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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향인 Apr 07. 2021

왜 욕하면서 닮을까?

심리적 방어기제_4편 투사와 내사

평소에 늘 하던 행동인데 어느 날 갑자기 나의 특정 행동이 스스로 이상하게 느껴진 적이 있는가? 마치 제삼자가 나를 바라보는 것처럼 아주 객관적으로 보이면서 동시에 '내가 왜 이러지?' 하고 자문하게 되는 순간 말이다. 나는 상담 공부를 하고 개인 분석을 받으면서 몰랐던 나에 대해 새롭게 눈 뜨는 경험을 하게 됐다.


벌써 수년 전 일이다. 그날도 여느 날처럼 동기들과 어울려 밥을 먹고 수다를 떠는 즐거운 모임 중이었다. 마음씨 따뜻한 언니네 집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나와 다른 친구가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설거지를 하고 개수대에 말릴 그릇을 내려놓으려는데 그 순간 내가 긴장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머릿속엔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이 그릇을 어떻게 놓지? 언니가 놓는 방식이 있을 텐데 내가 아무렇게나 놨다가 마음에 안 들면 어떡하지?'


그 생각이 들자마자 어쩐지 순식 간에 주눅 드는 느낌이 들었다. 스스로 너무 이상했다. 그럴 이유가 전혀 없는데! 친절한 언니는 그릇을 어떻게 놓든 뭐라고 하지 않을 거란 사실을 아는데도 말이다. 결국 조심스럽게 그릇을 어떻게 놓으면 좋을지 물어봤다. 그랬더니 언니는 '어 그거 아무렇게나 놔'라고 말했다.


나의 이상한 행동은 그날 함께 밥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도 여러 번 관찰되었다. 음식 하는 걸 도와주려고 야채를 써는데 또다시 머릿속에서 '아 이 야채를 어떻게 썰어야 되지? 언니가 원하는 방식이 있을 텐데' 이 생각이 맴돌았다. 그때도 어떻게 썰면 좋을지 묻자 언니는 '어 그거 너 하고 싶은데로 해'라고 다정하게 말했다. 그 다정한 말 한마디가 나에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됐는지 언니는 모를 것이다. 나에겐 아주 낯설고 생경한 말이었다. 그리고 가장 듣고 싶은 말 중 하나였던 것 같다.




나는 잔소리 많은 엄마의 딸로 자랐다. 좋게 표현해서 잔소리지 지적질과 비난에 가까운 말들도 많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런 사람이 되지 말아야지 생각했다. 사람 마음에 상처 주는 말은 하지 말아야지. 이제 막 싱싱한 뇌가 자라기 시작한 상처 받은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은 그 정도였으리라. 미성숙하고 결과적으로 전혀 효과적이지도 않은 방법이었지만 덕분에 남들에게 싫은 소리는 많이 듣지 않고 살았다.


하지만


항상 조심하며 살다 보니 말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말이 입안에 맴돌다가 삼켜지는 일을 반복하다 보니 나중에는 하고 싶은 말 자체가 별로 없어졌다. 결국 나는 반쪽짜리 성공의 대가로 늘 어딘지 모르게 주눅 들고 나를 세상 밖으로 표현하는 방법을 오랫동안 잃고 살아야 했다. 이십 대 내내, 삼십 대 초반까지도 이유 없는 우울감과 내 삶의 주인공이 아닌 것 같은 무기력감에 종종 시달렸다.


아까 그 장면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전혀 그럴만한 사람이 아닌데도 언니에게 왠지 잘못했다고 지적받고 혼날 것 같은 비합리적인 느낌이 들었던 그 순간, 나는 내 안에 있는 ‘지적받고 혼나서 위축된 아이’의 마음을 언니에게 투사했다. 투사(Projection)자기 마음에 있는 것을 자기밖에 있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을 말한다. 이 심리 작용을 알기 위해선 또다시 유아기 시절로 돌아가서 아기의 마음 상태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세상에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기는 아직 세상과 자기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 그래서 자기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밖에서 일어난 일과 동일시한다. 정신분석학자 P. Fonagy는 이를 심리적 동등성 상태(Psychological Equivalence Mode)라고 부르기도 한다. 세상과 자기의 내적 느낌이 주관적으로 같다고 느끼는 아기는 자기가 불편하면 엄마(혹은 주요 대상)도 불편할 것이라고 여긴다. 이것이 내 마음에서 일어난 주관적인 느낌을 밖에 있는 사람도 똑같이 느낄 거라고 추측하는 근거가 된다.


그런데 이런 원시적인 투사는 꼭 어린아이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장면에서 투사는 사실 늘 일어난다고 봐야 한다. 투사를 눈에 보이지 않는 안경이라고 상상한다면, 그중에는 상대방을 긍정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도 있고, 반대로 부정적으로 보이게 하는 것도 있다. 긍정적인 투사가 일어나는 관계는 서로 좋은 감정이 오고 가기 쉽다. 왠지 만나자마자 호감이 가는 사람에게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긍정적인 신호를 보내게 되고, 그것을 민감하게 알아차린 상대는 나에게 같은 종류의 호감을 보내오게 된다. (물론 이는 모든 관계에서 그렇다는 뜻은 아니다. 보통은 그러하다는 것이다. 표준편차의 양 극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가운데에 분포하는 정규 분포 반응에 속한다고 생각하면 좋겠다)


반대로 부정적인 투사는 종종 관계를 흙탕물처럼 어지럽히고 미궁에 빠지게 만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아까 이야기한 나의 사례로 돌아가서 생각해보자. 나는 분명히 순식간에 '내가 잘못하면 언니가 화가 나서 나를 혼낼지도 몰라'라는 마음을 언니에게 투사했다(이건 나의 의식적인 생각이 아니라 내 몸에 전해진 긴장과 느낌을 통해 번역한 나의 무의식적 사고의 내용에 대한 추측이다. 이런 주관적인 느낌은 통제할 수 없는 속도로 순식간에 올라온다) 다행히도 그 당시 나는 개인 상담 경험을 통해 그 순간 내가 느낀 주관적인 느낌을 '알아차리는' 능력이 조금씩 생기고 있었다. 알아차리면 그 순간 내 생각과 나 사이에 거리가 생긴다. 그래서 잠시 멈춰서 생각해봤다.


'이게 지금 이 상황에 맞는 적절한 반응인가?'


아니었다. 그 순간 나는 순식간에 과거에 엄마한테 별거 아닌 일로 지적받고 혼나서 위축돼 있었던 어린아이로 돌아가 있었던 것이다. 캬. 이걸 알아차리다니! 지금도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면 마음속에서 혼자 무릎을 탁 쳤던 그때의 쾌감이 떠오른다. 이제 나는 내 마음에 끌려다니지 않을 수 있겠구나. 그 작은 변화의 씨앗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부정적 투사의 안 좋은 영향을 이해하기 위해서 여기서 만약의 상황을 한 번 가정해보자. 만약 상대방이 친절한 언니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말투가 조금 건조하고 별 나쁜 의도 없이 참견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어서 나의 투사 내용에 잘 들어맞았다면, 나의 혼날까봐 긴장하고 위축된 자동 반응은 상대방의 그런 태도에 꼭 맞아떨어져서 더 이상 주관적인 느낌이 아니라 '사실'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는 마음속으로 상대방 탓을 하며 싫어하고 멀리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되면 마음이 복잡해진다. 그냥 깔끔하게 '상대방이 나랑 안 맞아서 싫어요'가 생각보다 잘 안된다. 내 마음 한편에 '혹시 내가 뭔가 예민하게 생각한 건 아닌가'라는 의문의 씨앗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 내 마음 안에 아예 그런 투사가 일어나지 않는 상태라면, 그런 상대방의 태도도 별수롭지 않게 여겨지거나, 조금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면 그런 마음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은 아마 이제 이런 궁금증이 들지도 모르겠다.

 

'그럼 그렇게 알아차린 뒤로는 다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나요?'


불행하게도(?) 그렇지 않다. 예전보다 빈도수와 느낌의 강도는 확실히 줄었지만, 나도 모르게 혼날까봐 긴장할 때가 여전히 종종 있다. 시어머니와 같이 식사 준비를 할 때 나의 어설픈 손놀림에 속으로 몇 번이나 긴장했던지. 절대 뭐라고 하시는 분이 아닌데도 나오는 자동반응이었다. 그래도 다른 건 예전처럼 그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못나게 여기거나 박대하지 않고, 우연히 만나게 될 때마다 잘 달래줘서 보내려고 한다는 점이다. 투사라는 독특한 안경이 펼쳐 보여주는 풍경은 사람마다 다 다르다. 이 투사가 반복해서 재연되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 마음 안에 중요 대상(주로 부모님이나 기타 주 양육자)의 목소리와 태도가 깊게 내사(Introjection)돼 있기 때문이다.


내사란 투사와 반대로 내 마음밖에 있는 것을 나의 것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 나에게 보여주었던 엄마, 아빠의 메시지들이 내 안에 차곡차곡 담긴다. 그리고 그것을 원래부터 내 안에 있던 것으로 착각한다. 내사의 힘은 매우 뿌리 깊어서 그것을 알아차리고 난 뒤에도 쉬이 떨치기가 어렵다. 나에게 내사된 메시지들의 내용은 이랬다. '넌 친가 식구들처럼 맨날 골골거리고 아프다 그러니', '게을러터졌다', '네 아빠 닮아서 노는 거 좋아한다'. 이 말들은 사실 대부분 어느 정도의 진실이 담겨있다. 나는 어린 시절 몸이 약해서 감기도 자주 걸리고 종종 아팠다. 뭔가를 시작하기 전엔 일단 누워서 꾸물거리는 습관이 있고, 대학 시절엔 공부보다 동아리 활동하고 사람들과 술 마시고 노느라 바빴다.


문제는 내가 자주 들었던 말들로 나 스스로를 그런 사람으로만 평가하려 한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은 내 모습도 분명 있는데 그건 내 머릿속의 지우개처럼 자주 잊힌다. 예컨대 나는 자주 골골 거리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건강해서 초등학교 체력장은 늘 1,2등급이었다. 그리고 누워있는 걸 워낙 좋아하고 움직이는데 시간이 걸려서 게으르기도 하지만 학교나 회사에 늦은 적은 한 번도 없고, 주변 사람들에게 늘 성실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살았다. 노는 걸 아주 몹시 좋아하지만 늘 놀기만 하는 건 아니다. 놀더라도 해야 할 건 다 한다(이렇게 쓰고 보니 오랜만에 객관화가 되는 것 같아 안심)


내사가 무서운 점은 이것이 '자기 충족적 예언'의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교사가 학생에게 긍정적인 기대를 하면 그에 맞는 좋은 결과가 나오고, 부정적인 기대를 하면 또 그에 맞는 안 좋은 결과가 생긴다는 다소 충격적인 실험으로 유명한 '로젠탈 효과'가 내사를 통해서도 일어난다. 내사의 흔한 예는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자문했던 질문과 연결된다.


도대체 왜, 욕하면서 엄마/아빠를 똑같이 닮는 거지?!

닮은 부분이 주로 부정적일 때 이런 질문을 하게 될 것이다. 내사의 가장 극단적인 예는 가해자였던 부모 혹은 친구, 직장 상사 등을 내사해 자기도 모르게 가해자의 모습을 하게 될 때이다. '공격자와의 동일시'라고도 부르는데 그 역동에 대해 길게 설명하는 건 너무 어려워서 간단히 말하자면, 가해자로부터 느꼈던 극심한 공포와 불안이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에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 당하기만 하는 무력한 피해자의 입장이 아닌, 차라리 가해자의 입장에 서는 내적인 몸부림, 그리하여 어떻게든 심적인 균형을 찾으려는 방어 전략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안타깝게도 나도 잔소리꾼 엄마를 닮았다. 남편에게 하루 잔소리 세 번은(사실 그 이상) 하는 것 같다. 그래도 되도록 상처가 될만한 지적과 비난은 안하려고 애쓴다. 화를 참다 폭발하는 날엔 그 날카로운 것이 튀어나와 그러고나선 망연자실한 우울함을 느끼곤 하지만. 어쩌겠나. 나는 성인군자가 아닌 걸. 점점 나아지겠지 하며 나의 초라한 모습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며 살 뿐이다.


고맙게도 나의 남편은 엄마의 잔소리를 우리만의 재밌는 농담으로 만들어주었다. 관찰력이 좋아 남을 잘 흉내 내는 그는 어느 날 엄마와 같이 밥을 먹고 와서 이렇게 말했다.


"으이구"


깜짝 놀라 뭔 소린고 하니. "장모님이 잔소리하실 때마다 항상 으이구~부터 하시네" 그러는 게 아닌가. 으이구, 하는 모습이 너무 웃겨서 둘이서 한참 웃었다. 그 후 서로에게 잔소리할 때마다 으레 "으이구"를 장난스럽게 앞에다 붙이곤 한다. 그도 나만큼이나 잔소리가 많다. 요즘엔 엄마가 "으이구" 할 때마다 피식 웃음이 난다.



갈수록 글이 길어지네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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