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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RU Apr 01. 2023

길복순 후기 세 가지 역설

Kill Boksoon 2023 정보 결말 줄거리 해석

《길복순》는 크게 세 가지 역설을 다루고 있다. 첫째 입시부정 뉴스를 보던 길복순과 딸 길재영 (김시아)의 대화가 인상적이었다. 엄마는 자식의 미래를 위해 물불 가리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이고, 딸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반박한다. 이 대화에서 영화의 주제를 발견할 수 있다.      


한국인은 지금껏 수단을 목적처럼 여기며 살아왔다. 입시경쟁 하에 성장해 온 아이들은 '성과주의'라는 미명하에 좋은 대학이 성공적인 삶이라는 등식으로 착각한다. '월 500만 원, 월 1000만 원 그리고 그 이상을 달성하고 나면 그다음 무엇을 할 겁니까?'라는 명제는 한국인을 불행하게 만든다. 한국인이 매번 달성한 것은 목적이라고 착각하지만 사실 수단에 불과했다. 길복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녀는 “사람 죽이는 건 심플해. 애 키우는 거에 비하면”라고 푸념을 늘어놓는다.

 

자식은 결코 수단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부모에게 자식은 삶의 목표인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입장바꿔 딸에게 살인청부업자인 엄마의 직업을 온전히 이해해 달라는 것은 모순이다. 이러한 간극이 모녀관계가 가까워지는 것을 방해한다. 이렇듯 변성현 감독은 아이러니를 적극 활용한다.    


산업예비군(무직자)을 양산한 주체는 독과점 시스템이다.

두 번째 아이러니는 기업드라마에서 빛을 발한다. 자본주의와 윤리에 대한 대담한 논의를 이어간다. 독점기업 MK ENT는 대표 ‘차민규’(설경구)가 정한 3가지 원칙 때문에 타 업체를 제치고 시장지배력을 확대한다. 프리랜서를 고용하는 독립 에이전트를 인정하지 않는 두 번째 원칙은 독점력 강화이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던 복순과 딸이 공정한 경쟁에 대해 나눈 논의를 기업적 차원에서 확대한다.     


대기업의 독점력에 의해 타업체는 수익률, 인력수급, 경쟁력에서 어려움을 겪는다. 킬러들도 취업하기 어려워지고 직업안정성이 위태로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차 대표의 전횡에 반기를 들지 못한다. 우리 현실에서 겪는 청년실업과 고물가, 소비자에게 책임전가하는 기업의 행태 등을 스토리에 자연스럽게 녹여냈다. 차 대표에 반발하는 인물들은 누구나 자유롭게 시장에 참여하자는 주장과 같다. 애덤 스미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보이지 않는 손’이다. 자산 규모가 크건 작던 누구나 공정하게 경쟁하는 애덤 스미스의 이상은 안타깝게 규제철폐나 독과점을 강화하는 프로파간다에 왜곡되어 왔다. 감독은 이러한 현실을 비통하게 여긴 것 같다.     


대기업 중심의 영화계에 대한 메타적 성격

영화는 살인청부업을 엔터테인먼트에 비유하고 있다. 길복순이 회사가 건넨 시나리오에 따라 임무를 수행한다는 3번째 규칙을 어긴다는 것은 영화의 메타적 성격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제작사의 간섭, 관행을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인턴 김영지(이연)와 실력에 비해 대우가 열악한 한희성(구교환)은 청년실업 문제를 극으로 끌어온다.


신상사(김성오)는 재벌 독점체제에 누구보다 반발한다는 점에서 구체제(군부)를 상징한다.
독점은 구원받을 수 있는가?

세 번째 아이러니는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와 영화가 그리는 장르의 세계가 충돌한다는 점이다. 변성현 감독은 홍콩 누아르 즉 현대의 범죄계를 배경으로 한 무협물을 꿈꾸고 있다. 무림지존(차대표)이 구파일방(타 업체)을 모은 무림회맹(대표회의)에서 맹약(3원칙)을 정하고 이를 강제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주인공 길복순이 강호의 도리를 저버린 사부(차 대표)와 사매(차민희)와 대립하는 플롯도 유사하다. 그리고 MK직원들의 이야기가 길복순의 서사는 암흑가에 흘러들어 겪는 여러 애환이 주제이며, 의리, 사제지간, 배분을 다룬다는 점에서 그러한 특징이 일치한다.

  

장르는 허구의 과장됨을 다뤄도 되지만, 영화의 주제는 지극히 현실적이다. 이러한 주제와 장르의 충돌 때문에 딸 재영의 이야기가 겉돌게 된다. 10대 소녀의 성적 지향성(과 정치인의 부정입학)에 대한 담론은 결이 다르다. 딸과의 갈등이 길복순이 변심하는 계기를 만든다는 측면을 고려할 때 가장 아쉬운 대목이다. 그렇기에 딸과 복순의 갈등이 피부에 와닿지 않는다. 차라리 엄마의 이중신분을 눈치채서 반항하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 앞서 말했듯 딸은 엄마가 수단이 목적을 정당화하는 것에 반발했기 때문이다.  


딸이 염려하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을 추구함으로써 대립과 갈등은 극에 달하고 ‘인간의 존엄성’이 물질가치나 이념가치보다 경시되는 투쟁이 벌어진다. 정치는 진영논리로 양분되고, 사회 곳곳에 집단이기주의가 성행하여 바람 잘 날이 없다. 영화는 약자보다는 강자가, 권력을 빼앗긴 자보다는 권력을 잡고 있는 자가 더 많은 혜택을 보고 있지 않는가하고 되묻는다. 결말에서 세상만물은 모순적이며 선과 악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고 결론  내린다. 쿠키에서 본인의 자존감이 지켜진다면 당신은 부조리와 불합리를 견딜 수 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존 윅>과 다른 액션

일본도 액션 중에 특이하게 와키자키를 써서 이색적이었다.

길복순은 확률론적 세계관을 갖고 있다. 경우의 수를 가늠해 보는 가이 리치의 <셜록 홈즈>을 활용해 가상의 대결을 머릿속으로 미리 계산한다. 감독은 멀티버스처럼 캐릭터를 죽이지 않고도 그녀가 살해당하는 장면을 보여줄 수 있다. 그 덕분에 대결이 다소 진지하게 않게 받아진다. 음악으로 긴장을 자극하지만, 이 모든 것이 가상 시뮬레이션을 돌리거나 다시 게임을 진행하는 기분이 든다. 올드팝을 <엑스맨 퓨처 앤 패스트>처럼 슬로 모션에 매칭시켰으나 선곡이 썩 매끄럽지 않았다.


그러다 <미션 임파서블 폴아웃>을 참조한 화장실 격투에서 진중한가 싶더니 인턴 김영지를 사인펜으로 상대할 때는 격투의 물리학이 성립하지 않는다. 실재감이 떨어진다. (예를 들어 혈액을 CG로 그리지 않고 실제로 터트리는 방식이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또 촬영과 편집에서 전도연의 왜소한 체격을 보완해주지 못하니까 타격감이 전혀 살지 않는다. 이러한 단점은 식당 격투에서 반복된다. 정두홍 무술감독이 기본적인 동선을 잘 짰으나 화장실 격투만큼 결과물이 나오지 못했다.


또 블라디보스토크 장면에서 카메라는 종종 타격점을 놓친다. <킹스맨>의 교회장면을 오마주하면서 다수의 적을 상대하는 혼란을 전달하지만, 설경구의 움직임을 쫓지 못하는 바람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존 윅은 주인공에 초점을 맞추고, 그에게 덤비는 상대를 처리하는 방식이라 결이 다르다. 술집 배경의 총격전인 만큼 차라리 서부극을 참조하는 편이 나았을 것 같다. 그랬다면 동선이나 편집이 훨씬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액션에서 긴장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등장인물 간의 비정함이 두드러지지 못한다. 음악이 긴장을 대체한다. 올드팝을 <엑스맨 퓨처 앤 패스트>처럼 슬로 모션에 매칭시켰으나 선곡이 썩 매끄럽지 않았다.


이 와중에 감독은 모든 캐릭터를 챙긴다. 모두 잠재력이 있으나 의미 있는 역할을 주지 못했다. 모든 인물에 애정을 주는 바람에 이야기가 산만해졌다. 주인공이 마음을 바꾸게 된 동기 같은 중요한 플롯이 깊이 다뤄지지 못한다. 그 약점을 인지한 감독은 직설적인 대사로 주제를 전달한다. 캐릭터 앙상블이 중요한 군상극에서 이러한 결정은 아쉽다. 대립구도가 옅어지고, 감정적 해방에 이르지 못한다.


애초에 길복순의 모티브가 <킬 빌>의 싱글맘 킬러 '비비카 A. 폭스'였던 만큼 주인공과 가까운 조연 캐릭터를 하나씩 정리하는 복수극으로 나아갔다면 더 큰 카타르시스를 제공했을지 모르겠다. 애초에 넷플릭스가 시나리오를 접하고 드라마를 제의했다고 하는데 그 판단이 옳았던 것 같다.          


          

★★  (2.0/5.0)      


Good : 다양하게 논의될 수 있는 이야기의 층위

Caution : 주인공이 변심한 계기나 액션의 쾌감이 부족하다.


■변성현 감독의 전작 <킹메이커>에서 이 주제를 다뤘었다. 어느 날 새벽, 남자는 동네 사람이 자신의 닭이 낳은 달걀을 훔치는 장면을 목격한다. 하지만 범인이 이장의 친척이라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마을에서 가장 현명한 ‘서창대’(이선균)를 찾아간다. 서창대는 서랍 안에서 빨간 실을 꺼내 들고는 “실을 닭의 다리에 묶고, 범인의 닭장에 몰래 닭을 가져다 두라”고 말한다. 그다음 “우리 집 닭에 모두 빨간 실을 묶어 놨으니, 닭을 훔쳐갔는지 확인해 보자”라고 하라는 것이다. 다리에 실을 묶은 닭을 범인의 집에 가져다 뒀으니, 범인은 발뺌할 도리가 없다. 하지만 서창대가 제안한 묘책에는 문제가 있었다. 달걀도둑을 닭 도둑으로 몰아야 한다는 점이다. ‘달걀 도둑 검거’라는 대의를 실현하기 위해 범인에게 원래 죄보다 더 큰 죄를 뒤집어씌우는, 즉 부정한 수단을 쓰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딜레마가 생긴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라는 한 문장으로 요약되는 첫 장면의 메시지는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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