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NET 2020 영화감상
엔트로피는 비가역적이지만, ‘맥스웰의 악마’에 착안한 <테넷>의 아이디어는 단순하다. 순방향으로 가는 존재가 있고, 엔트로피를 거슬러 역방향으로 가는 존재도 있다. 놀란은 이를 시각화한다. 한 프레임에 과거, 현재, 미래가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상황을 프리포트에서 인버전된 주인공이 동시에 3 명 존재하는 장면으로 구현된다.
놀란은 한 인터뷰에서 교차편집으로 장면을 쌓아 올릴 때 의도적으로 ‘셰퍼드 음(Shepard Tone)’이라는 개념을 가져와서 긴장감을 끌어올렸다고 밝혔다. '셰퍼드 음(Shepard Tone)’은 스탠퍼드 대학교의 교수 로저 셰퍼드가 1964년에 발견한 일종의 착청현상이다. 착시 현상이 '눈의 착각'이라면 착정현상은 ‘귀의 착각’이라 볼 수 있다. 그 원리는 음들의 크기와 음역대의 균형을 맞추어 하나의 음이 끝나갈 때쯤 새로운 음역을 다시 반복함으로써 전체 음역이 반복되고 있음을 숨기는 것이다. 옥타브가 다르지만 음계가 같은 음 여러 개를 한 번에 담음으로써, 바로 직전에 있는 음과 연결되게 하여 반복을 숨기고 있다.
벽에서 총탄이 거꾸로 튀어나오면서 두 개의 시제(타임라인)이 교차하는 이미지를 다시 보자! 시제가 다른 존재가 한 프레임에 동시다발적으로 펼쳐진다. 쉽게 말해, 순행하는 장면과 역행하는 장면을 '다성음악'처럼 편집한 것이다. '다성음악'이란 둘 이상의 가락이 독립적으로 얽혀서 진행하는 음악, 두 개 이상의 선율을 독립적으로 활용하여 조화로운 음악을 만드는 작곡 기법이다. 놀란은 이 개념을 가져와 물체가 거꾸로 관통되고, 사람들이 시간을 거슬러 거꾸로 움직이는 듯 착시를 일으킨다. 우리는 시제를 구분하기가 어렵지만, 시청하고 있는 순간만큼은 현재임이 틀림없다. 놀란은 영화와 관객 각각의 현재를 새롭게 창조한다. 놀란은 이미 <덩케르크>에서 다성음악에서 영감을 받은 편집을 해봤었다.
먼저 편집이 너무 빠르고 시각 정보량이 너무 많다. 오페라하우스 시퀀스나 스탈스크 12 시퀀스는 너무 복잡하다. 예를 들면, 오페라하우스에서 테러리스트가 난입하고 테러 진압부대가 출동한다. 둘이서 작당하고 관객들을 전부 몰살하려고 든다. 그 틈에 주도자를 포함한 CIA가 개입하고 남몰래 인버전으로 주인공을 도우려 온 닐이 주도자를 구해준다. 러시아 마피아가 주도자를 납치한다. 등장인물과 사건이 한꺼번에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진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놀란이 물리적 압도감을 전달하기 위해 나머지를 포기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내러티브와 캐릭터를 본드 포뮬러로 대신한다. 그래서 캐릭터들(특히 주인공)에 대한 감정적인 공감을 느끼기가 힘든 이유이기도 하다.
주도자에 도움을 주는 영국의 정보 고위 관계자 크로스비(마이클 케인)는 정장 브랜드 브룩스 브라더스를 무시하며 최고급 정장을 권한다. 이것은 주도자가 제임스 본드임을 대놓고 알려주는 힌트다. 주도자, 미녀, 악당의 삼각관계는 <007 스펙터>에서의 본드, 본드걸, 블로펠드의 삼각구도와 정확히 일치한다. 미녀는 외아들을 지극히 사랑하는 어머니이고, 주도자와 성적 긴장이 배제되어 있을 뿐이다. 즉 섹스가 빠진 제임스 본드다. 그가 왜 세상을 구하려고 하는지를 놀란은 제임스 본드의 상징으로 대체한다. 차도 정장도 음식(캐비아)도 명품으로 도배하고, 자동차 추격전, 요트, 전 세계를 유람하는 공간적 배경 등의 요소도 007 영화에서 가져왔다.
007 악역들은 하나같이 세계정복이나 신세계의 신을 꿈꾸는 과대망상증 환자들이다. 악당인 사토르는 캣에게 ‘내가 가질 수 없다면 모두가 그래야 해!“라며 세상을 멸망시키려고 한다. 맬서스의 인구론을 들고 나온 타노스가 양반으로 보일 만큼 얼토 당치않은 편협한 이기적인 발상이다. <테넷>은 세계관에 대한 설명을 본드 포뮬러로 대충 퉁친다. 놀란은 ’왜 주인공은 캣을 부단히 살리려 하는가? 닐은 결말에서 왜 그런 선택을 하는가? 왜 주인공은 그런 방법으로 사건을 해결하는가? 왜 악당은 그런 방식으로 주인공에 대항하는가?‘같은 기본적인 질의에 답하지 않는다.
주도자와 악역 사토르가 기능적인 역할로 제한되어 있지만, 놀란은 2주간 벌어진 사건을 순차적으로 한 번, 역행으로 한 번 뒤집어서 상호 대칭시키며, 시간의 연속성을 파괴하며 정보량을 대폭 늘린다. <그래비티>, <1917>처럼 관객과 체험을 공유하고자 노력한다. 그럼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설명해보겠다.
‘일어난 일은 일어난다.’ <테넷>의 전반적인 플롯은 ‘시간의 역전’ 즉 인과관계를 뒤집었다. 영화는 주도자(존 데이비드 워싱턴)에게 2주 동안 일어난 일을 순차적으로 플롯을 짠 뒤, 관객에게 인비전을 체험시킨다.
<테넷>은 본드 포뮬러(공식)을 차용했다. ‘⓵프리 타이틀 액션 시퀀스(오페라하우스)―⓶영화 제목(텔넷)―⓷정보국장에게서 브리핑을 듣고 ⓸현지 조력자(프리야와 닐)에게서 단서를 제공받고 여러 나라를 추적하다가-⓹묘령의 여인(캣)을 만나고, ⓺악당(사토르)과의 대결하는 순서―⓻적의 비밀기지에서 벌이는 대규모 전투로 구성된다. 오페라하우스에서 프리 타이틀 액션 시퀀스를 선보이고, 제목이 뜨고, 초반 설명을 끝내고 프리포트 잠입 계획은 세우는 시점이 거의 영화 시작 후 30분 경이다. 그러다 1시간 30분쯤 되면 주인공이 본격적인 인버전 상태로 진입한다. 즉 사전 설명이 끝나면, 2시간짜리 영화인데 이걸 딱 반으로 접어 순행하던 주인공의 시간과 공간을 되짚어 올라간다.
프리포트에서 닐(로버트 패틴슨) 과의 대화, 탈린에서의 프리야(딤플 카파디아)와의 대화 등으로 상황을 정리해 주고, 다음 장소로 이동한다. 이처럼 놀란의 서사는 ’오페라극장-프리프트-스탈스크’ 구체적인 지명으로 수렴된다. 컷이 복잡하고, 여러 시간대의 동일 인물이 같은 시간대에 등장해서 어렵게 느껴질 뿐이지, 놀란은 ‘사건의 결과’를 항상 정리해 주고 그 사건의 결과에서 다음 사건의 결과로 이어지는 일직선으로 나아간다. 또한 <인셉션>에 토템이 있듯이 <테넷>에는 대량 살상무기 ‘알고리즘’이 물체로 등장시켜 이것이 환상이 아님을 확인시켜준다.
영화는 주인공이 겪는 경험을 차례차례 나열한 것에 불과하다. 주인공이 임무를 수행하려고 할수록 계속 좌절된다. 그 실패가 쌓이고 쌓여 주인공(과 관객)은 뒤늦게 깨달음을 얻는다. ‘이해하려 들지 마. 느껴’ 이것은 이해를 목적으로 하는 영화가 아니라 주인공의 실패담을 함께 공유하는 데에 주안점을 뒀다. 영화가 전달해 주는 주도자와 관객의 정보량이 동일하다. 남은 궁금증이 관람 후에 지적 유희를 자극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다수의 인물이 몰개성적이며 도구적으로 다뤄진다고 비판하는 견해는 성급한 감이 없지 않아있다. 주인공은 이미 주어진 증거들을 되짚어가는 과정에 투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놀란은 도우미를 배치하고,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면 힌트를 준다. 그럼 주인공은 증거를 얻고 다음 장소를 향해 움직인다. 서사의 여정이 주인공이 깨달아가는 과정일 뿐이다.
이 두 가지 방향을 잊지 않으면 영화를 따라가는 데 무리가 없다. <테넷>은 결과(일어나는 일)를 보여주며 관객을 이끈다. 과정을 이해하지 않고도 중요 포인트에 해당하는 사건들만 따라가면 보면 과정 전반을 이해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신곡>에서 베르길리우스가 길잡이로 지옥을 안내하듯 주도자(존 데이비스 워싱턴)의 행적을 따라가면 영화를 관람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시제 자체가 미스터리가 되고, 시차에서 스토리가 파생되는 시간의 퍼즐이 완성된다. 액션은 순차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암묵적인 룰을 깨며 진부한 아날로그 액션을 일대 개혁한다.
이런 불친절함을 보완하기 위해 ‘맥스웰의 악마’에서 따온 빨강과 파랑을 통해 순행과 역행을 상징한다. 역행할때는 산소마스크를 껴야한다는 시각적 차이로 보여준다. 그래도 주인공과 악당이 무미건조하다.
그래서조연들을 통해 사건으로 인해 성장하는 인물상을 제시한다. 캣은 아들을 구하고 자신을 괴롭히는 남편으로 벗어나기 위해 테넷을 돕는다. 또, 닐의 동기는 전혀 밝혀진 바가 없지만, 그는 주인공을 충실히 돕는다. 닐은 '프리포트 부러진 열쇠, BMW, 철장' 3번이나 문을 열어주고 '오페라하우스, 프리포트에서 주도자를 풀어주고, 철장 안에서 시체로 위장'해서 총 3번 구해준다.
주연들의 부족한 면을 채우기에는 미흡했다. 왜냐하면 배후세력의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미래 권력자들이 현재의 인류를 멸망시키려는 동기로 ‘기후변화’ 대사 한마디로는 관객들이 납득하기 어려웠다. 차라리 미래의 지구가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세계 대전이 발발했음을 시각적으로 보여줬다면 <테넷>의 이야기가 더 현실적으로 와닿았을 것이다. 예상컨데 해수면 상승과 기후변화가 벌어진다면 식량생산이 차지를 빚을 것이다. 인류는 분명 식량과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국가마다 이전투구를 벌일 것이다. 역사를 살펴봐도 식량이나 자원을 가진 쪽과 가지지 못한 쪽이 서로 입장이 크게 달랐기 때문이다. 덧붙여 미래 세력은 현재의 지구를 멸망시켜도 자기들의 미래의 지구는 안전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평행우주로 인식하건 영원주의적 시간관을 가진 것으로 추측된다.
놀란은 설정이나 세계관이 어려울수록 보편적인 동기로 이야기를 풀었다. <인셉션>의 아이들이나 <인터스텔라>의 딸처럼 가족주의에 호소해왔다. 주인공이 캣을 왜 구하려는지 이해할 수 없고, 미래 세력이 왜 현재의 지구를 멸하려는지 체감되지 않으니 <테넷>의 세계 멸망이 전혀 비장하지 않다. 캣의 멋진 다이빙이나 닐의 아름다운 작별 미소가 있었지만, 시청각의 충격과 동반되는 감동의 울림이 크지 않다. 그럼 왜 놀란은 이렇게 연출했을까?
<테넷>은 기존 시간 여행 영화의 메타를 혁신시킨다. 놀란은 '시간의 역설(타임 패러독스)'를 피하기 위해 3가지 아이디어를 건의한다. 첫째, 인버전 기술로 시간의 방향을 되돌리는 방법이고, 둘째, 같은 시간대에 다른 시간대의 여러 인물들을 동시에 존재하는 방식이며, 셋째, 자유의지와 결정론을 공존시킨 것이다.
첫째, 기존의 시간 여행 영화는 ‘연도’를 입력하면 원하는 시대로 곧바로 도달할 수 있다는 점프형 시간 여행이었으나 <테넷>은 엔트로피를 감소시키는 ‘맥스웰의 악마’에 기초한 인버전 기술을 제시한다. 인버전은 회전문을 타고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반대편에 도달한다. 만약 1년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인버전을 통해 1년 동안 시간을 거슬러야 작년으로 돌아갈 수 있다. 시간이 거꾸로 1년 동안 흘러야 작년이 된다는 시간 지속형 시간 여행이다.
둘째, 같은 시간대에 다른 시간대의 여러 인물들을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프리토프 장면에서 주인공 셋이 나오듯이 스탈스크 12에서 닐은 세 번 나온다. 이것이 암시된 장면이 있다. 캣이 고야의 원본과 2개의 위작을 감별하지 못했듯 관객도 주인공과 위작들을 구별하지 못한다. 위작인지 진본인지 아는 것은 아레포만 가능하듯 주인공 역시 자기가 위작을 만들어내고 나서야 진실을 깨닫는다.
모든 사건의 시작이자 대단원인 스탈스크-12에서 레드팀과 블루팀이 협공 작전을 수행한다. 시간의 순방향대로 가는 레드팀과 시간의 역방향으로 공략 중인 블루 팀의 액션을 하나의 프레임 안에 담아낸다.
그래서 시간 순행하는 사람의 시점에서 시간 역행의 사람이 거꾸로 걷는 것처럼 보이고, 반대로 시간 역행의 사람의 시점에서 시간 순행의 사람이 거꾸로 걷는 것처럼 보인다는 설정이 혼란을 가중시킨다. 작전을 책임지는 팀 리더 아이브스(에런 테일러 존슨)은 협공 작전을 브리핑한다. 이때, 작전의 당위, 개요, 동선을 묻는 팀원에게 ‘멍청한 질문 더 있냐?"라며 일축한다. 놀란 감독은 물리적인 압도감에만 치중한다.
스탈스크 12 작전 시퀀스는 빠른 컷 편집보다 설정 숏 등 이른바 이야기 전개 과정을 전달하는 브리지 숏이 생략되어 난감하다. 거기다가 정방향 숏과 역방향 숏들이 한 프레임 안에서 어지럽게 섞는다. 그리고 과거와 현재의 영역 일부를 파괴한다. 이렇게 동선의 방향과 충돌을 한 번에 판별하기에 시각 정보량이 지나치게 많다. 놀란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 이상의 체험에 집중한다. 왜냐하면, 시제가 혼재된 시각적 스펙터클, 아날로그적 세트의 질감, 반복 관람을 요구하는 지적인 유희를 제공하기 위함이다.
한 가지 의문점은 과거와 현재의 인물이 실제로 마주 보면 어떻게 되느냐다. 작중 휠러가 일러주는 접촉을 막는 방법으로 방호복을 두를 것을 추천한다. 자기 자신과 접촉하면 즉시 소멸한다는 설정이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물질(+)과 반물질(-)이 만나면 0이 된다는 것이다.
셋째, 자유의지와 결정론을 공존시킨 것이다. 캣이 요트에서 미래에서 인버전한 사토르를 제거한 것은 작전 계획과 무관하게 단행한 그녀의 독립된 판단이었다. 이때, 그 시점에 살고 있는 캣은 남편의 실종과 다이빙을 목격한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면서도 예정과 다른 일이 동시에 일어났다. ‘운명인가 아니 현실인가‘ 대사에서 알 수 있듯이 자유의지가 운명론(결정론)과 상충하는 것으로 오인하기 쉽지만, 놀란은 놀랍게도 공존시킨다.
★★★☆ (3.5/5.0)
Good : 시간 여행 영화의 창조적 파괴!
Caution : 동선을 이해하려 들면 주화입마를 얻는다.
■놀란의 최근 인터뷰에서 사토르가“기후 변화가 인류에 큰 위협이 될 거”라는 대사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확실히 인류 전체를 위협할 수 있는 아포칼립스를 다룰 때 우리의 존재에 가장 큰 위협이 되는 게‘오늘’이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원자력 발전소, 핵무기 경쟁 등을 소재로 한 007 영화가 1960년대에 제작됐을 때 핵의 위험성이 경고처럼 제기되지 않았나. 이처럼 오늘날 우리가 지구에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떻게 그것이 우리 생활에 위협이 되는지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걱정해야 한다."라고 답했다.
그리고 “최근 당신의 관심사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놀란은“<테넷>에 핵의 위험성과 기후 위기 문제가 포함되어 있는데 그것이 우리가 직면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무 깊게 생각하지 않고, 일차원적으로 생각나는 대로 시나리오를 썼다. <인터스텔라>에서도 기후 위기를 다뤘는데 영화에서 만 박사가 “우리는 잘 돌보면서 후손들이 처할 문제에는 공감하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나. 윤리적 측면에서 이 질문에 흥미를 느낀다. 그래서 계속 이 문제를 고민하고 있다. 행성을 놓고 후손들과 갈등을 빚는 세대의 이야기. 끔찍한 방향으로 흘러가긴 하지만 점점 이해도가 높아지는 문제다.“라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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