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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RU Mar 06. 2024

패스트라이브즈*엇갈린 인연

《Past Lives·2023》

《패스트라이브즈》은 한마디로 여성의 첫사랑을 다룬 로맨스 영화다. 어릴 적 울보였던 ‘문나영/노라 문(그레타 리)’의 곁에 있던 소꿉친구 ‘정해성(유태오)’과의 24년간의 길고 긴 인연을 담고 있다.


영화는 3부 구성으로 1부는 24년 전 캐나다 이민을 떠나기 전의 두 사람의 학창 시절을 다룬다. 2부는 12년 전, 스카이프(Skype)를 통해 노라와 해성은 컴퓨터 화면을 통해 서로를 바라보며 잃어버린 감정을 복원하려고 애쓴다. 12살의 소녀는 노벨상을 꿈꿨었고, 뉴욕에 사는 지금은 퓰리처상을 동경한다. 여기까지는 〈사랑의 불시착〉이전의 옛날 한국 드라마를 보는 기분이 들었다. 


3부는 2부로부터 12년이 지난 현재, 뉴욕을 방문한 해성과 재회한다. 해성은 지금은 무슨 상을 받고 싶냐고 묻지만, 노라는 더는 상 따위는 꿈꾸지 않는다. 해성이 거듭된 질문에 “음 토니상?”이라며 노라는 얼버무린다. 해성이 좋아했었던 이상주의자 노라는 어느덧 사라졌다. 그녀는 현재 아티스트 레지던시에서 만난 유대인 작가 ‘아서(존 마가로)’와 결혼해서 이스트 빌리지에서 살고 있다. 그렇게 인생은 그들의 바람대로 흘러가지 않고 각자의 꿈을 선택하면서 인연은 어긋난다. 



인연은 왜 엇갈리는 걸까? 사랑은 왜 변할까? 

극 중 아서와 노라가 처음 연을 맺을 때 인연이 불교에서 온 개념임을 설명하는 대사가 있다. 옷깃만 스쳐도 오백 겁(劫)의 인연이고, 부부로 맺어지려면 8천 겁의 인연이다. 1겁은 10년의 28승이라고 계산하면 어마어마한 시간이라는 비유로 봐야 할 것이다. 노라는 첫사랑 해성과 이뤄지지 않은 의도가 관객으로, 하여금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첫사랑인 해성과는 동화 같은 인연이 얽혀있지만, 그녀의 선택에 의해, 좌절되었다. 남편 아서와의 일상은 첫사랑보다 덜 로맨틱할 수 있지만, 현세의 행복을 얻었다는 모순에 부딪힌다. 

순서대로 1-2-3

그 수수께끼는 아래 3가지 장면에 담겨있다. 첫째, 해성이 나영의 눈물에 참지 못해 욕을 퍼붓는 장면, 둘째, 나영이 초등학생 때 해성이 바래다주던 것을 소중히 여기는 장면, 셋째, 아서가 울고 있는 아내를 위로하는 장면이 그렇다. 이 장면을 통해 우리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져야 한다.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인연의 실타래라는 것을, 어떻게 카메라에 담을까? 촬영 감독 샤비에 키르히너는 왕가위와 테렌스 멜릭을 참조한 것 같다. 자연주의적인 이미지는 한국인에게 아주 익숙한 개념이지만 서양인에게 생경하게 다가온다. 좀 더 살펴보자! 


영화는 노라가 느끼는 첫사랑과 후회에 초점을 맞췄다. 좌절된 첫사랑이 품고 있는 ‘절망적 숙명론’과 남편과의 행복한 일상에 ‘낙관적인 현세주의’가 양립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카메라는 종종 인물을 거대한 자연 속의 일부로 축소시키고, 시점 쇼트를 통해 누군가에 의해 지켜봐지는 연인의 모습을 포착한다. 바닥에 고인 물에 반사된 두 사람, 지하철 차창 밖에 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 센트럴 파크에 조그맣게 보이는 두 사람을 통해 인연은 일시적이고 순간적이라고 이야기한다. 개개인의 경험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로 둘러싸여 있지만, 인간관계와 이들을 향한 애정은 우리가 유일하게 일부나마 선택할 수 있는 요소다. 


남녀상열지사는 삼라만상에 비하면 사소한 일이다.

‘전생의 업보가 현생의 결과’라면 지금의 삶을 열심히 살면 후생에는 바라는 대로 이뤄질 것이다. 첫째, 해성이 나영의 눈물을 참지 못해 비난하는 장면은 둘의 관계가 순탄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예고한다. 둘째, 나영이 해성이 바래다주는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것은, 첫사랑을 잊지 않았다는 의미다. 그래서 2부에서 나영은 SNS를 통해 해성의 행방을 수소문하고 다녔다. 


셋째, 해성을 떠나보내는 노라가 계단에 기다리는 남편을 만나는 트래킹 숏을 통해 양립하기 힘든 두 가지 감정을 일체화시킨다.

두 남자 사이의 선택처럼 보이지만, 두 가지 삶의 방식에 대한 선택이다. 고국에 대한 향수,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해성’으로 대표하고, 이민 생활의 적응과 선택을 아서로 상징하고 있다. 결혼 상대로 아서를 선택했다는 것은, 한국이라는 고향을 떠난 이민자들이 미국에서 삶에서의 가치를 택했다고 봐야 옳다. 이것이 북미에서 폭넓은 공감을 얻고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오른 원천이다. 인연은 변하는 것이고 인간이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당나라의 임제 선사의 말을 빌려야겠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즉 ‘어디를 가든 그곳에서 주인이 되면 서 있는 그곳이 진리가 되리라’라고 말했다. 주변 환경이 어렵더라도 자신이 만족하여 사는 것이 제일이라는 것까지 의미를 확대해도 무방하다.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을 긍정하는 태도는 ‘카르페디엠(Carpe diem)’과도 일맥상통한다. 즉 셀린 송은 ‘사랑은 통제할 수 없는 것’이고, ‘인연은 계속 변하는 것’이라고 우리를 위로한다.


★★★★☆ (4.5/5.0) 


Good : 수처작주 입처개진

Caution : 아내의 첫사랑을 만나도록 허락하는 북미의 정서, 번역투의 한국어 대사


●전생(前生, 패스트 라이브즈)은 태어나기 이전의 삶으로, 지금 사는 삶을 현생(現生), 죽은 뒤 새로 받을 삶을 내생(來生)이라 한다. 이것들을 모두 아울러 삼생(三生)이라고 한다. 


■셀린 송은 반자적적인 이야기라면서도 로맨스는 허구라고 선을 그었다. 


■《패스트 라이브즈》을 보고 나서 허진호 감독이 떠올랐다. 〈8월의 크리스마스〉처럼 일상성에 화두를 던지며, 〈봄날이 간다〉처럼 두 사람의 거리만큼의 감정을 스크린 위에 고스란히 옮겨낸다. 우리 주변에 실생활에서 벌어진 일에서 주인공들의 정서를 대변한다. 시간과 공간을 바꿔가며 밀도 높게 인물의 감정을 따라간다. 변할 것 같지 않은 것이 변하고, 엇갈린 인연이 마음 한구석에 남아 미련, 애틋함 혹은 다른 형태로 생겨나는 미묘한 감정들을 성공적으로 담아냈다. 허진호의 〈행복〉처럼 사랑의 탄생과 생성, 소멸을 총망라해 특유의 섬세한 통찰력을 보여주며, 〈호우시절〉처럼 학창 시절의 떨림을 현재형의 사랑으로 불러내는 연인을 따라가되 그들의 꿈까지 함께 더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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