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y Thursday, a new word
1. 사전적 정의/ Biological definition
생명체의 생명 활동이 영구적으로 정지됨. 심장 박동과 호흡의 정지, 또는 뇌 기능의 완전한 상실.
Death is when a living thing completely stops functioning, including the heart, breathing, and brain.
2. 철학적 정의/ Philosophical Definition
삶의 완성이나 변화, 의식과 자아의 완전한 소멸.
It’s seen as the final chapter of life or the total disappearance of one's consciousness and self.
3. 종교적 정의/ Religious Definition
끝이 아닌 다른 상태로의 전환(윤회, 영생 등)
Death is not the end, but a change to another state, such as reincarnation or eternal life.
단어는 내 일상에서 발견된다.
눈에 띈 단어와 관련된 문장이 떠오르면, 휘발되기 전 자판을 두드린다. 글쓰기는 특히나 억지로 되지 않아 손가락을 움직여 문장을 만들기 위해서는 다양한 자극이 필요하다. 차오르는 문장을 마구 풀어낸다. 에피소드를 엮고, 경험의 파편들을 연결하다 보면 사유의 끝에 닿을 수 있다. 수십 번의 수정 또한 필수다. 처음 쓴 글을 여과 없이 세상에 내놓는 건 벌거벗은 채 사람들 앞에 서 있는 것 같은 부끄러움이다.
단어의 무게는 각자의 경험으로 측정된다. 하지만 오늘의 단어는 무거움의 스펙트럼 끝쪽에 위치한다. 이 단어의 이름은 ‘죽음‘.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죽음을 향해 간다. 시작은 예측가능하나 끝은 아니다. 의학기술의 발달로 어느 정도 가늠이 되지만 갑작스러움은 모두에게 멈춤을 준다.
20대까지 죽음은 사전에 있는 수많은 단어 중 하나일 뿐이다. 챗바퀴처럼 굴러가는 24시간 속 서둘러 어른이 되고 싶은 열망으로 어린 날을 보내고, 성인이라는 타이틀을 얻으면 금기시되었던 리스트를 자유롭게 실행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낸다.
사회라는 정글에 던져지면 요구되는 역할을 위해 치열한 일상을 보낸다. 부딪히고 깨지는 하루에서 뒤를 돌아볼 여유는 사치다. 그러다 문득, 시간의 흐름 속에 홀로 남겨질 때, 우리는 비로소 스스로와 대면한다. 미뤄둔 인생의 복기는 온갖 잡념으로 뒤덮이고 후회와 한탄이 한 곳에 자리 잡는다.
일상 속 당연했던 누군가가 곁을 떠나간다. 어른이란 죽음을 당연함으로 받아들일 때 주어지는 타이틀일까. 사회는 슬픔과 고통을 티 내지 않는 여러 겹의 얼굴에 어른답다는 평가를 내린다. 참아지지 않는 폭발의 순간은 눌러둔 감정만큼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왈칵 쏟아내게 만든다. 어른이란 감정을 잘 숨기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타이틀인가 보다.
애정했던 선생님은 계절이 바뀌어가지만 봄의 따스함을 느낄 수 없는 공간에 계신다. 지인분의 가족이 돌아가셔 조문을 다녀왔다. 스치듯 봤던 영상에서는 남편을 잃은 아내가 투병의 나날과 곁에서의 시간들을 짧은 글과 영상으로 공유했다. 친한 지인이 할머니를 보내주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지인과 대화 도중 퇴직 후 10년 안에 사망하는 공무원의 비율이 굉장히 높다는 연구결과를 들었다. 최근 읽은 책에선 작가 하인두의 삶과 여정, 죽음에 대해 배웠다. 삶과 예술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고 끝까지 붙잡고 있던 그 절실함이 느껴져 이른 새벽부터 울어버렸다.
행복의 순간을 가진 사람이 넘쳐나는 만큼 아픔의 순간을 가진 사람은 더 넘치는 물결을 만들어 낸다. 아직은 생의 길에 우뚝 서 한 걸음씩 딛고 있는 나에게 '죽음'은 갑작스러운 쉼표를 준다.
'내일이 없을 수도 있겠구나.'
죽음의 형태는 한순간에 재가 되기도, 투병생활로 내일을 만나지 못하기도, 스스로 마지막을 선택하는 모양을 가지기도 한다. 발버둥 치며 밀어내려 해도 밀려나지 않는 그림자 같다. 더 깊이 생각할수록 불안에 잠식된다. 책은 나의 소유욕을 채워주나 과욕이 되어 늘 책장 한 켠에 쌓인다. 갑작스러운 위기로 불안해지면 신기하게 나의 시선은 책장을 향한다. 그리고 찾는다. 나와 비슷한 고통을 통과한 누군가의 문장을. 군더더기 없이 학습된 기계의 빠른 정보가 더 정확할 텐데도 사람 냄새나는 불확실한 여정이 오히려 위안을 준다. AI 가 대체할 수 없는 인간의 영역이다.
불안을 글자들로 꾹꾹 눌러내며 얻게 된 문장에서 나는 '받아들임'이라는 공통점을 발견했다. 오늘을 잘 살고 오늘의 만남에 진심을 담아야 한다. 후회는 오늘을 내일로 미룰 때 생긴다. 내일이 없다는 사실이 눈앞에 와닿는다면 당장의 창피함이나 타인의 평가는 솜털보다 가벼워진다. 가장 하고 싶은 일로 주어진 시간을 채워야 한다. 사회적 시선과 평가에 얼어붙을 시간 따위는 없다. 오직 나만의 기준으로 행동하고 선택에 책임을 지면 된다.
죽음이라는 단어는 나를 저릿하게 만든다. 한 때, 감정이 얼어버린 적이 있다. '그러려니'라는 생각이 나의 모든 사유를 점유했었다. 상실의 고통이 생기더라도 받아들이고 담담히 이겨내야지라는 순진한 생각을 했다. 막상 고통스러운 순간을 맞이했을 때, 온몸으로 괴로워하는 나를 보며 얼마나 치기 어린 생각이었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겸손은 늘 단련해야 하는 단어다. 마음이 강한 사람은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감정의 폭풍우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흘러가도록 보내주는 사람이다.
솔직히 말해 죽고 싶지 않다. 죽음을 내 곁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뜨려놓고 싶고 그럴 수 없다면 건강한 마음의 상태로 마침표를 찍고 싶다. 원하지 않는 공간에서 무기력한 마지막 점을 찍는 건 상상만 해도 몸서리쳐진다. 타인을 통한 몇 번의 간접경험은 마음속 트라우마로 남았다. 당시 떠올렸던 다짐은 ‘내가 죽고 싶은 형태로 죽어야겠다‘였다. 사랑하는 공간에서 나의 유희로 만들어진 따뜻함을 이불처럼 덮고 혼자라는 고독의 시림을 받아들여 감사하는 마음으로 서서히 잠들고 싶다.
나를 기억할 물건은 한 두 가지로 충분하지만 나의 사유와 경험들은 수천수만 개를 남기고 싶다. 이건 사랑하는 내 주변의 사람들과 세상에 주고 싶은 선물이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 어른의 겹겹을 가진다 해도 죽음을 즐길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그러니 이 저릿함을 담담히 받아들일 연습을 멈출 수가 없다. 어른이 되어감도 아직 받아들이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