첩보물(Spy Films)이나 에스피오나지(Espionage) 장르의 태동과 이후의 흐름을 간략히 정리해보겠습니다. 프리츠 랑과 알프레드 히치콕부터 제임스 본드, 존 르 카레, 스티븐 스필버그, 제이슨 본에 이르기까지 에스피오나지 장르의 양식(컨벤션)을 쌓아왔습니다. 그 발전상을 짚어보기 위해 첩보 영화의 경계선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는 작품들을 이 목록에 포함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첩보영화는 3가지 시기로 구분 짓을 수 있습니다. 40년대 나치 스파이 스릴러, 60년대 본드 영화, 오늘날 국제무대를 배경으로 한 블록버스터로 크게 나눕니다.
#30 : 007 위기일발 (From Russia With Love·1964) 테렌스 영
안티테제는 테제가 먼저 존재해야 성립할 수 있는 개념이다. 본 시리즈와 미션 임파서블 시리즈도 이 작품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단적인 예로 로버트 러들럼의 소설이 이언 플레밍의 영향아래에 있고, <본 얼티메이텀>도 <007 리빙 데이라이트 (1987)>을 레퍼런스했다.
#29 : 제3의 사나이 (The Third Man·1949) 캐럴 리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아카데미 촬영상
영국 MI6(비밀정보부) 출신 작가 그레이엄 그린이 쓴 소설은 전후 연합국이 공동 통치하던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제작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 필름 누아르를 '첩보영화'냐고 되묻지만, 캘러웨이 소령(트레버 하워드)은 의심할 여지없이 정보 장교이다. 그가 하려는 일은 분명히 첩보활동이다. 그를 통해 패전국에서의 혼란과 생필품 부족, 만연한 범죄와 같은 불가항력 앞에서 개인이 느끼는 부당함을 깊이 탐구한다.
이것은 수많은 스파이들이 겪는 내적 갈등의 양태이다. 이 지점부터 정치 스릴러, 고딕 미스터리, 이중성, 살인, 수사, 감시체제, 기묘한 로맨스가 줄줄이 생산된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 쓰인 아이디어는 훗날 ‘에스피나지(Espionage) 장르’의 토대가 되었다.
#28 : 뮌헨 (Munich·2005) 스티븐 스필버그
1972년 팔레스타인의 무장 조직인 ‘검은 9월단’이 벌인 뮌헨올림픽 참사와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의 보복(신의 분노 작전)을 다루고 있다. 이 작전을 수행하는 모사드 요원 아브너(에릭 바나)와 그의 팀은 복수의 정당성에 대한 혼란에 사로잡힌다.
<뮌헨>의 미덕은 끝없는 폭력의 순환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불안감을 주시한다는 점이다.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와 모사드 요원의 마음이 다르지 않으며, 보복이 계속되는 한 누구도 복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불편한 진실을 전달한다. 이것은 유태인인 스필버그의 처절한 자기반성이 담겨있다. 시오니스트들이 오늘날 팔레스타인에게 나치와 똑같은 인종청소를 자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27 : 이스턴 프라미스 (Eastern Promises·2007)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는 극단적인 신체변형을 선보인 <비디오드롬(1983)>, <플라이(1986)>로 신체를 기계론적으로 바라봤다. 바디 호러의 대가가 만든 스파이 스릴러는 역시 비범하고, 독보적인 위치를 점했다.
영화사에 길이 남을 화제의 명장면, 일명 ‘욕탕 결투씬’을 포함해 그 극단적인 잔인함은 로저 에버트 말마따나 ‘앞으로 나올 폭력묘사의 귀감’이 됐고, 실제로도 <드라이브(2011)>, <드레드(2012)>, <리벤지(2017)>, <맨디(2018)>, <업그레이드(2018)>, <밤이 온다(2018)>등의 계보로 이어져 내려왔다.
#26 : 붉은 10월 (The Hunt For Red October·1990) 존 맥티어난
아카데미 음향편집상
잭 라이언 시리즈 중에 이 영화가 최고작인 것 같다. 원작자 톰 클랜시는 1975년 소련 해군 소속 프리깃 ‘스코로제보이(Сторожевой)’에서 있었던 ‘발레리 사블린의 선상 반란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한다.
#25 : 블랙북 (Zwartboek·2006) 폴 버호벤
2차 대전 당시 네덜란드 점령 본부가 있던 헤이그에서 자란 폴 버호벤(파울 페르후번)은 “전투와 폭격, 폐허와 수류탄, 시체와 비행기가 화염에 휩싸여 내려가는 모습을 목격하는 것이 일상이었다.”라고 회고한다.
속도감 넘치는 2차 대전 레지스탕스 스릴러는 '여성 스파이'가 전쟁이라는 극단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벌인 인간의 추악한 본성을 까발린다. 레지스탕스, 유태인이라는 전통적인 피해자 캐릭터들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선악 구조로 나누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의 탐욕으로 점철된 과거사는 흑백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24 : 맨츄리안 켄디데이트 (The Manchurian Candidate·1962) 존 프랭컨하이머
제목 그대로 ‘기관에 의해 세뇌당한 일반인’ 이야기는 꽤 의미심장하다. 수많은 2차 대전과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이 <내 생애 최고의 해>나 <귀향>과 달리 사회에의 적응에 실패했다. 리처드 콘돈은 당시 만연했던 퇴역병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PTSD)와 매카시즘을 통해 불안과 공포를 국민들에게 심어줘서 정권을 유지하려는 정치행태를 묶어 소설로 썼다.
영화는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는 세력의 정체를 정확히 알려주지 않는다. 더욱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통해 주인공의 어머니 즉 누구나 적이 될 수 있다는 냉전 시대의 감각으로 영화를 채운다. 또한 진실을 파헤치는 베넷 대위는 필름 누아르에 자주 등장하는 ‘사립 탐정’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며 두 장르 간에 밀접한 연관성을 드러낸다.
#23 : 아르고 (Argo·2012) 벤 애플렉
아카데미 작품·각색·편집상
1979년에 이란 주재 미국 대사관 직원 6명이 캐나다 대사관으로 피신했다. CIA가 벌인 '캐나다 대사관 구출 작전(Operation Canadian Caper)'의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일반적인 첩보 스릴러와 달리 시각적인 볼거리나 과장된 묘사가 일절 없으며, CIA 요원을 할리우드 제작진으로 위장하는 스토리도 매우 직선적이고 간단명료하다.
<아르고>의 비범함은 영화 제작과 현실 세계의 첩보행위를 동일하게 취급한다는 점이다. 벤 애플렉은 둘 다 허구의 이야기라는 공통점을 십분 활용하여 이란 혁명정부도 속이고, 보는 관객도 속인다.
#22 : 39계단 (The 39 Steps·1935) 알프레드 히치콕
누명을 쓴 채 쫓기는 남자, 예측 불가능한 여정, 매혹적이지만 위험한 미모의 여인. 오늘날 스파이 영화의 클리셰로 자리 잡은 이 영화적 장치들은 알프레드 히치콕이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 <39계단>은 어떤 작품일까? 그의 개성이 최초로 확립된 이 걸작은 훗날 스릴러가 가져야 할 핵심성분을 밝히고 있다. 그는 <나는 비밀을 알고 있다>, <사보타주>, <사라진 여인>, <파괴 공작원>, <비밀 공작원> 등에서 일련의 실험을 끝마친 스파이물의 플롯에 따라 두 남녀 주인공이 영국 군사기밀을 풀 수 있는 암호‘39계단’의 의미를 밝히려 한다. 히치콕은 액션과 추격 장면 사이사이에 러브스토리를 위트 있게 처리하다가도 단숨에 주의를 집중시키는 서스펜스로 지루할 구석이 원천 봉쇄한다.
히치콕은 2차 대전이 끝난 이후에는 <오명>,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을, 냉전이 한창 뜨거울 때는 <찢어진 커튼>, <토파즈> 등 히치콕은 시대와 장르를 넘나들며 첩보영화의 다양한 가능성을 탐구한 선지자로 오늘날에 기억되고 있다.
#21 : 007 카지노 로얄 (Casino Royale·2006) 마틴 캠벨
<007 카지노 로얄>에 대한 오해를 풀어보자, 이 영화의 액션은 전통적인 시리즈와 상당히 유사점이 있다. 본 액션 스타일과 흡사한 작품은 <007 퀸텀 오브 솔라스>이다. 그리고 캐릭터적인 특성도 다르다. 애초에 자기 조직에서 배신당한 제이슨 본과 달리 상관M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지만, 정규직 공무원 신분인 제임스 본드는 당연하게도 처한 입장이 다르다. 기존 시리즈의 해묵은 설정이나 부정적인 면들을 제거했을 뿐이다.
본 시리즈에게서 배운 교훈은 ‘고뇌하는 인간상’이다. 중반부부터 60년대 프랑스영화처럼 인물의 내면에 집중한다. 베스퍼에 대한 사적 감정과 007의 공적인 지위 사이의 내적 갈등에 온전히 투자된다. 다니엘 크레이크가 출연한 속편에도 반영된다. <007 퀀텀 오브 솔러스>와 <007 스카이폴>에서 바람둥이 본드가 연애를 하지 않는다. 첫사랑이 남긴 상처가 컸기 때문이다. <007 스펙터>에 이르러서야 그와 베스퍼를 불행으로 몰아넣은 진범이 ‘스펙터’임을 확인하고서야 새로운 사랑을 받아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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