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slie Cheung Movies 10
요즘 <장국영 영화 5편 기획전>도 하길래 이번 포스팅을 준비했다. 장국영(張國榮)은 지난 2005년에 ‘중국영화 100주년 기념 가장 사랑받은 남자배우’ 1위로 선정되었다. 그는 1956년 홍콩의 부유한 양복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말런 브랜도, 앨프리드 히치콕 등 할리우드 거물의 옷을 직접 만들 만큼 유명했다. 부유한 가문에 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지만 부모는 그가 어렸을 때 이혼했다. 사업으로 바쁜 아버지는 집안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장국영은 바로 위 형제와도 여덟 살이나 차이가 났다. 외할머니 손에서 자란 장국영은 부모와 제대로 교감할 기회가 없었다. 형제들과 어울리지 못했고, 학교에도 제대로 적응 못했다.
중학교를 마치고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타향살이에 외로웠던 그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보고 영어 이름을 ‘레슬리 청(Leslie Cheung)’으로 정한다. 그는 주말이면 친척이 운영하는 바닷가 식당에 가서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불렀다. 영국 리즈 대학 섬유관리학과를 졸업하고 홍콩에 돌아왔다.
지난 1977년 홍콩 ATV가 주최한 아시아가요제에서 2위로 입상하며 가요계에 데뷔했으나 인기를 끌지 못하자 방향을 바꿔 1978년 영화《홍루춘상춘》으로 데뷔했다. 무명시절은 길었고 같은 화성레코드 소속의 매염방과 진숙분과 함께 밤낮없이 행사를 뛰었다고 한다. 매염방과 진숙분이 회고하기를 소속사에서 마구잡이로 스케줄을 잡은 덕분에 비행기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았고, 고소공포증이 있던 장국영은 국경을 넘나드는 그러한 스케줄을 더욱더 힘들어했다고 한다. 매염방은 그런 그를 위해 비행기 의자 밑에서는 자신이 자고, 장국영은 의자 위에서 자는 배려를 했고, 장국영은 어둠과 혼자 있는 것을 무서워하는 매염방을 위해 방 두 개가 뚫린 방을 예약하곤 스탠드를 약하게 켜서 그녀를 배려했다고 한다. 이렇게 밤낮으로 힘든 일정을 열심히 소화한 결과가 누적되어 홍보도 되고 실력 또한 높이게 된 것이다. 이후의 음반 《풍계속취(1983)》와 《MONICA(1984)》로 성공했다. 가수로써 입지를 굳힌 그는 훗날 《금지옥엽(1994)》과 《야반가성(1994)》 등의 영화에서 직접 주제가를 부르기도 했다.
장국영은 누아르 영화인 《영웅본색》으로 이름을 알렸고 왕조현과 함께 주연을 맡았던 《천녀유혼》으로 장국영 신드롬을 일으켰다. 그는 투유 초콜릿 등 국내 CF의 모델로도 활동했으며 국내에서 수차례 콘서트를 갖기도 했다. 1993년에는 경극을 소재로 한 첸 카이거 감독의 《패왕별희》가 칸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차지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는 동경가요제에 참가했을 당시 천안문 사태에 대해 언급한 것이 물의를 빚자, 1990년 정식으로 은퇴를 선언한다. 10대 소녀팬들이 자살소동을 일으키는 등, 떠들썩한 은퇴식을 치른 장국영은 캐나다 밴쿠버로 이주했지만 2년 뒤인 1992년 《가유희사》로 영화계에 복귀했고 1995년 《총애장국영》으로 가수 생활도 재개했다. 그러나 매혹적인 연기와 수려한 외모로 관객들의 가슴속에 깊이 자리해왔던 그는 2003년 4월 1일 만우절에 거짓말 같이 세상을 떠났다.
장국영은 <아비정전(1990)>년 이후로 ‘사연 많은 나쁜 남자’에 특화된 배우다. 그 이미지를 반복하지만, 이 멜로영화는 애틋하다. 결혼을 앞두고 사망한 옛 연인을 하루 동안 재회하는 <성월동화>는 제목 그대로 별과 달이 빛나는 밤에 나누는 키스 장면은 지금 봐도 아름답고 애절하다. 반드시 3분가량 추가된 무삭제판으로 감상하시길 권한다.
장국영의 첫 번째 은퇴작, 오우삼의 숨은 코미디 재능과 자신이 세운 홍콩 누아르의 유연한 결합을 시도한 작품이다. 비엔나 왈츠 선율의 휠체어 댄스 장면으로 대표되는 오우삼의 다른 영화에서 볼 수 없는 여유와 90년대 특유의 낭만, 충만한 로맨스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다.
장국영만큼 상실로 인한 고통과 슬픔을 가슴 저리게 표현할 배우가 있을까 싶다. 청순미를 자랑하는 오천련과의 케미는 <로미오와 줄리엣>와 <오페라의 유령>을 반반 섞은 스토리를 윤활유처럼 매끄럽게 한다. 그리고 사운드트랙이 좋은데 주제가를 작곡한 장국영 특유의 무심한 창법이 오히려 수묵화의 먹물처럼 우리의 마음을 먹먹하게 물들인다.
<영웅본색>은 오우삼이 스승 장철 감독의 남성적 로망과 우상 장 피에르 멜빌 감독의 세련된 누아르 감성이 한데 녹아냈다. 오우삼은 <영웅본색 2>에서 좀 더 공상적이고 환상적인 총격장면을 치밀하게 설계한다.
총격전 속에서 영화의 정서를 관통하는 것은 역시 장국영이 죽어가며 갓 태어난 딸의 이름을 짓는 장면일 것이다. 이때 흘러나오는 주제가 <분향미래일자>로 전달되는 그 정서는 자유로우면서 유희적이고 탐미적이다. 이것이 홍콩 누아르가 품고 있는 로망일 것이다.
<백발마녀전>은 기본적으로 무협영화이지만 코미디와 로맨스, 판타지를 모두 품고 있다. 온갖 장르들이 콜라주처럼 붙어 있으면서도, 별로 어색하지 않은 이유는 아마 이 이야기가 ‘전설’(傳說)이라는 형식 안에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끊임없이 현실을 상기시킨다. 영화는 주인공에게 신흥세력 청을 섬길 것인지 아니면 적통인 명을 재건할 것인지 계속 묻는다.
‘무인’과 ‘요녀’은 서로를 사랑하기에 속세를 등지려고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서로를 온전하게 만든 정체성을 선택하도록 내몰린다. 그렇게 완성된 파괴적인 결말은 그들의 세계에서 일어날 법하다면 점에서 매우 현실적이며 동시에 전설적이다. 자신다운 선택을 해보려 노력했으나 끝내 실패했고 인간의 서툰 감정 때문에 벌어진 장엄한 파국이 가슴 아팠기 때문이다.
오늘날 중국 무협 판타지는 상상력이 고갈된 것 같다. 그런데 이 고전은 샘 레이미와 장 콕토, 조르주 멜리에스와 팀 버튼을 섞어놓은 듯 여전히 반짝반짝한다. 유령이야기인 동시에 러브스토리이고, 무협과 마법에다 코미디까지 동원됐다.
장르가 복합적인 만큼 이야기는 포송령의 원작 <요재지이>을 보다 간결하게 다듬었다. 이것이 신의 한 수가 됐다. 현실세계에 기반한 로맨스와 차별화되는 순수함과 단순함이 때로 엉성한 스토리를 눈감아줄 만큼 호소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국영은 상대역을 빛나게 해주는 리액션의 달인이다. 그래서일까? 《천녀유혼》에서 왕조현과 물속에서 키스를 하던 장면은 홍콩 영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키스 씬으로 뽑히기도 했다.
왕가위 감독은 ‘고(故) 장국영에게 바치는 영화’라고 밝히며 15년 전의 작품을 복원하고 재편집했다. 영화의 끝과 시작을 그의 얼굴로 마무리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왕가위가 영화적 동지인 장국영에게 선물을 보낸 셈이다.
중국 현지에 로케이션 된 최초의 홍콩영화답게 촬영 기간의 난항으로 악명이 자자하다. 그렇게 고생 끝에 촬영된 사막 장면들은 ‘시간의 재’(Ashes of Time)라는 영어 제목에 충실한 느낌이다. 심상을 이미지화한 황량한 사막에서 이제 형수가 되어버린 옛 연인의 마음을 받아주지 못하는 장국영의 애절한 눈빛이 압권이다.
칸 영화제 감독상
만나고, 다투고, 헤어지고, 사랑하는 아주 심플한 스토리 속에 인간과 소통 그리고 시대상까지 녹여냈다. 왕가위에 따르면 보영은 비행기 같은 사람이고, 아휘는 공항 같은 사람이다. 사랑에 있어 약자는 더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양조위가 스토리를 주도하지만, 사건을 촉발하는 촉매제는 장국영이 맡고 있다. 두 사람은 사랑을 하면서도 고독한 왕가위식 캐릭터의 전형을 보여준다. 아휘 역의 양조위는 하염없이 누군가를 지고지순하게 기다리고 애틋하게 그리워한다. 반대로 보영 역의 장국영은 상처받은 기억을 지우지 못해 이성을 사귈 때면 자신이 먼저 떠난다. 그러다 불쑥 찾아온다. 언뜻 보면 <아비정전>의 아비와 비슷해 보인다.
장국영은 <아비정전>처럼 사랑하는 사람에게 늘 상처만 주는 자유로운 영혼을 연기하지만 결이 다르다. <아비정전>은 외롭고 쓸쓸한 공허함으로 관객을 설득했다면 <해피 투게더>에서는 겉으로는 나른해 보이지만, 언제라도 부서질 만큼 위태위태함을 연기한다. 이것이 그가 연애의 주도권을 놓고 벌이는 시소게임에서 승자가 되었음에도 곧장 승리로 이어지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패왕과 우희의 이별’(覇王別姬)이라는 제목대로 <패왕별희>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성장한 두지와 시투, 두 남자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엇갈리는 인생을 그린 이야기다. 두지와 시투는 경극이라는 예술형식 안에서는 우희와 초패왕으로 사랑을 나누지만, 현실로 나오게 되면 둘의 마음을 일치 않는다. 이 비극 속에 두지는 연적인 주산을 마냥 미워할 수 없다. 주샨은 사실상 자신을 버린 어머니와 같은 처지다. 극 중에서 (약에 취해) 주샨을 엄마라고 부르는 장면이 등장할 정도로 묘한 삼각관계를 이룬다. 이를 통해 영화는 역사의 소용돌이 안에서 예술의 존재의의를 탐구한다.
원래 두지 역에 존 론을 염두에 두고 있던 첸카이거 감독을 처음 만난 날, 장국영은 “나는 두지에 적격이다. 내 안에는 남성성과 여성성이 공존하고 있다. 나 자신이 바로 두지다”라고 설득했다고 한다. 이는 평소 인터뷰에서 “예술가는 항상 남성성과 여성성을 모두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술은 남성도 여성도 아니기 때문”이라고 강조한 것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어린 시절 장국영이 아버지로부터 제대로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성장한 것도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른 채 어머니에게 처절하게 버림받은 두지와 닮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섬세한 연기가 발휘된 배경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당시 천안문 사태를 비판했던 장국영이 죽고 난 후 첸 카이거가 중국에서 영화인으로 살아남기 위해 중국공산당의 선전영화인 <건국대업>을 찍고 있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안타깝다.
장국영 필모그래피의 분기점, <아비정전>을 통해 그를 스타덤에 올려준 <영웅본색>의 모범생이나 백면서생 같은 <천녀유혼>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 변신을 감행한다. 짧은 만남을 가진 뒤 여자를 갈아치우는 바람둥이 역을 소화한다. 아비가 길게 사랑을 지속하지 못하는 나름의 사연이 있다. 친어머니에게 버림받은 기억을 지우지 못해 이성을 사귈 때면 자신이 먼저 떠난다. 또, 자신을 입양한 양어머니 역시 여러 남자를 전전하는 까닭에 아비의 분노를 부른다.
‘권태’라고 여겼던 것이 사실은 ‘상처’였다는 설정은 〈아비정전〉이 만들어지던 당시의 홍콩이라는 국가의 지정학이 깊이 반영된 결과다. 1997년 영국 반환을 앞둔 홍콩 주민들의 심정이라는 것은 아비처럼 한 여자에게서 오랫동안 머물지 못하는 불안감 또는 소려진처럼 떠난 연인을 그리워하며 갖는 향수 어린 감정일 것이다. 그래서 왕가위는 발이 없어 지상에 닿지 못하고 계속해서 어딘가로 날아가야 하는 ‘발 없는 새’의 사연을 극 중 아비의 입을 통해 수시로 노출하는 등 당시 홍콩 주민이 처한 상황과 심리를 은유함으로써 주제를 드러낸다.
그런데 장국영의 고독은 영화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아비는 나와 가장 많이 닮은 인물이다. 강한 척하면서도 여리고, 마음 가득 차오른 사랑을 드러내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또 종종 "나는 즐거운 사람이 아니다 “라며 수많은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어도 외로움을 호소했다. 특히 유서에서 ‘感情所困 無心戀愛世(마음이 피곤해 세상을 사랑할 마음이 없다.)’라는 문구가 이 캐릭터가 장국영을 가장 잘 설명하는 역할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Copyright(C) All Rights Reserved By 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