나와 서연의 끝에서 수많은 내 서툰 행동들이 여지없이 오답을 만들었고 미련만 남겨버렸다..
사실 날아간 마음이 이제 더 이상 내 곁에 돌아오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었다. 외면도 해보았지만 오래가지 못하였다. 나는 나 스스로 가두었고 성실한 무기수가 되어 자학하였다. 이제는 그것을 끝내고 싶고 벗어나고 싶은데 여전히 겁이 난다. 나에게서 미련마저 놓아지면 진짜 끝이기에 말이다.
"아니. 나 다 잊었어. 인제 기억도 가물가물해. 진짜 힘들었어. 까다롭고 예민하고 나 다시 그런 여자 안 만날 거야."
가슴과 다른 말을 입 밖으로 내보내면서 씁쓸함이 몸을 감쌌었다.
"그럼 다행이고. 너 행여나 다시 개 만날 생각하지 말고 좋은 여자 만나라. 그래 오늘 이야기할게 뭐야 털어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