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ality World
양철 지붕을 두드리는 따닥 탁탁- 빗소리는 꽤나 시끄럽다. 그 시끄러움 속에 다른 일상의 소리들이 모두 잠시 멈춘 것 같은 착각이 들만큼 고요하고 평화롭다. 열한 살 혹은 열두 살쯤 되었을 무렵의 나와 사십 대의 젊은 엄마는 뜨뜻하게 달궈진 단칸방에 배를 깔고 엎드려 있다. 라디오에서 노래가 흘러나온다. <작은 창>이라는 가사가 예쁘고 경쾌한 멜로디의 노래. 엄마가 좋아하는 노래다. 엄마가 노래 가사를 적어달라고 해서 열심히 라디오 소리에 귀를 기울여 가사를 따라 적고 있다. 엎드린 자세로 다리를 달랑달랑 흔들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현실치료를 창시한 심리학자 윌리엄 글라서(William Glasser)는 인간은 객관적인 현실에 살지 않는다고 했다. '인간은 주관적인 현실을 살아간다'는 것이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모든 심리학 이론의 기본 전제다.
주관적인 현실을 산다는 건 무엇인가? 각 개인이 지각한 세계 속에서 산다는 것은 우리가 서로 다른 세상을 살아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글라서는 현실 그 자체보다 현실에 대한 인식이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데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우리가 지각한 세계가 서로 다르기에 동일한 상황에서 선택하는 행동도 다른 것이다.
글라서에 따르면 인간은 내적인 욕구가 잘 충족되었을 때 경험했던 것들을 마음속에 그림(picture)으로 보관한다. 만났던 사람, 가봤던 장소, 재밌고 즐거웠던 경험 등이 마치 사진처럼 찍혀서 마음 어딘 가에 의미 있는 심상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심상은 좋은 세계(Quality World)라고 이름 붙여진 내면세계에 보관된다. 좋은 세계는 개인이 삶에서 원하는 것들로 이뤄진, 욕구와 소망이 충족되는 세계이다.
사람들은 마음속 ‘좋은 세계’에 보관된 그림, 이미지와 심상들을 통해 하고 싶은 경험들,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생각과 신념들을 쫓아 특정 행동들을 선택하게 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자신이 마주한 현실세계에서 내면의 좋은 세계와 일치하는 경험을 하기 위한 선택을 하고 행동한다는 뜻이다.
처음 ‘좋은 세계’라는 이론적 개념을 알게 된 후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장면은 어린 시절 비 오던 날 엄마와 방 안에 누워 라디오를 듣고 책을 읽으며 뒹굴거리던 기억이었다.
따뜻함, 안온함, 여유로움, 함께 누리는 한가함. 나는 그 느낌들을 사랑하고, 그 느낌들을 충족하게 해주는 행동들을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추구하고 선택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이 내 마음 안에 보관된 좋은 세계 중 한 장면이었던 거구나 생각하니 어린 시절의 좋았던 추억은 더 진한 여운으로 다가왔고, 내 일상의 크고 작은 습관들은 더 귀해졌다.
나의 일상을 어떻게 일궈나갈지부터 나의 감정, 사고, 행동, 습관 모두 내가 선택하는 것이라는 현실치료의 메시지는 나에게 선택에는 책임만이 아니라 평안함과 자유로움도 따른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내가 원하는 것임을 알고 하는 선택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여기서도 옳다.
나는 지금도 누워서 뒹굴거리고 있을 때 잘 쉬었다고 느낀다. 집에는 늘 라디오를 틀어놓는 편이다. 요즘처럼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가을날 후두두둑 비라도 내리면 아침부터 마음이 설렌다. 따뜻한 방바닥에 누워 마음껏 뒹굴거리고 싶다.
당신은 오늘 하루 어떤 선택과 행동으로,
당신의 마음속 ‘좋은 세계’를 만나게 될까?
당신의 좋은 세계는 어떤 모습일지
두런 두런 이야기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