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왬! (Wham!·2023)》
우리 집에 왬! 앨범이 3장 있었다. 걸음마할 때부터 들었던 친숙한 음악들, 심지어 초딩 때 직접 LP를 플레이하며 방학숙제를 했던 기억이 난다. 이렇듯 노래는 친숙했지만, 그룹 ‘왬!’에 대해선 잘 몰랐다. 넷플릭스에 올라온 이번 다큐멘터리는 결성부터 해체까지 상세하게 다뤄서 좋았다.
크리스 스미스 감독은 80년대를 지배했던 아이돌에 대해 치장하지 않고, 소꿉친구인 앤드류 리즐리와 조지 마이클의 남다른 우정을 들려준다. 두 사람은 초등학교에 12살인 앤드류가 전학생인 뿔테안경 쓴 통통하고 수줍음이 많은 11살의 게오르기오스 키리아코스 파나요투를 옆자리에 앉히고 ‘요그’라는 별명을 붙여주고 친구가 되면서 둘의 인생이 달라졌다.
핵인싸인 리즐리가 요그를 데리고 학교생활에 적응을 도왔다. 또한 집에서 LP를 틀지 못하게 하는 엄격한 아버지 잭 파나요투 때문에 가수는 꿈도 못 꾸던 요그에게 기죽지 말라고 다독여주고, 음악에 대한 열정을 응원했다.(잭은 (다큐에서) 리즐리 덕분에 아들이 가수가 될 수 있었다면서 그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고교시절 '더 이그제큐티브(The Executive)'라는 4인조 스카 밴드로 활동하던 두 사람은 좀 더 정치적이고 랩을 하는 팝 듀오로 변신하게 된다. 댄스 클럽에서 영감을 받아 ‘왬!’으로 이름을 바꾸고, 버블 팝(아이돌 음악) 듀오로 음반계약을 맺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Careless Whisper의 데모가 수록되어 있음에도 듀오의 음반계약을 거절당했다. 보다보다 참다못한 앤드류 어머니가 데모테이프를 직접 음반사 관계자에게 전달한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두 소년은 동네 찻집에서 첫 음반계약을 체결하고 레코딩에 들어갔다. 싱글을 발매하고 영국에서 끊임없이 공연을 이어가며 스타덤에 오른다. 요그는 조지 마이클로 예명을 짓고, 두 사람이 함께 음악을 만든 노래는 귀에 쏙쏙 들어오는 선율을 자랑했다.
영국을 벗어나 미국과 캐나다, 일본, 중국에서 반향을 일으키며 빌보드 차트를 폭격하게 된다. 하지만 무대 뒤에서 성적 지향과 씨름하던 요그는 1983년 리즐리에게 커밍아웃한다. 두 사람은 이 사실을 비밀로 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요그는 머릿속에 들어있는 영감을 레코딩하기 위해 단독으로 곡을 만들겠다고 선언한다. 앤드류는 요그의 천재성을 인정하여 아예 그에게 직접 프로듀싱을 맡으라고 조언한다.
리즐리는 내심 음반작업에서 밀려났다는 데에 불편함을 매체를 통해 털어놓는다. 하지만 긍정적인 성격의 그는 친구가 더 높이 날아오를 수 있도록 끝까지 응원했다. 웸 활동하던 시기에도 조지의 솔로 활동을 지지해주고, 공동 작곡한 곡도 요그 단독 명의로 발표하게 해주는 대인배였다. 웸 해체 이후에도 일체의 잡음을 일으키거나 친구의 사생활을 폭로하는 스캔들 하나 없이 끝까지 우정을 지켰다.
반면 정신적 기둥인 리즐리 없이 독립한 요그는 인정욕구에 시달린다. 1956년부터 매년 시상되는 영국인 작사·작곡가를 위한 아이보 노벨로(Ivor Novello) 시상식에서 수상하기까지 ‘아이돌 출신’이라는 콤플렉스에 시달렸고, 라이브 에이드에서 자신이 동경하던 엘튼 존, 프레디 머큐리와 함께 무대에 섰다는 것에 감격했다. (다큐에 짧게 등장하지만) 그가 동경했던 모타운 스타들(아레사 프랭클린)과 프로듀서와의 협업에 고무되었다.
두 사람은 매스컴의 가쉽거리, 아이돌이라는 폄하와 조롱에 스트레스를 받아 자괴감을 느낄 수 있음에도 어린 시절부터 쌓아온 깊은 형제애와 우정으로 헤쳐나갔다. 리즐리의 어머니가 왬!의 활동 내역을 기록한 꼼꼼한 스크랩북을 보관하고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리즐리가 갖고 있던 영상과 미공개 음성파일을 엮어 다큐멘터리를 완성했다. 풋풋한 청년 둘이 아티스트로 거듭나는 과정은 오랜 친구끼리 담소를 나눈 것 같은 친근함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리즐리는 둘이 함께 했던 1982년부터 1986년까지만 이야기한다. 이것이 리즐 리가 요그에게 베풀 수 있는 우정의 형태인 것이다. 해체 후에도 요그는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자신을 이끌어준 고마운 친구에게 선물을 보냈다.
진정한 친구 없이 솔로로 데뷔한 요그는 솔로 1집 「Faith」으로 빌보드 넘버원 싱글 4곡과 그래미 올해의 음반, 1987년 연말 결산 1위곡을 배출하며 슈퍼스타로 우뚝 서게 된다. 2집 「Listen Without Prejudice」은 야심만만한 프로젝트였다. 앨범 속 아주 진솔한 가사들은 그의 억압된 섹슈얼리티의 고백이자 프린스와 마이클 잭슨을 다분히 의식한 음악적 실험이다. 흑인음악보다 더 그루비한 그의 앨범은 R&B/힙합 차트 1위에 오르지만 전작에 비해 턱없는 상업적 성과에 실망한다. 그는 홍보에 등한시한 음반사 소니를 상대로 4년간의 법정 투쟁을 벌이다가 전성기를 날려먹었고, 1998년 비버리 힐즈 공원에서 함정수사에 걸려 강제로 커밍아웃하면서 대중의 싸늘한 시선을 홀로 감당해야했다. 왬! 시절의 세기의 멜로디를 뽑아내지 못했다.
요그는 실존적 위기를 창작력의 원천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K-아이돌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피프티 피프티 사태 같은 꼴사나운 아이돌 비즈니스에 비춰볼 때, 《왬!》의 아름다운 동행과 파트너쉽은 고결하게 다가온다.
버스커버스커, 볼빨간 사춘기 같이 밴드의 지분에서 한명에 쏠리면 그룹이 깨지기 쉽다. 리즐리는 자신의 한계를 순순히 인정하고 그 이상의 선을 넘지 않았다. 소심하고 예민한 성격의 요그를 잘 다독거리고 정신적 기둥으로써 소임을 다했다. 일부러 어마어마한 인기에 취한 스캔들 메이커로 요그의 성적 지향을 숨겨줬고, 유명세를 활용해서 사업적 확장이나 방탕함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조용히 지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말이다. 2016년 타계한 요그도 진정한 친구를 얻었다는 점에서 인생의 승리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3.5/5.0)
Good : 진정한 우정 찬가
Caution : 일대기식 나열
●조지 마이클(와 아버지 잭)는 생전에 자기가 성공할 수 있던 큰 이유가 리즐리라며 친구 잘 만나 성공했다는 소리나 듣고 있어서 속상하다고 여러 차례 언론에 밝혔다.
■<그 남자 작곡 그 여자 작사>의 휴 그랜트가 연기한 한물 간 아이돌이 리즐리를 모티브로 만든 캐릭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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