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침묵한다. 그는 일상을 관찰하고, 세상에 대해 직접 피부로 느낀 결과만을 담는다. 그의 카메라는 과학자 같은 예민한 관찰력과 엄정한 태도로 비루한 삶과 부조리한 세계, 허위의식과의 치열한 싸움을 벌인다. 참이 아닌 명제를 하나씩 제거해나가며 진리에 조금씩 다가가는 데카르트적 회의론자인 셈이다.
그는 남자, 여자, 침대, 술이라는 욕망의 4 원소로 종종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4원소들을 조합하여 지식인과 예술가의 위선과 이기심을 굳이 감추지 않는다. '진실'이란 무엇이며, '사랑'이라고 부르는 실체가 얼마나 볼품없는지를 뿌리째 드러낸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은 셀 수 없이 많지만, 영화언어를 만드는 사람은 지극히 적다. 그의 영화는 에릭 로메로나 루이스 부뉴엘의 작품들을 떠올리기도 한다. 하지만 지난 26년 동안 언뜻 단조로워 보이는 일상을 이토록 다채롭게 관찰하고 기록한 작가가 있을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대표작 10편을 꼽아보도록 하겠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The Day A Pig Fell Into The Well·1996)
홍상수의 등장은 충무로에 없던 새로운 물결을 가져왔다. 무엇보다 홍상수 영화로는 특이하게 원작이 있다. 1994년에 출판된 구효서의 소설 『낯선 여름』이 바로 그것이다. 각색 작업에 홍상수, 정대성, 여혜영, 김알아, 서신혜가 함께 참여한 점도 이색적이다. 그래서 그런지 나름의 액션(?)도 등장한다.
원작에서는 주인공인 소설가와 유부녀, 소설가를 짝사랑하는 극장 매표원이 삼각관계를 이룬다. 홍상수는 ‘극장 직원’이라는 캐릭터를 첨가하여 원작과는 선을 그었다. 영화를 본다는 행위가 타인의 삶을 엿본다는 것이라 믿는 홍상수는 기승전결이 없는 서사, 정적인 카메라 움직임, 건조하고 현실적인 톤을 통해서 자신의 야심을 구현하고 있다. 특이하게도 홍상수식 캐릭터 라이징을 데뷔작부터 보여준다. 남성은 기사도적 웅변으로 여성을 유혹하지만, 연애권력은 남성이 갖고 있지 않으며 남성은 근성이 별로 없다. 이성 간의 위선과 모략이 마치 우물에 빠진 돼지의 형상과 같은 추악할 정도로 이기적이고 야만적이다. 마치 세익스피어적 비극처럼 말이다.
●생활의 발견 (On The Occasion Of Remembering The Turning Gate·2002)
영화의 영어 제목이 ‘회전문’이라는 점에서 홍상수가 그리려는 일상은 그 익숙함 속에서 ‘반복됨‘을 발견됨과 동시에 특별한 순간이라고 지칭하는 것만 같다. 홍상수는 ’A는 B이다 ‘라고 규정짓기를 거부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초기작들에서는 매우 선명한 계몽의식이 발견된다. 초반에 '괴물은 되지 맙시다'라는 노골적인 대사로 자신이 창조한 캐릭터에게 냉소를 보내기까지 한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는 우리의 주인공 경수는 낯선 여자를 꼬시고 또 아는 여자를 만난다. 이런 경향성은 영화 제목처럼 반복된다. 심지어 <해변의 여인, 2006>에서 이 영화를 스스로 패러디까지 한다. 이런 능청스러움이 영화의 리듬을 경쾌하게 이끈다. 그래서 보기 편하다.
●오! 수정 (VIRGIN STRIPPED BARE BY HER BACHELORS·2000)
‘처녀막 지상주의’를 앞세워 먹물들의 속물근성과 이기심을 폭로한다. 홍상수의 스타일이 완성된 작품으로 차이와 반복, 변주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영화다. 전반과 후반이 비슷한 내용이 반복되는 것 같지만, 미묘하게 다른 차이점이 핵심이다. 똑같은 사건이건만 세 남녀 각자가 취사선택된 ‘기억’이라는 가변차선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따지고 보면 제목부터 냉소적이다. 수정은 수정처럼 순수한 여자일까? 남자는 수정을 사랑한 것일까? 수정의 처녀막을 사랑한 것일까? 그 성(性)의 정치학을 대조를 통해 발가벗긴다.
●극장전 (Tale Of Cinema·2005)
제목은 '극장 앞'이라는 뜻과 '극장 이야기'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그래서 <극장전>는 이전 다섯 작품을 포괄하면서도 홍상수가 지속적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과 스타일을 확립한다. 특히 인위적인 것을 극도로 경계하는 홍상수가 줌과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을 시도했다는 점이 특이하다. 팬, 틸트와 결합해 컷을 대신하는 줌은 아마추어같이 확대와 축소를 반복하며 영화의 몰입을 일부러 방해한다. 이런 점에서 홍상수는 프랑스 누벨바그의 충실한 제자인 것 같다.
그리고 <생활의 발견>처럼 일상을 경쾌한 리듬으로 다루면서도 전반부와 후반부 이야기의 대구를 보다 발전시켰다. 이기우와 엄지원이 담당한 전반부와 그 영화를 보고 나온 김상경과 영화에 출연한 배우 엄지원의 후반부로 이뤄진 액자식 구성이 특징이다. 즉 ‘영화보기’가 홍상수식 일상의 한 평면으로 편입된 셈이다. 영화에 관한 영화에 보이는 필름 메이커의 자기 연민이 <극장전>에는 없다. 그래서 그의 영화에서 ‘법칙’ 자체를 깨버리는 홍상수의 편집과 구조에 고찰이 본격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밤과 낮 (Night And Day·2008)
여러모로 홍상수 필모그래피에서 분기점이 되는 작품이다. 최초의 베를린 영화제 경쟁 부분 진출, 최초의 디지털 촬영, 최초의 해외 로케, 최장 러닝타임, 그리고 전원사 설립 전 마지막 작품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래서 <낮과 밤>은 중기 홍상수의 특징을 미리 만나볼 수 있다.
영화는 일기장처럼 파리에서의 나날을 프레임 장치로 활용한다. ‘성남(김영호)’은 한국에서 마리화나를 피우다가 연이은 사건을 통해 붙잡히는 중년 화가이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아내를 떠나 프랑스로 달려간다. 그리고 길게 혹은 짧게, 깊게 혹은 가볍게 다섯 명의 여자와 스쳐가지만, 두 달 남짓 동안 그는 경제적 빈곤과 향수병, 이국적인 장소에서 섹슈얼한 좌절감을 느끼며 버틴다.
주인공은 예술가로서 이국의 땅에서 낙담하고 방황하고 있지만, 그가 프랑스로 건너온 까닭은 구속을 피하기 위함이다. 이런 아이러니가 영화 곳곳에 투영되어있다. 그리고 아무것도 끝난 것은 없다. 그래서 절망적이고 그래서 희망적이다. 아마도 홍상수 스타일을 절제한 것이 로케이션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정서적 울림을 유지한 이유일 것이다.
●하하하 (Hahaha·2009)
<하하하>는 홍상수 필모 중에 가장 대중적인 영화 중 하나다. 영화를 만드는 방식과 인물을 그리는 묘사에서 지나치게 솔직해서 웃기면서도 한편으로 슬프다. 플래시백과 클로즈업으로 인물들의 현재와 과거를 대비시키며 남녀 사이의 끌림과 어긋남 두 박자로 희극과 비극이 사이좋게 한 이불을 덮고서 회상마저 허상이었음이 결말에 드러난다. 그렇게 인물들은 추억에 머물고 싶은 유령의 발자취를 쫓는다.
●옥희의 영화 (Oki’s Movie·2011)
남진구(이선균), 정옥희(정유미), 송교수(문성근) 세 주인공이 네 가지 에피소드를 통해 각 이야기 사이의 겹침과 차이를 만들어낸다. 그러면서 어느 겨울 세 남녀 사이에서 어떤 정서로 네 이야기를 하나로 모으게 된다.
<주문을 외울 날>에서 영화감독이자 시간강사인 남진구의 하루를 보여준다. 남진구는 송 교수에 대한 어떤 소문을 접하지만 자기도 소문의 주인공이 된다. <키스왕>에서 영화과 학생 진구는 끈질긴 구애로 옥희의 마음을 얻어 서로 사귀게 된다. 그런데 옥희는 과거에 송 교수와도 사귀었던 것 같고 아직 잊지 못한 것 같다. <폭설 후>에서는 감독이자 시간강사인 송 교수의 수업 시간 풍경이다. 폭설 때문에 학생 중 진구와 옥희만 왔고 그들과 송 교수가 흥미로운 대화를 나눈다. 마지막에 배치된 <옥희의 영화>는 옥희가 만든 영화다. 송 교수와 진구, 이렇게 두 사람과 각각 아차산에 갔던 경험의 차이를 놓고 옥희가 영화로 만들었다.
하지만 동일한 인물인지도 알 수 없는 플롯으로 인물의 자기 동일성을 파괴한다. 네 이야기의 시간 순서조차도 일반적인 단선적인 구조를 갖고 있지 않다. 익숙한 영화 관습에서 탈피하여 신기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홍상수 자신이 그동안 견지해왔던 리얼리즘을 버리고 모더니즘에 도전했다고 할 수 있다.
●북촌방향 (The Day He Arrives·2011)
모든 장면을 인사동 북촌마을에서 촬영한 영화. 홍상수답게 술자리에서 만난 여자랑 어떻게 해보려는 영화감독의 궁색한 일상을 다뤘다. 다른 영화감독들이 시간의 흐름을 다루려는데 반해 홍상수는 시간을 '사진'처럼 봉인해둔다. 사건은 도돌이표처럼 반복되고 이야기는 미로처럼 북촌을 맴돈다. 여러 시간성이 ‘북촌’ 한 장소에 모아두는 비결은 인과율을 포기하고 우연이라는 매듭으로 이야기 다발을 한데 묶는다. 그리고 시간을 ‘순환론’에 가둬두고 지질한 욕망과 너저분한 수다 속에 시니컬한 냉소와 하찮은 위로를 안고 극장 문을 나서게 된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Right Now, Wrong Then·2015)
이 자연주의 영화는 홍상수답게 연기가 살아 숨 쉰다. 영화감독 함천수(정재영)과 작가 윤희정(김민희)는 두 번의 반복을 통해 작은 판단이 만드는 미세한 파동을 박제하는 데 성공한다. 심지어 카메라마저 극 중 유머를 자아낸다. 이렇듯 웃고 떠드는 사이에 감독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전달한다. 많은 사람들은 중요한 순간에서의 중대한 결단만이 인생을 바꾼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은 평상시 무심코 지나칠 법한 작은 판단이 쌓여 나아가는 게 인생이다.
●탑 (WALK UP·2021)
후기 작품 중에 어느 것을 고를까하다 이 작품을 골랐다. <탑>은 영화라는 매체가 갖는 시간의 한계를 여러 층을 넘나드는 건축술을 끌어와서 홍상수의 연극성의 한계를 초월한다.
후기 작품 중 몇몇을 소개하면서 마무리하겠다. 미니멀리즘에 충실한 <도망친 여자(2020)>, 데뷔작 이후 오랜만에 죽음을 가장 노골적으로 다룬 <강변 호텔(2020)> 극강의 효율성을 자랑하는 <인트로덕션(2021)>, 부동산 이슈마저 섭렵한 <당신 얼굴 앞에서(2021)>, 이혜영의 입을 빌려 자신의 예술관을 고해한 <소설가의 아내>등 끊임없이 시네마적 실험을 멈추지 않고 있다.
매우 부족한 글이지만 요청하신 @injury time 에게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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