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ST 100 Spy & Secret Agent Films
첩보물(Spy Films)이나 에스피오나지(Espionage) 장르의 태동과 이후의 흐름을 간략히 정리해보겠습니다. 프리츠 랑과 알프레드 히치콕부터 제임스 본드, 존 르 카레, 스티븐 스필버그, 제이슨 본에 이르기까지 에스피오나지 장르의 양식(컨벤션)을 쌓아왔습니다. 그 발전상을 짚어보기 위해 첩보 영화의 경계선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는 작품들을 이 목록에 포함시키려고 노력했습니다. 첩보영화는 3가지 시기로 구분 짓을 수 있습니다. 40년대 나치 스파이 스릴러, 60년대 본드 영화, 오늘날 국제무대를 배경으로 한 블록버스터로 크게 나눕니다.
<007 카지노 로얄>에 대한 오해를 풀어보자, 이 영화의 액션은 전통적인 시리즈와 상당히 유사점이 있다. 본 액션 스타일과 흡사한 작품은 <007 퀸텀 오브 솔라스>이다. 그리고 캐릭터적인 특성도 다르다. 애초에 자기 조직에서 배신당한 제이슨 본과 달리 상관M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지만, 정규직 공무원 신분인 제임스 본드는 당연하게도 처한 입장이 다르다. 기존 시리즈의 해묵은 설정이나 부정적인 면들을 제거했을 뿐이다.
본 시리즈에게서 배운 교훈은 ‘고뇌하는 인간상’이다. 중반부부터 60년대 프랑스영화처럼 인물의 내면에 집중한다. 베스퍼에 대한 사적 감정과 007의 공적인 지위 사이의 내적 갈등에 온전히 투자된다. 다니엘 크레이크가 출연한 속편에도 반영된다. <007 퀀텀 오브 솔러스>와 <007 스카이폴>에서 바람둥이 본드가 연애를 하지 않는다. 첫사랑이 남긴 상처가 컸기 때문이다. <007 스펙터>에 이르러서야 그와 베스퍼를 불행으로 몰아넣은 진범이 ‘스펙터’임을 확인하고서야 새로운 사랑을 받아들인다.
존 르 카레는 냉전시대 유럽을 무대로 활동하던 스파이들의 냉혹한 세계를 사실적인 필치로 그려내며 이언 플레밍이 창조해낸 환상적인 스파이 세계에 머물러 있던 독자들을 현실 세계로 데려온 작가다.
탈냉전이 도래하며 자연스레 그의 관심사는 이제 미국으로 대변되는 강대국의 패권주의에 주목한다. 이 영화는 제목대로 ‘1급 지명수배자’을 놓고 각 정보기관들의 이해충돌과 경쟁이 벌어진다. 이 와중에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은 최악을 차악으로 바꾸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로버트 레드포드는 첩보영화의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이름이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편집증적인 포스트 워터게이트 정치 스릴러의 상징이 되었다. 전미 출판사 학회로 위장한 사무실에서 활자매체를 분석하는 가상의 CIA조직을 다루고 있다. 원작자 제임스 그레이디의 상상이었지만, 구소련 붕괴 후 해제된 기밀문서를 통해 KGB가 소설의 첩보 작전을 그대로 모방한 사실이 밝혀져 <코드 네임 콘돌>이 재조명되었다.
이 영화는 거대 국가 권력에 매몰되는 무고한 시민의 존엄성을 다루고 있다. 조직의 함정에 빠진 남자가 자신을 둘러싼 음모에 접근해간다는 이 영화의 내용은 이후 수많은 첩보영화들을 통해 변주되었다. 바로 <본 3부작>,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 <완다 비전>, <팔콘 앤 윈터 솔저> 등의 작품에서 그 뿌리를 읽을 수 있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는 극단적인 신체변형을 선보인 <비디오드롬(1983)>, <플라이(1986)>로 신체를 기계론적으로 바라봤다. 바디 호러의 대가가 만든 스파이 스릴러는 역시 비범하고, 독보적인 위치를 점했다.
영화사에 길이 남을 화제의 명장면, 일명 ‘욕탕 결투씬’을 포함해 그 극단적인 잔인함은 로저 에버트 말마따나 ‘앞으로 나올 폭력묘사의 귀감’이 됐고, 실제로도 <드라이브(2011)>, <드레드(2012)>, <리벤지(2017)>, <맨디(2018)>, <업그레이드(2018)>, <밤이 온다(2018)>등의 계보로 이어져 내려왔다.
1972년 팔레스타인의 무장 조직인 ‘검은 9월단’이 벌인 뮌헨올림픽 참사와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의 보복(신의 분노 작전)을 다루고 있다. 이 작전을 수행하는 모사드 요원 아브너(에릭 바나)와 그의 팀은 복수의 정당성에 대한 혼란에 사로잡힌다.
<뮌헨>의 미덕은 끝없는 폭력의 순환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불안감을 주시한다는 점이다.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와 모사드 요원의 마음이 다르지 않으며, 보복이 계속되는 한 누구도 복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불편한 진실을 전달한다. 이것은 유태인인 스필버그의 처절한 자기반성이 담겨있다. 시오니스트들이 오늘날 팔레스타인에게 나치와 똑같은 인종청소를 자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2차 대전 당시 네덜란드 점령 본부가 있던 헤이그에서 자란 폴 버호벤(파울 페르후번)은 “전투와 폭격, 폐허와 수류탄, 시체와 비행기가 화염에 휩싸여 내려가는 모습을 목격하는 것이 일상이었다.”라고 회고한다.
속도감 넘치는 2차 대전 레지스탕스 스릴러는 '여성 스파이'가 전쟁이라는 극단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벌인 인간의 추악한 본성을 까발린다. 레지스탕스, 유태인이라는 전통적인 피해자 캐릭터들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선악 구조로 나누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의 탐욕으로 점철된 과거사는 흑백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카데미 작품·각색·편집상
1979년에 이란 주재 미국 대사관 직원 6명이 캐나다 대사관으로 피신했다. CIA가 벌인 '캐나다 대사관 구출 작전(Operation Canadian Caper)'의 실화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일반적인 첩보 스릴러와 달리 시각적인 볼거리나 과장된 묘사가 일절 없으며, CIA 요원을 할리우드 제작진으로 위장하는 스토리도 매우 직선적이고 간단명료하다.
<아르고>의 비범함은 영화 제작과 현실 세계의 첩보행위를 동일하게 취급한다는 점이다. 벤 애플렉은 둘 다 허구의 이야기라는 공통점을 십분 활용하여 이란 혁명정부도 속이고, 보는 관객도 속인다.
코엔 형제의 코미디가 영리한 까닭은 장르에 경의를 표하면서도 장르의 허점을 교묘하게 파고든다는 점이다. 편집증을 내세운 전형적인 첩보 스릴러처럼 촬영되고 편집되었음에도 스파이 장르를 익살스럽게 해체했다.
오스본 콕스(존 말코비치)라는 CIA 요원이 알코올 중독으로 좌천되기 전에 그만둔다. 앙심을 품은 그는 옛 동료를 골탕 먹일 회고록을 써서 CD에 담아둔다. 랭들리 CIA 본부 근처의 피트니스에서 근무하는 민간인들이 CD을 CIA의 일급 기밀로 착각하는 바람에 사단이 벌어진다. 도대체 피트니스와 CIA가 무슨 상관인가? 등장인물들은 배우자에게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다른 이성과의 불륜을 꿈꾸거나 행하고 있고 그와 동시에 이혼 기회를 노린다. 민간인 각자에게 국가기밀보다 훨씬 중요한 일급비밀이며, 배우자가 눈치챌 수 없도록 꽁꽁 숨겨 놔야 하는 극비사항이다. 자신의 비밀을 보존하고 남의 비밀을 캐내는 게 첩보원이라면 이들도 다를 바 없다는 입장이다.
누명을 쓴 채 쫓기는 남자, 예측 불가능한 여정, 매혹적이지만 위험한 미모의 여인. 오늘날 스파이 영화의 클리셰로 자리 잡은 이 영화적 장치들은 알프레드 히치콕이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 <39계단>은 어떤 작품일까? 그의 개성이 최초로 확립된 이 걸작은 훗날 스릴러가 가져야 할 핵심성분을 밝히고 있다. 그는 <나는 비밀을 알고 있다>, <사보타주>, <사라진 여인>, <파괴 공작원>, <비밀 공작원> 등에서 일련의 실험을 끝마친 스파이물의 플롯에 따라 두 남녀 주인공이 영국 군사기밀을 풀 수 있는 암호‘39계단’의 의미를 밝히려 한다. 히치콕은 액션과 추격 장면 사이사이에 러브스토리를 위트 있게 처리하다가도 단숨에 주의를 집중시키는 서스펜스로 지루할 구석이 원천 봉쇄한다.
히치콕은 2차 대전이 끝난 이후에는 <오명>,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을, 냉전이 한창 뜨거울 때는 <찢어진 커튼>, <토파즈> 등 히치콕은 시대와 장르를 넘나들며 첩보영화의 다양한 가능성을 탐구한 선지자로 오늘날에 기억되고 있다.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주인공이 처음 항일 운동에 뛰어들때는 매국노를 처단하기 위해했던 숭고한 애국심으로 가득하다. 본격적인 로맨스가 전개되는 중반부터 급변한다. 미인계에서 출발한 살의가 사적인 욕망으로 변해가는 주인공의 심리적 혼란이 고스란히 스크린 밖으로 전달된다. 이것은 젠더 정치학에 대한 놀라운 고찰이자 전시 스파이들이 겪어야 했던 딜레마를 생생히 중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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