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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향인 Apr 02. 2021

세상이 내 마음대로 라는 환상

심리적 방어기제_2편 전능 통제(Omnipotent Control)

실어증에 걸린 30대 초반의 슬픈 피아니스트 폴(Paul)은 아래층에 사는 괴짜 여인 마담 프루스트와의 우연한 만남을 계기로 유아기 시절의 잊힌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 정원>에서 침대에 누워 있던 갓난아기 폴은 봄 햇살처럼 따스한 엄마의 미소를 보며 어떤 느낌과 생각을 가졌을까?

엄마 뱃속에서 세상 밖으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아기들은 맨 처음 자기 몸의 경계를 알지 못한다고 한다. 자신의 신체가 어디서부터 시작돼서 어디가 끝인지 감각이 애매모호한 것이다. 이때 아기는 세상과 자신을 구분하지 못한다. 그러다 엄마와의 신체 접촉을 통해 점차 몸의 감각이 발달하면서 세상과의 경계가 생기고, 정서적으로는 엄마와 긴밀한 애착 관계가 시작된다. 심리학자 마가렛 말러(Margaret Schoenberger Mahler)는 이 단계를 일컬어 정상적 공생 단계(symbiotic phase)라고 불렀다.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 정원>에서 주인공 폴은 아기 침대에 누워서 부모를 바라보던 기억부터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고, 옹알이를 하며 엄마, 아빠를 말하기 시작할 때의 기억들을 조금씩 떠올리며 마음 깊은 곳에 가라앉아있던 상처를 마주한다. 무의식에서 건져 올린 과거의 기억은 늘 슬프기만 했던 폴을 설레고 기쁘게 해 주었지만, 큰 충격과 절망, 비탄에 빠뜨리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고통을 이겨내고 내적인 성장을 이뤄낸 폴은 마침내 자기 삶의 진짜 주인공이 된다.


영화 초반 장면 중 아기 폴이 누워서 따스한 엄마의 표정을 바라보는 듯한 카메라 앵글은 심리학자 말러가 말한 정상적 공생 단계에 있는 아기의 시선과 주관적 느낌을 상상해볼 수 있게 한다. 잠시 당신이 신생아라고 상상해보자. 신생아인 당신은 아직 걸을 수 없다. 다만 침대에 누워 손과 발을 꼼지락 거리거나, 소리를 내서 엄마의 관심과 주의를 끌 수 있다. 배가 고프거나, 기저귀가 척척하거나, 뭔가 불편하거나 하면 칭얼대거나 소리 내어 울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당신에게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당신의 눈 앞에 엄마가 "짠" 하고 나타나는 것이다. 마치 마법처럼, 당신이 원할 때마다 엄마가 내 눈 앞에 나타난다. 이런 일을 반복해서 경험한 아기인 당신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아 역시 엄마는 내가 필요할 때마다 나타나네. 내가 원하는 건 단지 생각만 해도 뭐든지 다 되는군. 오, 그렇다면 내가 좀 대단한 사람인 게 틀림없어"


물론 아기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없다. 세상에 태어난 지 두 달에서 6개월쯤 된 신생아의 주관적인 느낌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게 언어로 표현해본다면 이런 식이 아닐까 짐작해볼 따름이다. 정상적 공생 단계에 있는 아기가 이렇듯 뭐든지 다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통제할 수 있다고 느끼는 주관적인 느낌을 전능감(omnipotence)이라고 한다. 이는 신생아와 유아기 때 주로 느끼지만, 성인이 된 이후에도 아주 간혹 경험하기도 한다. 평범한 내 인생에 마법 같은 일이 펼쳐지는 순간, 나를 바라보는 상대의 눈에 꿀이 뚝뚝 떨어지는 것 같은 순간 말이다. 그렇다. 바로 사랑에 빠졌을 때 우리는 가끔 상대의 애정 행동을 통해 유아기 시절의 전능감을 다시 느끼곤 한다.


예컨대 이런 상황을 생각해볼 수 있다. 나의 남편이 남자 친구이던 시절, 우리는 장거래 연애 끝에 서로 가까운 곳에 살게 되었다.  어느 날, 무슨 일인지 지금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개인적인 일로 몹시 속이 상해 있었다. 어쩌면 그와 싸웠던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 날 저녁은 남자 친구가 일을 하고 있어서 만날 수가 없었는데, 갑자기 전화가 오더니 집 앞이라는 것이 아닌가. 집 밖으로 뛰쳐나가 그의 품 안에 안겼던 순간의 벅찬 감동은 생전 처음 느껴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남편에게 미안하지만 이 글을 쓰기 위해 골똘히 내 기억을 더듬어보기 전까지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지냈다 하하).


내가 보고 싶다고 문득 생각만 했는데, 남자 친구가 연락도 없이 갑자기 내 눈앞에 딱 나타난 순간. 마음이 힘들고 피곤에 지쳐 울적한데 바로 그 순간 남자 친구한테 "오늘 어땠어? 괜찮았어?"라고 묻는 카톡 메시지가 날아올 때. 단순한 감동을 넘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어떤 고양된 감정을 느끼게 된다. 바로 이것이 갓난아기 때 우리가 느꼈던 전능감과 비슷하다.


이제 남편이 된 그는 내가 가끔 주말 출근을 하는 날 운전해서 회사로 나를 데리러 올 때 차가 막히는 것을 먼저 생각한다. 그가 운전대를 잡고 두 시간을 길바닥에서 버리는 것이 싫은 나도 특별한 때가 아니면 대중교통을 이용해 퇴근한다. 사랑에 빠지는 초기에는 서로에게 가까워지려는 애착 갈망이 높기 때문에 위와 같은 마법의 순간으로 붕 뜬 경험을 종종 하게 되지만, 사랑이 무르익고 나면 다시 서로의 현실로 돌아와 땅에 발을 붙이게 된다.


심리적 방어기제로서의 '전능 통제'(Omnipotent Control)는 어쩌면 바로 이 단계, 현실로 돌아와 땅에 발을 붙이는 것에 어려움을 겪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전능 통제에 대한 욕구가 높은 사람은 자신의 성취뿐만 아니라 대인관계적인 면에서도 뭐든지 자기가 생각한 대로 하기를 바라고, 그것이 실제로 가능하다고 확신하는 경향이 있다. 좀 더 확장해서 생각해보면 이는 사실 예전에 한창 유행했던 '시크릿' 같은 자기 계발서들이 깔고 있는 메시지, 즉 "뭐든지 당신이 꿈꾸기만 한다면 이룰 수 있다"는 것과 비슷한 사고방식이다.


하지만 현실이 정말 그러한가? 모든 사람들이 단지 꿈을 꾸기만 한다면, 원하는 것을 모두 이룰 수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노력하는 만큼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가능성은 높아질 수 있지만, 그것의 결과는 나의 의지 외에도 여러 가지 변수들이 작용하기 마련이기에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그런데 그 모든 걸 나의 의지로 통제할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는다면, 그 사람은 유아기의 전능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이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자신감, 자존감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전능 통제를 주된 심리적 방어기제로 사용하는 사람은 불안 등의 정서적 긴장을 해소하고 자존감을 유지하기 위해 타인을 조종하려 한다는 임상가들의 의견도 있다.


나와 너의 만남으로 서로의 영혼이 성장하는 성숙한 관계를 위해선 결국 하늘에 붕 떠 있는 것처럼 고양된 기분에서 내려와 땅에 단단하게 발을 디뎌야 한다.




영화 속에서 마담 프루스트 부인은 떠나기 전 폴에게 편지와 함께 선물을 남긴다. 그녀가 남긴 마지막 쪽지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Vis ta vie 네 인생을 살아라

심리적 방어기제_1편 부인(denial)
<아빠의 수첩>
https://brunch.co.kr/@diepsyche/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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