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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RU Aug 22. 2023

법정영화 TOP 50+1 (2)

Courtroom Movies

우리가 보는 많은 법정 영화는 우리 사회를 형성한 실화를 바탕으로 정의를 위해 싸우는 용감한 사람들을 응원하는 심정으로 지켜보게 한다. 정의가 항상 승리하는 것은 아니지만, 법률을 사용하여 개인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것은 변호사와 판사의 몫이다. 현재 사회에서 우리는 매일 시민권과 정의의 중요성을 목격하고 있다. 정의는 우리 사회의 근간이며 정의가 없으면 우리는 기능할 수 없다. 역대 최고의 법정 영화를 소개한다.  



#25 : 변호인 (辯護人·2013) 양우석

〈변호인〉은 속물 변호사가 개심하는 영웅담이 아니다. 전반에 ‘빽’ 없고 가방끈 짧은 하류인생을 보듬는 휴먼드라마로 진행되다가 후반에 폭력과 비상식을 용납할 수 없는 원칙주의자가 펼치는 진지한 사회고발물이다. 1981년 부림사건은 사회과학 독서모임의 회원들을 영장 없이 불법으로 체포하여 2달간 구타와 고문을 가했다. 80년 광주사태에 놀란 신군부가 부산지역 사상단속을 위해 조작한 용공사건이다.

       

공정과 상식이 통하지 않는 대한민국 법정에서 펼쳐지는 대한민국 법정에서 이 영화가 걷는 순박하고 우직한 변론이 진심어린 호소로 들리게 한다. 특히 “국가란 국민입니다”란 대사로 온 국민의 마음을 울리는 까닭은 영화 속 공안 정치가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   



#24 : 래리 플린트 (The People Vs. Larry Flynt·1996) 밀로스 포먼

베를린 영화제 황금곰상

래리 플린트가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지만, “나 같은 쓰레기가 보호받는다면 당신 모두가 보호받을 것이다”라는 구호는 큰 호소력을 지닌다. 래리 플린트는 실제 미국 내 언론의 '표현의 자유'를 몇 단계 격상시킨 기념비적인 사건의 주인공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정의(正義)나 도덕성의 반대편에서 온 인물이라는 점이다. 도색잡지 발행인과 하버드 출신 변호인 알란 아이삭맨이 1987년 연방 대법원에서 거둔 승리는, 오늘날 언론이 공인을 향해 강도 높은 풍자를 하더라도 명예훼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된 밑바탕이 되었다.     



#23 :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 (Kramer vs Kramer·1979) 로버트 벤튼

아카데미 작품·감독·남우주연·각색·여우조연상

최고의 법률 드라마 중 하나답게 현실 세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소름 끼치는 살인사건이나 무고한 사람들이 저지르지 않은 범죄로 누명을 쓴다는 선정적인 이야기가 없다. 영화는 슬프도록 익숙한 결혼 생활이 파탄 나고 부부가 함께 이룬 인적 재산인 ‘자식’의 양육권 분쟁을 가슴 아프게 그리고 있다. 이야기의 핵심은 아내 조안나(메릴 스트립)가 떠난 후, 홀로 아들 빌리(저스틴 헨리)를 돌보게 되면서 직업과 양육의 균형을 맞추는 법을 배워야 하는 남편 테드(더스틴 호프만)의 변화이다. 즉 남녀평등 시대는 ‘미성숙 연령'(tender years) 의 아동의 복지를 위해 어머니의 품이 최선이라는 기본 공식이 허물어졌음을 의미한다.  

     

양육권 분쟁 영화의 원조답게 사회와 직장 등 공적영역은 남성의 무대이고, 여성은 가정이라는 사적 영역에 머물러야 한다는 종래의 윤리가 무너지면서 생기는 사회적 공백을 조명한다. 특히 무엇이 '자녀의 복지'를 위해 최선인지 고심하게 한다.    



#22 : 모리타니안 (The Mauritanian·2021) 케빈 맥도널드

옥중기 『관타나모 일기(Guantanamo Diary)』을 쓴 ‘모하메두 울드 슬라히(타하르 라힘)’의 사촌이 빈 라덴의 휴대전화로 그에게 연락했다는 이유로 9·11 테러의 주동자로 몰려 2002년부터 2016년까지 관타나모 수용소에 수감된다. 슬라히는 기밀로 분류된 이 일기를 출간하기 위해 6년간의 법정 투쟁을 거쳐야했다. 역사와 시대, 국가를 초월해 국가의 이익을 위해 힘없는 개인을 희생할 수 없다는 인권을 담고 있다. 



#21 : 아버지의 이름으로 (In The Name Of The Father·1993) 짐 쉐리던  

베를린 영화제 황금곰상

나라마다 인접국가와의 불편한 역사가 쌓여있다. 잉글랜드가 지배한 아일랜드에 대한 역사적 부채는 매우 무겁다. 그 부채의 상당부분이 오만과 편견에서 유래한다. 아일랜드인의 범죄를 수사하는 영국경찰의 태도에는 악의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미필적 고의’가 내포되어 있다. 어느 나라나 안보와 치안이라는 중대한 대의명분의 속성상 잔혹한 인권유린이 발생할 위험이 커진다. 인위적인 여론의 조작을 위해 필요한 시점에 터졌던 준비된 ‘간첩단 사건’이 수시로 벌어졌던 우리 입장에서 더 공감할 영화다. 이승만 때 〈혁명의용군 사건〉, 〈진보당 사건〉, 박정희 때 〈조용수, 유럽 간첩단 조작사건〉, 〈인민혁명당 사건〉, 전두환 때 〈진도 가족 간첩단 조작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노태우 때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 등은 죄가 없음에도 법률과 조작된 증거를 이용하여 사형 선고로 생명을 빼앗거나 최소한 유죄 선고를 하여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는 사례들이다.      


〈아버지의 이름으로〉은 1975년 실제 발생했던 이른바 '제리 콘론 사건'을 다뤘다. 아일랜드의 한 청년이 무고하게 IRA 소행인 폭탄 테러 혐의로 입건되어 징역 15년을 살다 무죄를 선고받은 사건이었다. 당시 북아일랜드 분쟁(더 트러블이라고도 함)에 영국 정부가 저지른 권력 남용을 조명한다.    



#20 : 아르헨티나 1985 (Argentina,1985·2022) 산티아고 미트레

시대를 막론하고 과거사 청산 문제로부터 자유로운 사회는 없다. 적폐청산은 국가권력에 의해 부당하게 저질러진 불법 행위에 대한 명예회복과 가해자의 책임을 추궁하고 나아가 진실을 밝히고 역사의 정의를 세우고 화해의 길로 나아가 발전적 미래를 도모하는 것이다. 훌리오 스트라세라 검사와 모레노 오캄포 검사보는 1974부터 1983년까지 이어진 일명 ‘더러운 전쟁(독재정권의 인권유린)’을 기소한다. 1975년 그리스 군부 지도부에 대한 소송 이후 처음으로 진행된 준타스 재판은 증인들로부터 증거와 증언을 확보하기 어려웠다. 학대에 연루된 군인, 경찰, 의사, 정치인 등의 압박에 거셌기 때문이다. 스트라세라의 사무실은 독재 시절 전 내무부 장관인 알바노 하긴데귀 장군과 우익정당 UCR로부터 여러 차례 연락을 받았다. 재판 기간 동안 부에노스아이레스 학교에서 29건의 폭탄테러 협박이 접수되었으며 주요 정부시설 다수에서 실제 테러가 일어났다. 그 가운데, 호르헤 비델라 전 대통령과 에두아르도 마세라 제독에게 종신형이 선고되었다.   

   

문제는 가해자의 반성이다. 피해자의 진실을 밝힌다고 하더라도 가해자가 이에 대해 반성하지 않는다면, 과거사는 또 발생할 수 있다. 고 노태우 전 대통령이 병상에서 광주 학살을 비롯한 과거사에 대해 사과의 뜻을 밝혔다고 한다. 불행했던 과거가 또다시 발생해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를 만드는 하나의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진실과 화해가 필요한 지금, 과거에 대한 사과에 박수를 보낸다.     



#19 : 다크 워터스 (Dark Waters·2019) 토드 헤인즈

대기업 전문 로펌의 변호사 ‘롭 빌럿’(마크 러팔로)은 소 떼를 잃은 농부의 사건을 맡게 되는데, 세계 최대의 화학기업 듀폰의 책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프라이팬, 아기 매트, 의류, 자동차, 콘택트렌즈 등에 사용되는 독성물질 ‘퍼플루오로옥타노익 에시드(PFOA)’에 인류의 99%는 이미 중독되어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1998년부터 2017년까지에 걸친 법적 공방이 이어진다. 빌럿은 편을 바꾸면서 자신이 일했던 기관이 얼마나 부패했는지, 그리고 법과 진실이 권력자의 필요에 따라 어떻게 조작될 수 있는지를 파헤친다.     

 

영화는 소송기간 동안 롭과 가족들이 얼마나 큰 희생을 치러야했는지를 놓치지 않는다. 이를 통해 ‘당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경각심을 전한다. 그리고 징벌적 손해배상(懲罰的 損害賠償)을 인정한 영미법체계와 달리 우리나라는 부족함을 메움을 의미하는 ‘전보(塡補)’ 즉 실제 입은 피해액 정도로 손해배상의 범위를 한정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2022년 대법원에서 징벌적 손해배상을 인정한 판례가 있긴 하지만 아직은 요원한 것 같다.    



#18 : 스파이 브릿지 (Bridge Of Spies·2015) 스티븐 스필버그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미국의 전기기술자 로젠버그 부부가 원자폭탄 제조 기술을 소련에 제공했다는 혐의로 간첩죄로 사형당한 1957년은 반공주의(매카시즘)가 극에 달하던 시기였다. 공교롭게도 이때 미국 정부는 소련의 고정간첩 루돌프 아벨((마크 라이런스)을 재판에 세우면서 적국의 스파이에게도 공정한 대우를 한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변호사를 물색하게 된다. 보험전문변호사 제임스 B. 도노반(톰 행크스)이 모두 기피하는 이 변론을 맡는다.   

   

냉전이 한창인 한반도에서는 누군가 간첩 혐의로 기소되면 많은 사람들이 그의 헌법적 권리를 금방 잊어버리거나 고의적으로 무시할 것이다. 도노반은 예외였다. 그는 여론에 휩싸이지 않고 선하고 옳은 것을 지켜내는 막중한 임무를 맡았다. 도노반은 적국의 간첩을 변호한다는 이유로 여론의 비난은 물론 가족들이 위협받지만 모든 사람이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진정으로 믿으며, ‘법 앞의 평등’이라는 명제를 끝까지 지켜나간다.       



#17 : 어 퓨 굿 맨 (A Few Good Men·1992) 롭 라이너

쿠바 관타나모의 미 해병기지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애런 소킨의 동명 연극이 원작이다. “넌 진실을 감당할 수 없어!”로 대표되는 신참 해군 법무장교 톰 크루즈와 이를 은폐하려는 해병기지 사령관 잭 니콜슨 간의 영화 역사상 가장 유명한 법정 장면은 별다른 액션이 수반되지 않는데도 강한 긴장감으로 가득하다. 군내에서 자행된 폭행과 은폐를 통해 조직문화의 양면성을 고발하는 한편, 아버지의 그늘이라는 콤플렉스에서 해방되어가는 주인공의 성장서사까지 촘촘한 짜임새를 자랑한다. 변호사가 승소를 위해 열중하는 장면은 이후 여러 법정 영화에 클리세로 쓰인다.     


‘약자를 보호하지 않는’ 군대 부조리를 파헤친 영화이다 보니 동방의 어떤 국방부는 상영불가 판정을 내렸다고 한다.



#16 : 추락의 해부 (Anatomie d’Une Chute·2023) 쥐스틴 트리에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아카데미 각본상

남편의 추락사를 법의학적으로 조사하다보니 아내가 유력한 용의자로 부상한다. 법원은 수많은 정보 중에서 무엇을 믿고 선택해야 할까? 그것이 진실한지 거짓인지는 100% 보장할 수 없기에 취사 선택되거나 편향될 위험성을 갖고 있다. 50센트의 〈P.I.M.P〉가 흘러나온다거나 독일인이 프랑스 법원에서 제3의 언어 ‘영어’로 진술하는 대목은 정보의 전달이 온전치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왜곡된 정보를 해독하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몫이다. 이렇게 《추락의 해부》는 진실을 향한 우리의 인식에 도전한다.



#15 : 앵무새 죽이기 (To Kill A Mockingbird·1962) 로버트 멀리건

아카데미 남우주연·각색·미술상

켄드릭 라마는 <To Pimp A Butterfly>라는 제목에 붙인 연유로 인종차별과 불의·부조리를 주제로 한 하퍼 리의 소설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했다. 여기서 앵무새와 나비는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는 무고한 존재가 인종을 포함한 모든 편견과 차별로 인해 고통 받은 이를 비유하는 의미로 썼다.     


〈앵무새 죽이기〉가 법정 드라마의 바이블에 된 이유는, 사법 기관이 종종 편견과 부패로 인해 정의가 항상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최초로 명시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문학 역사상 가장 유명한 변호사인 ‘애티커스 핀치’를 그레고리 펙이 연기한다. 호튼 풋이 각색한 스토리는 법과 기존의 사법 제도가 무고한 이를 변호하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1930년대, 백인우월주의가 만연했던 미국 사회는 많은 범죄 현장에서 흑인에 차별적인 시선을 가해 왔다. 6살 아이의 순진무구한 눈으로 바라본 인종차별의 폐해를 목격하고 결국 그 순수함이 현실 세계의 사악한 사법체계에 의해 얼룩지게 된다. 영화는 편견과 공감, 그리고 잔인함과 동정심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인간의 양면성을 보여준다.      



#14 : 검찰 측 증인 (Witness For The Prosecution·1957) 빌리 와일더

추리 소설계의 대모인 애거사 크리스티의 희곡이 원작으로 법정에서 이해관계 때문에 위증하는 증인의 딜레마를 다뤘다. 빌리 와일더는 염세주의자답게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부도덕하며, 자신의 본질을 숨긴 채 가장하고 있고, 모두가 서로 속고 속이는 관계다. 배신과 배반, 극적인 반전으로 가득한 와일더의 세상은 부패했으며 잔인하다.      


살인 혐의로 기소된 ‘레너드 볼(타이론 파워)’와 그를 무죄 방면하려는 변호사 ‘윌프리드 로바츠 경(찰스 로튼)’, 그리고 ‘검찰 측 증인’으로 남편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는 레너드의 아내 ‘크리스틴 헬름(마를렌 디트리히)‘ 간의 법정 공방이 반전에 반전을 거듭했고, 흥행에서도 대박을 쳤다.  



#13 : JFK (JFK·1991) 올리버 스톤

아카데미 편집·촬영상

그날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올리버 스톤은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과 관련된 유일한 재판을 각색했다. 뉴올리언스 지방 검사 '짐 개리슨(케빈 코스트너)'이 암살을 둘러싼 ‘진실’을 밝히기 위해 루이지애나 사업가 '클레이 쇼(토미 리 존스)'을 기소한다.   

   

음모론에 근거했음에도 <JFK>는 법정 드라마와 정치 스릴러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다. 진실을 옹호하는 매력적인 대사와 함께 이 영화의 법정 장면은, 이 목록에 있는 다른 어떤 작품에서도 볼 수 없는 긴장감을 선사한다. <JFK>의 방대한 내러티브는 미국 역사상 가장 논란이 많은 주제 중 하나로 우리를 안내하며 계속해서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12 : 신들의 법정 (Inherit The Wind·1960) 스탠리 크레이머

광신과 무지는 영원히 바쁘고 먹이가 필요하다"는 명대사는 오늘날에도 유효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1990년대가 범정 드라마의 황금기였을지 모르지만, 1960년대 법정 영화는 이 장르를 개척한 창의성으로 똘똘 뭉쳐있다. 이 시기의 영화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과학교사 존 T. 스코프스(John T. Scopes)가 테네시 주법에 금지된 진화론을 가르친 기소된 ‘원숭이 재판(1925)’을 다뤘다.    

  

아직도 세계의 곳곳에서 원숭이 재판이 계속되고 있다. 정치적 목적으로 특정 이념과 사상을 통제하려는 엘리트들의 타락, 조회수에 혈안이 되어 대중을 선동하는 언론의 해악, 반지성주의, 종교적 히스테리, 미국 정치사와 법조사에 길이 남을 법정 논쟁, 그 본질에 자리 잡은 수정헌법 1조 ‘정교분리의 원칙’ 등등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돋보이는 연출과 촬영 기법 덕분에 흥미롭게 즐길 수 있다. 아마도 변화에 대한 사회적 저항과 새로운 아이디어에 대한 두려움은 현대 장르영화 관객이 여전히 즐겁게 볼 만한 유산을 간직하고 있다.



#11 : 뉘른베르크의 재판 (Judgment At Nuremberg·1961) 스탠리 크레이머

아카데미 남우주연·각색상

1945년부터 1949년까지 열린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을 토대로 한 영화제목에 “Judgment”인 이유는, 인류의 양심에 근거하여 나치독일이 범한 죄악에 대해 단죄하는 심판이라는 뜻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이 법정영화에서 재판에 회부된 주역은 전쟁에 참가한 군인이 아니다. 히틀러 치하에서 독일 사법부의 일원으로 활동한 법조인들의 반인륜적 행위에 대한 처벌을 다뤘기 때문이다. 전쟁의 참상을 일깨우면서 연합국 검사와 독일 측 변호인의 치열한 법리논쟁과 심리전을 밀도 있게 그림으로써 반전영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독일 측 변호사 한스 롤프(막시밀리언 셀)가 던진 것으로, 국가의 명령을 받은 개인이 그 조직이 내린 불법적인 결정에 대해 어떻게 저항할 수 있으며, 어느 범위에서 책임을 지울 수 있는가를 묻는다.     


종종 ‘위에서 시켜서’ 했다는 소리를 듣는 경우가 종종 있다. 국정농단, 블랙리스트, 사법농단도 다 그렇게 시작된 일이다. 권력이 두려워서, 무지해서 그랬다는 변명이 따른다. 그렇다고 정의를 외면한 자에게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자신이 하는 행동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명령에 순종하는 것, 즉 사유불능성에 빠져 있는 것도 죄”라고 보았다. 무능력은 ‘악’과 다를 바 없다. 그것이 그녀가 말하는 ‘악의 평범성‘ 테제다.



#10 : 뮤직 박스 (Music Box·1989) 코스타 가브라스

베를린 영화제 황금곰상

친일부역자가 대물림되는 우리나라에서 이 영화가 가진 무게감은 남다르다. 헝가리 이민 2세은 ‘앤 탈봇(제시카 랭)’은 지금 미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변호사로 승승장구한다. 어느 날 아버지 앞으로 날아온 한 통의 기소장에 흔들리기 시작한다. 다정하고 인자한 아버지 ‘마이클 J. 라즐로’가 악명 높은 유태인 척결 부대 ‘애로우 크로스’의 수장으로 1급 전범이라는 죄목이었다.     

 

핏줄의 정와 정의 사이에서 기로에 선 주인공, 박진감 넘치는 법정장면과 도나우 강의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주인공은 위대한 결정을 내린다. 진실은 규명하기보다는 그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있냐고 되묻는다. 



#9 : 심판 (The Verdict·1982) 시드니 루멧

아카데미 각본상

몰락한 변호사가 의료사고 사건을 맡으면서 잃어버렸던 신념을 되찾고 정의를 실현하는 과정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법리적으로 의료과오(medical malpractice)를 규명하기란 매우 어렵기 때문에 당사자 사이에 조정 내지 화해로 분쟁을 종결하는 사례가 일반적이다. 프랭크 갤빈(폴 뉴먼)은 식물인간이 된 피해자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거액의 합의금을 포기하고 법정에서 진실을 밝히기로 결정한다.    

 

법정 드라마 장르의 모든 비트와 비유가  〈심판〉에서 완벽하게 구현된다. 영화는 거대 권력에 맞서 진실을 밝히는 변호사의 악전고투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면 〈심판〉은 그저 평범한 영화에 머물렀을 것이다. 약자가 무기력해지는 것은 단지 거대 권력에 패했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를 (거대 권력의) 제물로 여기며 패배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타성에 젖어버리기 때문이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심판〉은 우리에게 어려운 질문을 던진다. 자신이 누구인지 잊어버리고 존재의 이유를 잃어버린 채 돈이 생길 때마다 위스키 한 병에 소비한다면 어떻게 하겠냐고 되묻는다. 중요한 점은 갤빈이 거대 권력과 싸우기로 마음먹은 것이 처음부터 어떤 확고한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연히 식물인간이 된 피해자와 패배를 당연히 여기며 살아가는 갤빈의 처지가 유사하다고 변호사 본인이 느꼈다는 점이다. 주인공이 자신의 타성과 싸우면서 법정에서 정의를 찾으면 자기 자신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8 : 음모자 (The Conspirator·2010) 로버트 레드포드

링컨 대통령 암살사건 공모자 중 유일한 여성이자 미국 법무부에서 사형을 집행한 최초의 여성 메리 서랏의 이야기를 다뤘다. 여관을 운영하는 평범한 두 자녀의 어머니 ‘메리(로빈 라이트)’는 편의를 제공했다는 혐의로 붙잡힌다. 신참 변호사 ‘에이컨(제임스 맥어보이)’은 상관의 지시에 의해 내키지 않는 변호를 맡지만, 시간이 갈수록 메리가 무죄라는 확신이 들면서 적극적으로 움직이게 된다.


링컨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민중의 집단 광기와 어떻게 해서든지 사회 혼란을 막고 희생양을 찾아야겠다는 지배층의 정치적 결정이 에이컨과 메리를 압박한다. 링컨 암살 사건의 이면에 또 다른 이런 무고한 희생이 있었다는 사실이 먹먹하게 한다.  



#7 : 살인의 해부 (Anatomy Of A Murder·1959) 오토 프레민저

미시간주 대법원 판사였던 존 D. 볼커(로버트 트래버라는 필명으로) 쓴 동명소설이 원작이기 때문에, 주제에 대한 성숙한 접근 방식과 법정 절차에 대한 정확하고 사실적인 묘사로 유명하다. 판사 역의 조지프 웰치는 매카시의 경력에 찬물을 끼얹은 장본인으로 무게감을 더했다. 그리고 음악은 재즈의 전설인 듀크 엘링턴이 맡아 화제를 모았다.      


분명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서 느껴지지만 <살인의 해부>이 지속적인 영향력은 법과 도덕에 대한 해부에 있다. 영화는 살인죄와 법체계에 얽힌 도덕적 복잡성을 다뤄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다.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이 된 데에는 사건을 오로지 법정공방으로 전달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배심원들의 입장에서 판결에 참여하는 체험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법정 시퀀스는 합법성과 도덕성 사이의 모호한 경계에 대한 날 것 그대로의 솔직한 통찰력을 제공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정의를 추구할 때의 윤리적 난제에 대해 숙고하도록 유도한다. 이런 대담한 접근 방식은 당시 할리우드에서 법정 드라마의 입지를 굳히며 하나의 장르로 입지를 굳혔다.     



#6 : 영광의 길 (Paths Of Glory·1957) 스탠리 큐브릭

큐브릭은 끊임없이 전쟁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무자비하면서도 무능력한 두 명의 장군은 자살에 가까운 진격명령을 내린다. 거의 전멸하고, 소수의 생존자가 절뚝거리며 돌아오자 장군들은 작전실패의 책임을 병사의 비겁함으로 돌린다. 세 명의 병사들을 무작위로 뽑아 군사재판에 회부한다. 커크 더글라스는 군사재판에서 부하들을 지키기 위해 헌신적으로 병사들을 변호하는 대령으로 출연한다. 줄거리는 수아인 상병 사건을 느슨하게 구성했다.



#5 :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それでもボクはやってない·2006) 수오 마사유키

불합리한 일본의 사법제도에 맞섰던 한 남자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전철에서 치한으로 오해받아 2년 만에 무죄를 받아낸 그 남자와 그를 도운 그의 아내와 친구들의 용기 있는 행동에 (감독은) 관심이 갔다고 한다.      


치한이라고 거짓말을 한다면 곧장 풀려날 수 있는 사소한 문제인데도 주인공은 결코 그 간단하고 편리한 선택을 하지 않는다. 4달간의 구치소 생활을 하는 주인공의 일거수일투족을 자세히 담으면서 그 옥중생활이 얼마나 거칠고 불편한지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인간으로써 자신의 명예를 지키고자 하는 주인공의 의지는 꺾지 않는다.      


일본 사법제도는 사건의 경중을 떠나 형사재판으로 기소된 경우 99.9% 유죄로 판결되어지는 구조라는 것이다. 검찰과 재판부의 관료적 성과주의가, 사건의 진실을 따지 않고 무고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드는 비상식을 만든다는 문제점을 질타하는 직설화법이 매섭다.   



#4 :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 (A Separation·2011) 아스가르 파르하디

베를린영화제 황금곰·남녀주연·베를리너 모겐포스트 독자·에큐메니칼 심사위원상/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은 이혼소송에서 출발해 이란 사회가 가진 다양한 층위의 이슈들을 집약해놓았다. 고전적인 드라마 작법 덕에 이야기가 친숙하지만, 영민한 사회의식 때문에 법, 계급, 종교, 정치, 전통 등 논쟁적으로 제기한다. 이혼사유를 두고 첨예한 법적 공방에는 윤리적 딜레마와 사회의 단면이 연쇄적으로 이어져서 거대한 질문을 그려낸다. 일견 개인적인 차이로 인해 관계가 해체된다고 여겼던 것에서 사회적 동물이 짊어지고 가야할 사회적 의제의 의미로 확장시킨다.   



#3 : 나의 사촌 비니 (My Cousin Vinny·1992) 조나단 린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법정 코미디의 최고봉, 영화 역사상 미국 형사제도를 가장 정확히 묘사한 작품으로 메릭 갈랜드 법무장관부터 안토니 스칼리아 대법관까지 저명한 인사들로부터 법적 정확성에 대한 찬사를 받았다. 실제 로스쿨 수업에 교보재로 널리 활용되어 왔다. 실제 감독인 조나단 린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나의 사촌 비니〉는 미국이 겪은 모든 갈등이 법률의 개선을 통해 발전적으로 해소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북부 법이라고 모든 제도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는 ‘딥사우스(Deep South)’ 지역의 앨라배마에 뉴욕 삼류대학 출신에 수차례 낙방 끝에 6주전에 합격한 ‘비니(조 페시)’는 사촌동생을 변호하기 위해 내려온다. 보수적인 남부지역에 결혼도 안한 동거녀 리사(마리사 토메이)를 데리고 온 이방인에 대해 예일대 출신 판사는 아니꼬운 시선으로 지켜본다. 요란한 옷차림의 리사는 겉모습과 달리 현명한 여성이며 그녀의 기지와 지혜로 재판을 승리로 이끈다.     


코미디의 본질은 풍자와 해학을 통해 인간의 흉리(胸裏)에 담긴 부정적인 부분을 꿰뚫어볼 때 생긴다. 세상은 빠르게 변해가지만, 인간은 그 발전 속도를 따라가기 힘들다. 현실과 제도의 불일치는 사회적 통념과 행동양식에 대한 괴리를 발생시키고 급기야 이념적 대립과 계층 간 갈등을 유발시킨다. 영화는 남부에 팽배한 북부에 대한 반감, 명문 T14로스쿨를 우대하는 법조계의 관행, 보수적인 개신교 문화 등 정체된 사회의 법제도는 부패하기 마련이고 세상의 발전은 개방과 참여를 통해서만 이뤄진다는 사회발전의 원리를 담고 있다. 시대에 뒤떨어진 구닥다리 제도와 관습, 법률의 모순을 꼬집으며 경쾌하게 통쾌하게 상쾌하게 웃긴다.      


#2 : 라쇼몽 (Rashômon·1951) 구로사와 아키라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이탈리아 평론가상,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기억의 상대성을 다룬 영화 중에 제일 상석에 모셔야 한다. 현재까지 만들어진 영화 중 가장 위대한 영화 중 하나로 환영받고 있다. 


헤이안 시대, 폭우가 쏟아지는 어느 날, 폐허가 된 나생문(라쇼몽) 밑에 승려와 나무꾼이 멍하니 앉아있다. 그러던 중, 한 사내가 비를 피해 나생문 밑으로 들어오고, 나무꾼과 승려는 어떤 살인사건과 그 사건의 재판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세 사람은 시체를 발견한 나무꾼의 증언과 도적 타죠마루, 강간 당한 미망인, 죽은 사무라이(무녀에게 빙의)의 증언을 통해 진실을 쫓는다. 구로사와는 동일한 사건을 두고 각자 기억을 달리하는 과정을 통해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를 드러낸다.



#1 : 12인의 성난 사람들 (12 Angry Men·1957) 시드니 루멧

베를린 영화제 황금곰상

대한민국 헌법 제27조 제4항에 명시된 ‘무죄추정의 원칙’은 열 명의 범죄자를 잡지 못해도 한명의 억울한 피해자를 만들지 말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일선 형사와 검사는 조사하고 있는 피고인을 전제하고 수사하고 기소한다. 법률과 현실의 괴리 하에서 시드니 루멧은 인간의 본성과 도덕성을 되묻는다.     


영화는 배심원실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역대 최고의 실내 드라마 중 하나다. 그뿐만 아니라 이 영화는 90분이 채 되지 않는 러닝타임 동안 우리 사법 제도에 대한 많은 진실을 담고 있다. 12명의 배심원이 당면한 살인사건을 심의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미국 법원의 다양한 실패를 목격하게 된다. 일부 배심원은 자신의 개인적 사연이나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 어떤 배심원은 차라리 다른 일을 하고 싶다는 이유로 사건의 결과에 냉정하게 무심하다. 또 다른 배심원들은 사실보다는 공허한 수사에 휘둘려 감정의 노예가 되기도 한다.     


자욱한 담배연기 속에 이름 대신 번호로 통용되는 열띤 익명의 설득과 논쟁은 계속된다. 8범 배심원(헨리 폰다)은 동료들에게 피고인에게 사형을 선고하기 전에 증거를 재고하도록 토론할 것을 권유한다. 한 사람에서 시작된 ‘반란의 과정’은 인간사에 가장 원초적인 감정을 미국 사회의 취약점과 함께 엮음으로써 확 체감된다. 계층적, 인종적 편견과 함께 자신의 일신에 고유한 편견, 이 모든 판단자의 편견이 판단 받을 사건에 직접, 간접으로 투영된다. 폰다의 진지한 의문의 제기와 논리적인 설득에 각종 편견이 차례차례 무너진다. 논쟁이 전개되면서 배심원들은 하나둘씩 처음에 생각했던 것처럼 증거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12인의 성난 사람들〉는 무성의하고 안일한 대중의 편견과 예단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보여줌과 동시에 이러한 오류는 진지한 참여와 토론을 극복할 수 있다는 참여민주주의의 이상을 전한다. 이른바 '전문가' 관료가 운영을 독점하는 사법제도를 가진 나라 사람들에서는 낯설기만 한 영화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반드시 경청해야 할 본질적인 메시지가 그득히 담긴 명작이다.     


@임준규 님에게 이 글을 헌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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