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균은 한국예술종합학교 1기 출신으로 2001년 졸업 이후, 단역으로 활동하다가 2004년 〈알포인트〉, 〈인어공주〉, 〈MBC 베스트극장〉, 〈KBS 드라마시티〉에서 업계에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한다. 〈하얀거탑〉의 진중한 내과의 최도영 역과 〈커피프린스 1호점〉의 인간적인 음악감독 최한성 역으로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다. “180도 달라질 순 없어도 늘 전작보다 5도, 10도 변해보고 싶다"라고 말하던 이선균은 배우로서 종횡무진 활약하다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그를 추모하는 의미에서 그의 필모그래피를 짧게 정리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게 없을 때 날 능동적으로 움직이게 한 것이 연기였어요. 연기가 무조건 목표는 아니에요. 행복하고 싶어서 하는 거죠. - 이선균
이선균의 출세작, 원래 최도영 역은 김명민이 맡기로 했지만, 장준혁으로 캐스팅되었던 차승원이 영화 〈이장과 군수〉에 캐스팅되면서 출연을 고사하는 바람에 김명민이 대신 장준혁 역할을 맡게 되었고, 공석이 된 최도영 역할이 이선균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이것이 신의 한 수가 되었다. 《하얀 거탑》이후 이어진 전문직 배역들, 〈골든타임〉 〈PMC: 더 벙커〉의 의사, 〈끝까지 간다〉와 〈악질경찰〉의 경찰, 〈성난 변호사〉의 변호사, 〈검사내전〉의 검사로 이어지는 엘리트 이미지를 이선균은 일상적인 몸짓으로 자연스럽게 인물의 내면적 취약함을 드러내어 캐릭터의 고정관념을 불식시켰다. 이런 연기 스타일은 그를 좋은 앙상블 파트너로 낙점하는 계기가 되었다.
《커피프린스 1호점》은 남장여자 고은찬(윤은혜)가 정략결혼을 피하기 위해서 고은찬과 연인 행세를 하는 최한결(공유)의 로맨틱 코미디로, 당시, 최고 시청률 27.8%를 기록했다. 이선균은 극 중 최한결의 사촌 형으로 고은찬이 여자라는 비밀을 지켜주고 고민을 들어주는 사람 좋은 캐릭터를 맡았다. 너그러운 남자지만, 한유주(채정안) 앞에서만큼은 울퉁불퉁한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일면이 있다. 메인 커플 고은찬과 최한결 못지않게 서브 커플 최한성과 한유주의 로맨스도 시청자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았다.
소심해서 할 말을 꾹꾹 참는 남자 이두현(이선균)과 할 말은 다 해야 직성이 풀리는 여자 연정인(임수정)은 7년 차 부부이다. 마침 이웃에 사는 이상한 남자 성기(류승룡)가 전설의 카사노바라는 걸 두현이 알게 되고, 아내와 이혼하기 위해서 그에게 정인을 유혹해달라고 부탁한다. 류승룡의 카사노바 연기가 빛나고, 임수정이 영화의 주제를 담은 대사를 맡았다면, 이선균은 두 배우가 뛰어놀 수 있게 밑바탕이 되어준다.
미야베 미유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주인공 선영/차경선(김민희)가 자신의 인생을 가짜로 설계하고 살아가는 그녀의 과거를 쫓는다. 선영의 약혼자 장문호(이선균)는 차경선이 타인의 신분을 훔친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진실에 접근하면 할수록 차경선을 최대한 믿어주려고 하고, 차경선을 약혼녀 ‘선영’으로 진심으로 사랑한 순정남으로 분했다.
훈훈한 일화 하나를 소개하자면, 이선균은 한국예술종합학교 후배 네 명이 재능을 펼치는 것을 못마땅히 여겨 변영주 감독에게 프로필을 주며 부탁했다. 그렇게 캐스팅된 진선규(사무장), 이희준(강선영의 전 남편), 김민재(문호의 친구인 은행원), 박해준(사채업자)은 지금은 모두 유명한 배우가 되었다.
드라마 《파스타》는 공블리 공효진의 귀여운 매력과 '봉골레 파스타 하나~'는 대표적인 유행어를 낳은 이선균의 버럭(?) 연기로 당시 최고 시청률 21.2%를 기록했다. 헤드 셰프 최현욱 역을 맡은 이선균은 동굴처럼 깊은 저음과 츤데레 캐릭터로 뭇 여성들의 마음들을 휘어잡았다. 과거 전 여자친구였던 오세영(이하늬)에게 배신을 당한 탓에 사랑 앞에서 마음을 열지 않았다가 서유경으로 인해 변하는 일종의 성장을 그리고 있다. 까칠하면서도 ‘내 여자’에게는 다정한 사랑꾼 모드로 돌변하는 이율배반적인 태도가 일품이다.
박찬옥 감독의 7년 만의 연출작, 《파주》에서 운동권 출신으로 철거대책 위원회에서 일하며 처제를 사랑하게 된 남자의 금기를 그렸다. 처제인 최은모(서우)의 시점에서 형부 김종식(이선균)와 미묘한 감정 그리고 언니 은수(심이영)의 죽음을 003년을 기준으로 8년 전, 7년 전, 3년 전의 비밀을 파헤친다. 그 오해의 장벽에서 90년대 운동권이 가져야 했던 죄의식을 고해한다. 이선균은 제11회 스페인 라스팔마스 국제영화제에서 이 작품을 통해 남우주연상을 수상하였다.
이선균은 영화 〈밤과 낮(2008)〉, 〈어떤 방문:디지털 삼인삼색(2009)〉, 〈첩첩산중(2009)〉,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2013)〉, 〈우리 선희 (2013)〉 등 홍상수 감독과도 여러 차례 작업했다.
그중에서 《옥희의 영화》에서 이선균 특유의 짜증 연기의 찐한 바이브를 만나볼 수 있다. 특히 15분 길이의 롱테이크 장면에서 이선균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 이 영화는 〈잠〉과 〈우리 선희〉 등에서 찰떡궁합인 정유미를 처음 만난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는 옥희(정유미)를 두고 남진구(이선균)과 송 교수(문성근) 사이의 삼각관계를 4개의 단편으로 엮은 옴니버스 형식이다. 세 남녀는 한날한시를 함께 보냈지만, 서로의 경험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 이상하게도 두 남자 사이가 묘한 공통점이 발견된다. 진구는 송 교수처럼 제자와 사랑에 빠진다. 그래서 진구는 송 교수의 과거이며 송 교수는 진구의 미래같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선균에게 세계적인 인지도를 안겨준 작품이다. 전원 백수인 기택의 가족이 장남 기우(최우식)의 고액 과외를 시작으로 글로벌 IT 기업의 CEO인 박동익 사장(이선균)의 저택에 입성하면서 일이 벌어진다. 비슷한 처지의 가정부 문광(이정은)과 묘한 라이벌 의식이 싹트며 영화는 점점 어두워진다. 박 사장은 겉보기엔 신사적이지만, 내면은 엘리트주의로 가득한 인물이다. 운전기사 기택(송강호)에게 킁킁거리는 모습은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부르주아의 특권의식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예시라 할 것이다.
대한민국 대표 ‘짜증’ 연기의 대가인 이선균은 되돌릴 수 없는 실수로 모든 일이 꼬인 고건수 형사 역을 맡았다. 아내의 이혼 통보와 내사 소식과 실수로 사람을 치는 사고, 어머니의 장례식까지 줄줄이 안 좋은 일을 겪게 된다. 경찰 내부에서 실종과 뺑소니 사건이 시작되고, 범인인 건수는 안절부절못한다. 의문의 목격자 박창민(조진웅)이 등장하면서 고건수는 ‘끝까지’ 살아남기 위해 애쓴다. 이선균은 비리와 수난에 휘말린 상황에서 선과 악으로 명확하게 나눌 수 없는 회색 지대를 연기한다. 그가 발버둥 칠수록 심판을 받는 것이라고 여겨지면서도 왜인지 애처롭게 느껴지게 된다.
《나의 아저씨》는 외로운 사람들끼리 서로의 그늘이 되어주는 이야기다. 부모 없이 차가운 현실은 온몸으로 받아온 이지안(아이유)과 아내의 불륜에 맘 편히 의논할 상대가 없는 한동훈(이선균)이 서로를 구원하고 의지가 되는 이야기다. 세상에 발을 디디고 살아가지만, 어딘가 홀로 남겨진 것 같은 공허함에 휩싸이곤 한다. 이선균 역시 ‘외로운’ 현대인으로 살아오면서 이 역할에 그간 배우로 걸어온 궤적을 나란히 겹쳐놓아 입체감을 살린다. 시청자들은 자신과 비슷한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꿋꿋하게 버텨내는 인물들을 보면서 덤덤하게 옆자리를 지켜주는 누군가를 만난 위로를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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