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의 시간>은 ‘후드 필름(Hood Films)’을 연상케 한다. 후드 필름이란 붕괴된 가족, 힙합 음악, 총기 폭력, 조직범죄 등을 통해 꿈도 희망도 없는 빈민가 청년들의 문제를 짚고 있다. 초반 도박장을 터는 장면까지는 정확하게 ‘후드 필름’의 정의와 일치된다. 클럽 장면에서 붐뱁 음악과 턴 테이블링(디제잉)이 등장하고, 거리에 그라피티를 보여주는 데서 확인된다. 그러나 감독이 진짜 말하고 싶은 바는 따로 있었다. 이것이 디스토피아 세계관을 초반 이후로는 전혀 활용되지 않는 이유다. 결국 감독이 SF를 내세운 까닭은 총기 액션과 빈민가 정서를 활용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무대(배경)는 어떤 이유로 대한민국 화폐제도가 붕괴되었는지 도무지 설명하지 않는다. IMF 구제금융 하나로 원화가 달러화로 뒤바뀌는 사태는 선뜻 와 닿지 않는다. 솔직히 어떤 화폐금융이론을 따른 건지조차 궁금하지도 않다. 이건 그냥 어불성설에 가깝기 때문이다. 차라리 대한민국 정부가 무너졌다고 하는 편이 더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경찰이 제대로 기능하고 있어 이것도 설명이 안 된다.
극본을 직접 쓴 윤성현 감독은 이 점을 모를 리가 없다. 그래서 초반 30분이 지나가면 배경에 대한 묘사를 전면 포기한다. 그러니 영화는 청년문제와 일절 관계가 없다. 윤성현 본인도 아마 그에 대한 고민을 깊이 하지 않았음이 여기서 드러난다.
2. 소년끼리 벌이는 멜로드라마!
주인공들이 도박장을 턴 이후로 감독은 추격 스릴러에 대한 무관심을 드러낸다. 많은 분들이 칭찬하는 총기 사운드 편집은 베를린 영화제에서 지적받은 이후 수정된 사항이다. 이런 실감 나는 총격 사운드를 처음 제시한 마이클 만의 <히트(1996)>이 언제 적인데 이것이 과연 칭찬받을 요소인지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클라이맥스 액션 연출은 마이클 만이나 크리스토퍼 놀란에 비해 다소 무성의하다. 동선에 대한 짜임새가 헐거운 것을 떠나 카타르시스가 오롯이 전달되지 못한다. 이 부분은 3장에서 더 논의하겠다.
영화는 기훈(최우식)이 주인공과 헤어져서 가족에게 돌아가고, 장호(안재홍)는 가족의 부재에 대한 외로움을 호소한다. 동해 백사장에서 친구들끼리 불꽃놀이를 벌인다거나, 장호(안재홍)가 수술이 끝나자 기훈이 준석에게 장호는 휴식이 필요하다고 설득한다. 이처럼 도주와 추격이라는 서스펜스와 스릴은 어느새 뒷전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오프닝에서 기훈은 장호의 옷을 자기 옷이라고 다투지만, 기훈이 떠나기 전에 자신의 재킷을 장호에게 덮어주고 간다. 그밖에 준석(이제훈)은 상수(박정민)를 염려하는 모습, 장호(안재홍)가 ‘더 이상 외롭지 않아’ 같은 대사는 우정을 다룬 멜로드라마에 가깝다. <사냥의 시간>은 두기봉처럼 시종일관 건조한 톤을 유지하면서도 이런 멜로드 라마이 불쑥 끼어들어 이따금씩 균열을 가한다. 이것은 홍콩 누아르도 아니고, <블레이드 러너>처럼 SF 누아르도 아니다. 이것은 윤성현이 <파수꾼>부터 줄곧 힘주어 주장하던 소년들의 우정과 형제애이다. 주인공들이 나누는 유치한 대사는 친구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했던 사춘기 시절의 정서를 반영한다.
3. 문제는 삭제 기법?
문제는 삭제 기법이다. 삭제(이해불능의 서사) 기법은 범죄영화에 흔한 클리셰지만, 캐릭터에 이렇게 적용해버린 탓에 감정 이입할 수가 없다. 주인공들이 영화 시작부터 범죄자들이다. 이게 왜 문제냐면? 국힙이 미국 흑인들의 빈민가 정서를 대신할 철학의 부재로 그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듯이 이 영화도 마찬가지다. 할리우드 후드 필름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사냥의 시간>은 주인공들에 감정 이입하기가 어렵다. 범죄자들이 왜 범죄를 벌이는가가 한탕해서 하와이에 가고 싶어서라면 과연 한국인이 납득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 청년들의 고통을 표현할 거였으면 젊은이들이 무너진 세상에서 겪는 고난을 먼저 그려야 하지 않을까? 현실의 벽에 부딪히다가 어쩔 수 없이 범죄를 저지른다는 설정이 더 납득이 갈 것 같다.
이 같은 공감의 부재는 부실한 캐릭터 묘사로 연결된다. 만약 도입부에 은행을 털다가 장호(안재홍)와 기훈(최우식)을 위해 대신 준석(이제훈)이 감옥에 간다는 장면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관객들에게 그들의 우정 와 결속이 단단한지를 단번에 이해시킬 것이다.
악역 ‘한 (박해수)’은 <터미네이터>의 T-1000과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안톤 쉬거를 합쳐놓은 캐릭터다. 첫 등장에 무기상을 협박하다가 안 되니까 총을 가지러 갔다 와서 쏜다. 이것이 무슨 프로페셔널 살인청부업자인가? 왜 주인공을 쫓는 게 재미있다며 일부러 풀어주는지? 이 캐릭터의 백스토리 자체가 생략되어있다. 이 매력 없는 빌런 덕분에 추격전이 싱겁다.
그보다 심각한 것은 사건의 진행이 대부분 생략되어 있다는 점이다. 동시에 누아르 기법이 의도적으로 누락되어 있는데 그만큼 장르영화를 제작할 의향이 없어 보인다. 그는 애초부터 드라마를 의도한 것 같다. 그래서 구체적인 사건의 서술이 생략되어 있다. 그 정서와 느낌만으로 영화를 이끌어 가다 보니 영화가 진행될수록 추격전이 느슨해지는 부작용을 겪는다.
결론적으로 스릴러, 누아르, 드라마 그 어디에도 집중하지 않았다. 그래서 장면마다 완성도의 편차가 크다. 서사나 전개에서 비약이 심해 개연성을 지적하는 분들이 많을 것 같다.
4. 그렇다고 해서 장점이 아예 없지는 않다.
<사냥의 시간>은 범죄영화의 외피를 뒤집어쓴 소년들의 우정과 형제애를 다룬 드라마다. 이 멜로드라마에 집중하다 보니 추격 스릴러나 건조한 누아르가 희석된다. 스릴러로서 스릴과 서스펜스가 희생됐고, 누아르가 주로 다루는 정치, 도덕적 규범에 대한 질문은 생략되었다.
유일하게 누아르와 맞다는 지점은 주인공이 겪는 심리적 공포다. 그 불안과 공포를 다루는 장치로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조명법을 활용했다. 황폐화된 현실은 '무채색'으로 폐허가 된 도시를 표현하고, 악당 한은 '붉은 조명'을 통해 피와 결투를 상징한다. 이상향은 ‘푸른 바다’로 형상화된다.
그 외에 딥 포커스, 와이드 앵글, 어지러운 미장센과 숏들, 긴장을 야기하는 비스듬한 수직구도. 급격한 앵글과 숏의 변화를 통해 젊은이들의 방황과 불안을 형상화한다. 다만, 키아로스쿠로 조명법을 맹신하는 바람에 과용했다. 한마디로 너무 어둡다. 이 부분은 아직 할리우드와 기술격차가 큰 것 같다.
또 프라이머리는 처음 음악을 맡았음에도 크게 어색하지 않았다. 그러나 후반으로 갈수록 한스 짐머 스타일을 지나치게 의식했다. 초반은 그만의 개성이 드러나서 듣는 재미가 있었는데 이 점이 아쉬웠다.
끝으로 최우식과 안재홍은 앞날이 기대되는 배우다. 천연덕스럽게 주변에 있을 법한 친구 같았다. 이런 실감 나는 연기에 비해 이제훈은 다소 연극적인 과장됨이 약간 어색했다. 그렇다고 연기를 못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박해수는 평면적인 역할임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입체감을 불어넣으려 최선을 다했다. 그의 노고에 엄지척을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