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락밴드 BEST 10
본토에서 '록밴드'의 범위는 우리가 상상하는 범위를 초월한다. 예를 들어 템테이션스, 슈프림스, 밥 말리, 브루스 스프링스턴, 엘비스 프레슬리 마저 모두 수용한다.
그 개념을 수용하여 작금의 음악씬을 고려해서 '우리나라 록밴드 TOP 10' 을 정리해보았다. 먼저 크라잉 넛, YB, 자우림, 신촌블루스, 시나위, 송골매, 부활, 봄여름가을겨울, 백두산, 델리스파이스, 백두산 등을 제외한 것이 아쉽다.
홍대 인디씬은 K-POP의 한계를 명확히 보여준다. 다양성을 논해야할 인디뮤지션조차 외국 레퍼런스가 휜히 보이는 음악을 한다. 핸드씽크를 해야하는 열악한 방송설비도 문제지만, 브릿팝과 헤비메탈의 차이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죄다 '인디음악'으로 뭉등그려 소개한다.
또한, 거대 기획사없이 인디 뮤지션들은 그의 마지막 6집 앨범명처럼 혼자 살아남아야한다.
이런 악재 속에도 불구하고, (K-POP시장에) 이석원만큼 '들을만한 멜로디'를 뽑아내는 이도 드물다.
들국화는 형식적 측면에서 '록'이라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태도만큼은 '록'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저항정신이 겁난 군부에 의해 '트로트'와 '건전가요'가 지배한 라디오와 TV에 의존하지 않았다. 그들은 라이브현장을 터전삼아 록이 '공연음악'임을 한반도에 알렸다. 그래서 그들은 한국의 비틀즈가 될 수 있었다.
덧붙여 록은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왜 서구와 일본에서 록이 번성했겠는가?제대로 악기 하나 살 수 없었기에 한국의 청춘문화는 포크에서 기인했다. 들국화는 보컬과 연주를 벌갈아가면서 했다는 것 자체가 크루적이다. 즉, 포크문화의 영향이다. 괜히 한국의 록그룹들(동물원, 시인과 촌장, 다섯손가락,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포크적이였던데는 이런 이유가 있다.
후배그룹 '신촌블루스'와 더불어 장르적 기초가 허약한 국내에서 보석같은 존재다. 블루스도 춤곡형태로 들어왔듯이 디스코도 춤의 일종으로 수입되었다. 이에 휭크와 퓨전재즈 등을 섭렵한 '사랑과 평화'은 가창이 아니라 연주 위주의 음악으로도 충분히 시장에서 먹힐 수 있음을 처음을 증명했다.
아마도 '송골매' 등과 더불어 공중파 시상식에서 상을 받은 최초의 밴드일 것이다.
코리안 인베이젼을 이끄는 '방탄소년단'의 [IDOL]에도 국악추임새가 들린다.
소위 '기타 산조(기악 독주곡)'을 창시할만큼 국악의 대중음악화의 시조이시다.
그가 이끌던 밴드 [작은 거인]은 조하문이 이끌던 [마그마]와 더불어 국내 하드록 1세대였었다. 그러나 김수철의 진정한 면모는 여기서 시작된다. 남들 같으면 비슷한 패턴의 가요를 써서 인기의 연장을 꾀했을지 모른다.히트곡을 쓸 수 있음에도 자메이카의 토속음악인 레게를 세계화한 밥 말리 처럼 우리의 전통음악을 서양인에게 전하는 것이다. 바로 우리만이 할 수 있는 '국악가요'를 말이다. 1986 서울 아시안 게임과 1988 서울 올림픽 개폐회식 행사음악을 비롯하여, 1993년 무주 동계 유니버시아드,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2003년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 팔만대장경 레코딩 등을 담당했다.
유희열, 방시혁, 심현보, 마이 앤트 메리, 김현철 등은 대단하거나 거창한 것을 노래하지 않은 어떤 날에 찬사를 보낸다.
서실 우리나라 주류 가요는, 음악이 '보컬'과 '반주'라는 등식에 지금도 메어있다.
'어떤날'의 조동익과 이병우는 K-POP이 놓치고 있던 '연주'와 '편곡'의 묘미를 들려준다.
영미POP이 왜 연주음악에서 발전해왔을까?를 떠올려보면 퍼득 이해갈 것이다.
이들의 힌트는, 유재하와 더불어 K-POP의 퀄리티가 급상승하게되는 계기가 된다.
1975년의 가요정화운동과 긴급조치 9호 (대마초 파동)은 대한민국 대중음악을 후퇴시킨 문화대혁명이였다.
약 10년간 (1980년대 중반까지) 황폐해진 가요계에 불쑥 형편없는 연주력을 가진 3인조 형제그룹이 등장한다. 배철수가 이끌던 [송골매]와 더불어 캠퍼스를 훌쩍 뛰어넘어 기성 가요시장에서 밴드가 존립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이윽고 산울림은 '국내 헤비메탈의 창시자, 펑크의 시조, 때로는 얼터너티브의 원조'로 후세에 추존된다.
서구의 장르를 수용했음에도 그 클리셰를 지키지 않고, 동요적인 감성마저 느껴지는 누구에게도 영향을 받지 않은 독창적인 음악을 선보였다. 이렇듯 국산 개러지 록은 열악한 장비와 환경 그리고 서슬퍼른 검열의 틈바구니속에서 태어났다.
대한민국은 정치경제적 이유로 록의 불모지로 남아있었지만, 90년대 경제발전의 혜택은 대중문화의 발전에 토대가 되었다. 호황에 힘입어 삐삐밴드, 노이즈가든, 유앤미블루, 크래쉬 등의 훌륭한 록밴드가 등장했었다.그와중에 사운드의 양감과 록의 형식미에서 서구에 전혀 뒤지 않은 팀이 존재했었다.
어쨌거나, 신해철은 우리나라에 '미디'와 '사운드' 개념을 최초로 정착시켰으며, 수많은 표절의혹으로 멍든 K-POP씬에서 그로부터 자유로운 몇 안되는 음악인이기도 했다.
신중현은 '키보이스(Key Boys)'와 더불어 한국 록 1세대임이 분명하지만,
동시에 소울(R&B)을 국내에서 제대로 보급한 첫번째 주자이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싱어송라이터 겸 프로듀서로써 장미화, 박인수, 이정화, 김추자,
펄 씨스터즈, 임성훈, 장현, 바니걸스, 김정미 등 수많은 스타들을 길러냈다.
지금도 밴드 형태로 활동하고 있을만큼 그의 아이덴티티(음악적 자양분)는 'ROCK'이다.
'난 알아요' 봐도, 밀리 바닐리(Milli Vanilli)를 벤치마킹하면서도 곳곳에 메탈 기타를 심어놨다.
현대적 아이돌 시스템을 사실상 개창할 뿐 아니라 'K-POP(듣기좋은 멜로디, 기승완결 곡구조, 전자장비에 의한 사운드생성)' 이라는 형식미도 완성시켰다. 장르의 발전토대가 허약한 우리나라에서 그처럼 외래 장르를 이토록 매끈하게 뽑는 방식이야 말로 최대의 발명이자 발견이라 할 수 있다.
당신이 만약 연주자라면, 대한민국 어떤 밴드에 가입하고 싶으신가요?
아이돌적인 팬덤(인기)와 아티스트적인 음악성을 동시에 가졌던 최초의 한국인 뮤지션이다.
비틀즈가 EDM과 힙합의 정립에도 영향을 미쳤듯이 그는 국내에서 가능한 음악적 실험은 거의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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