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쓰는 글_정리
지금처럼 K-콘텐츠의 수준과 위상이 높지 않았던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상대적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영화, 소설의 인기가 꽤 많은 편이었다. 집에 있는 동안에는 주로 방바닥에 누워 지내길 좋아했던 나는 각종 일본 망가와 영화를 누워서 봤다.
그로부터 세월이 어언 20여 년이 흘러 마흔을 넘기고 나니, 그때 보았던 일본 콘텐츠들의 대부분은 지금의 내가 더 이상 즐길 수 없는 흘러간 것들이 되고 말았다. 순전히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한국 문화는 지난 20년간 몰라볼 정도로 다이내믹하게 변화하고 성장했지만, 일본 콘텐츠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계속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년에 한 번은 찾아보게 되는 거의 유일한 일본 영화가 하나 있는데 바로 <카모메 식당>이다.
고국을 떠나 핀란드에 일본 가정식 식당을 차린 여인과 식당을 중심으로 우연히 만나게 된 외로운 사람들이 일상을 공유하며 연대하는 소소한 이야기이다. 영화에는 이런 대사가 등장한다.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어서 좋아 보여요."
"아니요.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뿐이에요."
식당 주인의 담담하고도 쿨내 나는 이 대사가 그 당시 취업 고민으로 골머리를 앓던 내 마음을 잠시 시원하게 해 주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이 대사는 여전히 공감을 자아낸다. '퇴사', '파이어족' 같은 키워드가 시대를 관통하고 있는 요즘, 많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일'을 억지로 견디며 직장생활을 하고, 밥벌이를 한다. 그로 인해 직장인의 절반 이상이 우울증을 경험한다고 하니 씁쓸한 현실이다.
퇴사를 고민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은데 도대체 내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한다. 나는 그런 고민에 빠져있는 사람들에게 이 대사를 전해주고 싶다. 그리고 좋아하는 일을 단번에 찾으려고 애쓰기보다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일들이 뭔지 먼저 적어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렇게 적은 것들을 제하고 정리하며, 다시 한번 고민해 보거나, 바로 하나씩 실행해 보는 것이다. 그렇게 하다 보면 언젠가는 자신이 원하는 곳에 다다르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비단 일뿐만이 아니라 인생의 다른 영역에서도 무언가 비우고, 정리해야 된다고 생각될 때, 선택과 집중이 필요할 때 쓰면 좋은 방법인 것 같다. 사람은 자기가 싫은 것은 본능적으로 안다. 영어에서는 이런 본능을 일컬어 gut instinct라고 표현한다. 한마디로 싫은 것은 뱃속 깊이 내장에서부터 느낀다는 것이다. 마치 싫은 사람은 그냥 느낌으로 아는 것처럼.
그걸 잘 모르겠다면, 어떤 이유로 인해 나의 본능과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죽어도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정신과 몸은 훨씬 가벼울 것이고, 그로 인해 내 삶에 더 집중할 시간적, 심적 여유가 생기게 된다.
나는 변화 없이 반복되는, 예측 가능성만으로 이루어진 일을 싫어한다. 그런 것들은 한마디로 재미가 없어 몸부터 베베 꼬인다. 어릴 땐 그런 걸 싫어하는 나를 싫어했다. 부모님이 원하는 삶은 안정되고 예측 가능한 세계였으므로. 그 길고 긴 내적 외적 갈등, 타협과 반항, 이 모든 것이 정리된 나이에 이르니 너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