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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향인 Apr 05. 2021

네 잘못이 아니야

심리적 방어기제_3편 이상화와 평가절하

스물한 살의 윌(Will)은 MIT 대학 청소부로 일하며 퇴근 후에 동네 친구들과 펍에서 맥주를 마시고 시시껄렁한 농담을 즐기는 평범한 일상을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대학 복도 칠판에 적힌 어려운 수학 문제를 몰래 풀게 된다. 그 일을 계기로 윌은 램보라는 수학 교수의 눈에 들어 일주일에 한 번씩 수학 난제를 푸는 일과 심리 치료를 병행해서 받기로 한다. 램보는 윌이 자신의 재능을 낭비하는 대신 인류 역사에 기록될만한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학 천재로 살기를 바라며, 그의 폭력적인 성향을 잠재우기 위해 각종 유명한 심리치료 전문가들을 만나게 한다. 하지만 윌은 그들 모두를 가볍게 가지고 놀며 조롱하고 결코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다. 모두가 두 손 두 발 다 든 윌의 심리치료를 위해 램보 교수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친구이자 동료 교수인 숀을 찾아간다. 숀과 윌의 만남도 처음부터 순탄치 않았다. 상처 받고 버림받는 것이 두려워 타인에게도, 자기 자신에게도 마음을 열지 못하는 윌에게 숀이 다가가며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한다.


 네 잘못이 아니야

영화 <굿 윌 헌팅>은 무명의 젊은 수학 천재와 상처 받은 심리치료사의 인간적인 만남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안겨주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명대사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이 대사를 꼽지 않을까.




오만한 하버드 대학원생의 기를 가볍게 꺾을만한 탁월한 두뇌와 지성을 갖춘 윌은 똑똑하고 유머러스하며 남자다운 매력까지 넘치는 젊은 청년이다. 친구들과 웃긴 농담을 주고받으며 자신감에 차있는 듯해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남들에게 말하지 못하는 슬픈 상처가 있다. 고아로 여러 가정에 입양되고 파양 되며 학대받고 자란 경험은 그로 하여금 사람을 믿고 신뢰하는 데 어려움을 갖게 했다. 세상이 자신에게 친절할 것이란 믿음이 부족한 윌은 타인도 신뢰할 수 없지만 자기 자신도 믿기 힘들다. 그래서 더 이상 상처 받지 않기 위해 마음의 문을 꽁꽁 닫아버리고 자신에게 숨겨진 가능성 조차 외면한다.


누군가로부터(보통 중요한 대상으로부터) 진심 어린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하거나, 거절당하고 버림받았다고 느껴진 경험은 사람의 마음에 상처로 남는다. 문제는 상처 자체가 아니라 이것이 자존감의 타격으로 이어질 때다. 인간은 항상 자신에게 벌어진 일의 원인을 찾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사랑받지 못한 사람은 자신이 사랑받지 못한 이유를 자기 내부, 또는 외부에서 찾으려고 한다. 전자의 경우는 자기 자신이 못나거나 애초부터 뭔가 잘못되서라고 여기기 쉽고, 후자는 남을 탓하고 세상을 원망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사랑받지 못한 경험이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하나의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세상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개념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애초에 그런 일이 생기게 된 것(예컨대, 윌의 경우처럼 학대받고 파양 된 일)은 그의 잘못이 아니지만, 그것이 부정적인 자기 인식으로 연결되는 순간 그로 인해 발생하게 되는 문제들은 온전히 그 사람의 몫이 돼버린다. 인생의 아이러니다.


숀이 윌에게 해준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말은 그래서 모든 이들에게 위로가 되는 것 같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살면서 세상으로부터, 사람으로부터 받은 크고 작은 상처들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 상처를 잘 극복하면 성숙하고 건강한 삶을 사는데 자양분이 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는 마음의 병이 되어 주기적으로 우리 삶을 흔들고 때로는 송두리째 뽑아버리기도 한다.


윌은 어린 시절의 잦은 학대와 파양 경험을 통해 '내가 사랑받을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나는 사랑받을만하지 못하다'라는 자기 인식을 자기도 모르게 키웠을 것이다. 어린아이를 입양해서 제대로 사랑을 주지는 못할망정 학대한 어른이 잘못한 것이 분명함에도, 모든 걸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어린아이는 비합리적인 사고를 통해 자기에게서 문제의 원인을 찾아낸다. 그리고 스스로 사랑받지 못한 것에 깊은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


대학원 시절 교수님이 자기애성 성격장애를 설명하시면서, 자신이 사랑받지 못한 존재라는 사실을 세상 밖으로 들킬 것 같을 때 느끼는 감정을 수치심이라고 하셨던 것이 생각난다. 나르시시스트적인 문제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주로 느끼는 핵심 감정 중 하나가 바로 이 수치심이다. 안타깝게도 수치심은 인간이 가장 마주하기 어려워하는 아픈 감정 중 하나이다. 그래서 수치심은 반드시 내면 깊은 곳, 느끼고 지각할 수 없는 무의식의 세계로 감춰져야만 하고, 이를 위한 주된 방어기제로 '이상화'(idealization)와 '평가절하'(devalutaion)가 작동된다.


내면 깊은 곳에서 자기 자신이 보잘것없는 존재라고 느끼는 사람은 반대로 '완벽해지려고' 애쓴다. 이때의 완벽주의는 비판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나 민감성 때문이라기보다는 '완전함'을 추구하려는 어떤 강박 같은 것과 비슷한 것 같다. 그래서 대상(자기 자신 또는 타인)에 대한 '이상화'를 통해 완벽함을 추구하려고 하는 경향이 높기 때문에, 논리상 필연적으로 뒤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 '평가절하'다. 세상에 어떤 대상도 완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처음엔 완벽해 보이는 것들도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변하고 균열이 생긴다. 특히 인간관계는 더더욱 그렇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친해지고 가까워지면서 서로에 대한 애정만 키워가는 것이 아니라 실망, 실수들도 반드시 함께 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상화와 평가절하를 주된 방어기제로 쓰는 사람은 바로 이 순간을 견디기 어려워한다. 완벽함에 대한 환상이 무너진 자리에 실망, 오점, 흠결이 생기는 것을 견디기 어렵기 때문에 그 순간 돌연 관계가 중단되기도 한다. 심리 치료에서도 그런 일이 종종 생긴다.


의과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캘리포니아로 떠나야 했던 윌의 여자 친구 스카일라는 윌에게 함께 떠나자고 한다. 그 순간 윌은 몹시 당황한다. 그리고 지금은 좋아서 함께 하고 싶겠지만 나중에 서로에게 질리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며 벌컥 화를 낸다. 그리곤 '어차피 너도 부잣집 딸이니까. 지금은 나 적당히 데리고 놀다가 나중에 너 같은 부잣집 남자 만나 결혼할 거잖아'라고 하며 스카일라를 강하게 거부한다. 충격과 슬픔에 휩싸였지만 마지막까지 윌을 붙잡고 싶었던 스카일라는 흐느끼며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윌은 '난 널 사랑하지 않아'라고 매몰차게 말하며 그녀를 떠난다.


"자기애의 가장 슬픈 대가는 사랑하는 능력이 성장을 멈춘다는 사실이다."
[정신분석적 진단, 성격구조의 이해] 中, Nancy McWilliams


영화 속에서 윌은 자신을 개인적인 목적이나 이용 가치가 있는 도구로서가 아니라 상처 받은 마음을 가진 존재로 바라봐주는 숀의 인간적인 태도를 통해 처음으로 마음을 열고 자신의 상처를 마주한다. 그리고 그의 품에 안겨 아이처럼 엉엉 울음을 토해낸다. 자신의 상처를 스스로 마주하고 사람에게 위로받은 경험을 통해 윌은 마침내 용기를 내본다. 상처 받고,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무릅쓰고 지금 자기 삶에 가장 중요한 것, 내가 처음으로 살면서 진심으로 원하는 것을 찾아, 사랑을 찾아 캘리포니아로 먼 여행을 떠난다. 윌이 떠난 여행에서 스카일라와 감격의 재회를 하게 될지, 아니면 벌써 다른 남자를 만난 스카일러에게 상처만 받고 돌아오게 될지, 영화는 알려주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를 본 관객들은 느꼈을 것이다. 윌의 앞날에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지더라도, 어쩌면 험난한 일들이 기다리더라도 "괜찮을 것 같다"라는 마음을. 그는 이제 막 자기 알을 깨고 나와 세상을 향한 첫 여행을 시작했다. 나의 과거 여정은 어떠했고, 앞으로 어떠할 것인가. 영화를 다시 한번 보고 나서 생각해보게 된다. 당신은 어떠한가?




자기애는 인간 삶의 필수 요건이다. 자기를 사랑할 수 있어야만 진심으로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있다. 예수님도 그랬고 부처님도 그랬다. 문제가 되는 건 이 사랑이 진정한 의미에서 채워지지 않고(예컨대, 존재로서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가치 평가적, 도구적 방식으로서의 사랑) 결핍돼서 자기도 모르게 거기에만 매달리고 몰두하게 될 때이다. 뭐든지 '중도', '균형'이 중요하다는 동양 사상의 지혜가 여기서도 옳다. 어쩌면 자기애 문제는 어린이가 젊은이로, 젊은이가 중년으로, 또 노인으로 나이 들어가며 겪는 성장 과정의 진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부디 당신의 여정이 너무 많이 고되지는 않기를, 그 모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행복하기를 바란다.

Copyright. 픽사베이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심리적 방어기제 2편_전능 통제(Omnipotent Control) <세상이 내 마음대로 라는 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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