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ST 100 HORROR MOVIES, PART II
공포영화는 특수효과가 많이 들어가는 영화만큼이나 유통기간이 극히 짧다. 지금 관객은 제임스 웨일의 〈프랑켄슈타인(1931)〉이나 토드 브라우닝의 〈드라큘라(1931)>〉가 당시엔 극한의 공포 경험을 안겨주는 영화였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며 나 역시 그렇다. 어릴 적에 무서웠던 〈링〉의 사다코나 〈주온〉의 카야코, 토시오를 지금에 와서는 개그 소재로 쓰일 때 기분이 묘하다. 십 년 전 영국에서 〈양들의 침묵(1991)〉의 등급을 하향 조정했는데 그건 2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 영화가 공포영화로서의 기능을 그만큼 상실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난 100년간 호러 장르가 극단적인 자극을 향해 나아갈수록 과거의 공포영화들이 상대적으로 ‘순한 맛’으로 뒤로 밀려났다.
호러는 고도의 테크닉이 필요한 장르다. 공포란 생명의 위협을 받을 것 같은 위협을 느낄 때 생겨나는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에 매우 세심하게 다뤄야 한다. 자극적인 점프 스케어나 오싹한 장면이 별로 없이도 충분히 무서운 영화가 있다. 반면에 독창적이며 감각적인 소재라 해도 전혀 무섭거나 긴장감 없니 지루한 호러 영화가 허다하다. 그리고 사람마다 공포감을 느끼는 지점이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순위를 학문적인 잣대(비교분석)로 리스트를 짤 수밖에 없었다. 선정기준은 ①독창성, ②영향력, ③완성도 순으로 집계했다.
경비행기를 타고 다니는 연쇄살인마 ‘드와이트 렌필드’를 추적하는 베테랑 기자 '리차드 다스(미겔 페러)'은 신참기자 '캐서린 블레어(줄리 엔트위슬)'에게 “기사를 믿지도 믿음을 기사화하지도 말라”고 경고한다. 살육을 일삼는 악마의 엽기적 사건 보도에 혈안이 된 언론, 그런 타블로이드를 기꺼이 소비하는 대중을 동일선상에 놓고서 우리의 도덕관을 지옥도로 안내한다.
〈레디 오어 낫〉은 마녀사냥을 은유하는 동시에 자본주의의 근본이념인 공리주의를 비판한다. 공리주의란 모두의 '행복'을 극대화하는 것이 올바른 행동이라고 보는 윤리적 사상이다. 영화는 다수의 행복이 증진시키기 위해 개인을 희생해야 되는가라고 따진다. 이처럼 시댁 식구들이 새로 들어온 신부를 죽임으로써 자신들의 부를 지키는 악습 역시 공리주의와 엘리트주의에 대한 조롱이자 풍자다.
또 다른 측면에서 흔히 여전사가 등장하면 기계적으로 페미니즘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많다. 그러나 이 영화는 '신데렐라'에 대한 반감이 은연중에 깔려있다. 극 중 사위 캐릭터는 돈을 노리고 결혼하는 '골드 디거'를 조롱하기 위해 설계된 인물이다. 그래서 영화는 굉장히 잘 조율된 풍자 코미디로 기능한다.
두 번째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엄마 귀신은 레알 무섭다. 정 씨 형제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실감을 세심하게 다루며 공포를 자아낸다. 기묘하게 색이 바랜 색감으로 영화의 아련한 정서를 포장한다. 결국 이 옴니버스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10월 유신의 근원을 일제 강점기에서 찾는다는 점이다. 이런 정치적 함의는 정범식 감독이 만든 〈곤지암(2018)〉에도 쭈욱 이어진다.
국내 호러로 한정하면 〈4인용 식탁〉과 〈소름〉의 후배를 자처하며 오컬트를 주제로 한 추리영화. 건축을 전공한 이용주 감독답게 공간활용이 뛰어나다. 전체적으로 장르적 관습을 답습하지도 배반하지도 않는 대단히 안전 지향적 태도를 보인다. 이를 알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처음에는 개신교와 무속신앙을 동등한 위치에서 출발하다가 나중에는 개신교에게 알리바이를 제공한다. 둘 다 ‘기복(祈福) 신앙’인 건 마찬가지인데 왜 한쪽에만 면죄부를 주는지 그 점이 아주 미세하게 살짝 아쉽다.
〈컨저링〉은 국내 개봉 당시 ‘무서운 장면 없이 무서운 영화’로 홍보됐지만 오히려 그 반대다. 러닝타임 내내 모두 무서운 장면으로 꽉꽉 채운 놀이공원으로 초대한다. 〈컨저링〉은 새로운 것은 없지만, 기존 영화에서 발명된 아이디어를 적재적소에 배치했다. 언뜻 쉬워 보이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경지가 아니다.
〈인시디어스〉는 추리물의 플롯과 시간을 뒤섞는 장치를 통해 차별을 꾀한다. 특히 ‘시간여행’이라고 보아도 무방한 이 영리한 서사적 장치는 관객이 지금까지 이해한 이야기의 성격을 바꿀 정도로 절묘하게 작동하며 단순한 공포 이상의 즐거움을 준다. 한번 보고 잊어버렸던 무서운 이미지 뒤에 숨어 있던 사람들의 사연을 통해 영화를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영국 영화 <새벽의 황당한 저주>에 대한 미국식 화답, 능동적이고 유쾌한 웃음이 가득하다. 한마디로 좀비 영화를 가장한 로드무비, 성장영화이자 가족코미디다.
1인 카메라가 등장한 스페인 파운드 푸티지 작품은 여타 좀비 영화와 달랐다. P.O.V.(시점 숏)로 생생하게 공포의 현장을 담는다는 설정은 〈블레어 위치 프로젝트〉에서 빌려왔다. 현장감을 불어넣으면서 긴박한 속도로 진행되기 때문에 더욱 불안하게 만든다. 그 순수한 에너지가 전형적인 영화의 틀을 뛰어넘는다.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별로 궁금하지 않은 공포가 발생한 원인을 설명하는 사족을 덧붙인 것뿐이다.
이 복수 스릴러의 낫질에는 공포영화의 하위 장르인 `슬래셔‘에 기반을 뒀다. 당신은 아마 여성 한 명이 견뎌야 하는 신체적, 정서적, 성적 학대의 더미에 짓눌러 그만 보고 싶을지 모른다. 군부 독재의 부조리함을 반영한 섬마을의 지배 매커니즘은 일종의 ‘대중 독재’(mass dictatorship)의 형태를 띄고 있다. 그 폭압적 권력이 수직적으로 투하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피지배를 자처하는 다수의 아래 사람들로부터 그 권력이 떠받들어진다. 마을의 할머니, 남편, 소꿉친구 `해원(지성원)‘의 방관과 동조 속에서 핍박받던 `복남(서영희)‘의 심정이 절절하게 와닿는다. 그 부역자들을 처단할 때마다 카타르시스가 용솟음친다.
공포영화가 환한 대낮의 지나치게 밝은 화면이 웬 말인가? 초저예산 3만 달러로 제작된 이 촌스럽고 서툰 영화는 지금 봐도 이상한 마력을 마구 내뿜는다. 특히 사운드 디자인이 혁신적인데, 스크린 상의 이미지와 액션에서 오디오가 분리되어 여주인공의 악몽 같은 비현실성을 강조한다.
‘독립영화’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에 만들어졌다는 영화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텍사스 전기톱 살인〉, 〈이블 데드〉, 〈블레어 위치〉, 〈나이트메어 앨리〉와 같은 직계후손을 거느렸을뿐더러 일상에서 벌어지는 비현실성은 훗날 데이빗 린치에게 큰 자양분이 되었다.
많은 공포영화가 주택소유자의 무의식적 두려움을 파헤친다. 〈검은 물 밑에서〉는 세입자들에게 흔한 악몽인, 아파트에 문제가 있는데, 집주인 측에서 책임을 지지 않는다. 또 양육권 분쟁으로 신경이 곤두서있는 이혼녀가 6살 난 딸과 비슷한 나이의 환영을 만난다. 전통적인 귀신 이야기로 포장하고 있지만, 영화의 본질은 가족 드라마다. 모녀간의 진한 유대감에 대한 탐구이자, 상상할 수 없는 공포에 직면한 모성애가 짙은 페이소스를 남긴다. 참고로 2013년 발생한 엘리사 램 익사 사건을 예견한 것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Copyright(C) All Rights Reserved By 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