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리나》는 90년대 MTV영화처럼 음악과 영상에 의존한다. 먼저 그레이의 영화음악은 감각적이다. 얼터너티브 R&B와 신스웨이브, 힙합의 기운을 전자음에 담았다. 요즘 유행하는 90년대 전자음악에 대한 텍스트를 강조한 점과 일렉트릭 퍼커션을 배제한 결정은 박수받아 마땅하다.
타란티노의 드렁크 샷
영상미를 살펴보면, 오프닝은 왕가위와 본 시리즈에 대한 오마주, 복도 전기톱 장면은 〈올드보이〉와 〈샤이닝〉에 대한 흥미로운 변주이다. 네온사인과 핸드폰 커버를 통해 렌즈 플레어를 남발하고 있으며, 총기 구입 장면은 서부극과 김지운에게서, 클라이맥스는 〈존 윅〉을 마지막 액션은 쿠엔틴 타란티노에 대한 존경심을 표출한다. 자 그럼 영화를 뜯어보자!
니콜라스 빈딩 레픈에 대한 동경
내면의 공허함
주인공 ‘옥주(전종서)’는 전직 경호원 출신이며 인간관계가 빈약한 독거녀다. 생일조차 혼자 챙겨야 하는 그녀는 케이크 사러 갔다가 점원이자 중학교 동창 ‘민희(박유림)’과 친해진다. 어느 날 유일한 친구 민희를 죽음으로 몰고 간 최프로(김지훈)라는 악당의 존재를 찾아 나선다.
제목의 의미는 민희가 촉망받는 '발레리나'라는 설정이 전부다. 악당은 포르노를 찍는 변태일 뿐이다. 그 외의 요소들은 직접적으로 스토리에 기여하는 바가 없다. 이충현 감독은 서사에 능한 이야기꾼이 아니다. 감독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재료를 감각적으로 재구성할 목적이다.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프로폐셔널한 주인공, 그가 처음으로 마음을 연 친구, 그녀를 둘러싼 배배 꼬인 음모 같은 것은 범죄 영화가 유행하던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무수히 변주되어온 기본 재료들이다. 감독은 익숙한 것에서 탐미적인 영상과 음악으로 포장한다.
영화는 복고를 표방한다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액션은 <본 시리즈>와 <존 윅>, 한국식 스턴트 액션을 벗어나지 않는다. 액션 장면은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지 않고 회상 장면 혹은 여성끼리의 연대와 우정을 강조한다. 니콜라스 빈딩 레픈처럼 심플한 플롯의 여백을 탐미주의적인 이미지와 그 화려함 속에 담긴 메타포로 채우려 한다.
미장센과 의상, 조명 등 시각적인 도구를 통해 전개된다. 텅 빈 방에 들어온 야수를 목격하는 장면은 텅 빈 내면에 야수성이 깃들었음을 암시하며, 번쩍이는 네온사온과 대비되는 거울에 비치는 반사 이미지는 내면의 고독을, 푸른빛에서 붉은색으로 바뀌는 조명(과 혈흔)은 순수성의 상실과 타락을 은유한다. 성 노예와 포르노, BDSM로 타자화된 미적 대상에 대한 소유욕을 묘사한다.
무덤덤한 복수극
곧이어 쾌감을 배제한 편집이 이어진다.
《발레리나》는 아드레날린의 분출을 의도하지 않는다. 이충현 감독은 철저히 이미지(와 음악)의 은유와 상징에 기대어 의미를 전달하는 전위적인 화법으로 일관한다. 한편의 뮤직비디오 같은 영상미, 흔들리는 카메라, 자극적인 설정, 대사보다 화면에, 구구절절한 설명 보다 사연의 생략을 통해 정서를 만든다.
그 과정에서 복수극이 챙겨야 할 두 요소를 탈락시킨다. 첫째, 복수의 당위성은 필터를 씌우고, 색보정하거나 오블리크 앵글로 비스듬히 촬영한다고 인물의 감정이 전달될 리 없다. 친구와의 드라마에 더 힘을 쏟아야 했다. 왜 복수를 해야 할 당위를 착실히 설명했어야 했다. 친구랑 친하게 된 과정을 짧게 플래시백으로 처리한다고 주인공의 심경에 몰입할 리 만무하다. 둘째는 복수의 카타르시스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굳이 주인공이 총기를 구입해야 했을까? 총기 소유가 불법인 대한민국에서 총격전을 벌이려면 〈존 윅〉의 콘티넨탈 호텔 같은 만화적인 세계관이라고 제시했어야 했다. 우리 현실과 동떨어진 《발레리나》의 세계는 탐미적인 영상과 맞물려 더욱 이질감을 부추긴다. 이렇기 때문에 시큰둥하게 화면을 바라보게 한다. 연출과 연기, 촬영, 음악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미학적 측면은 시청자의 감흥을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패착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