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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17*국부론에서 도덕감정론으로

《Mickey 17·2025》

by TERU
%EC%8A%A4%ED%81%AC%EB%A6%B0%EC%83%B7_2025-02-21_194149.png?type=w966 HE'S DYING TO SAVE MANKIND

영화의 캐치프레이즈를 보니 19세기 영국의 노인병이 떠올랐다. 당시 영국인의 평균수명은 24세로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에도 노화가 급격히 진행되었다. 왜냐하면 6살 때부터 14-16시간씩 노동했기 때문에, 수많은 노동자들이 영양실조와 과로사로 목숨을 잃었다. 이에 맞서 노동자들은 노동쟁의를 벌이며, 공산주의와 공리주의가 대안으로 떠올랐다. 공산주의의 등장은 정부와 자본가들에게 노동권`을 보장하고 근로시간을 줄이는 데 합의했다. 약 100 년이 넘는 투쟁 끝에 소련이 세워진 지 2년 뒤인 1919년 바이마르 공화국 헌법에 처음으로 명시되었다.


《미키 17》는 그러한 역사적 배경을 깔고 있다. 또 주인공 미키의 처지는 열악한 한국의 노동시장을 대입한 것이다. 대한민국은 2014년부터 11년째 '노동자의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 나라(No guarantee of rights)'로 세계 노동권 지수 최하위인 5등급에 머물고 있다. 5등급 국가 중에 홍콩 빼면 전부 개발도상국이다. 홍콩은 중국이 5등급이기에 받은 것이다. 산업재해 사망률도 2023년에야 1일 기준 1명 이하로 떨어졌다.


《미키 17》는 위험한 일에 내몰리고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나 프린트되는 복제인간 이야기는 오늘도 벌어지는 산업재해를 알레고리로 깔고 있다. 이런 비극을 영국식 부조리 코미디로 승화시키고 있다. 1인 2역을 맡은 로버트 패틴슨의 연기가 그런 영화의 특색을 더 돋보이게 한다. 그럼 본격적인 영화 속 알레고리를 뜯어보자!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에 딱 세 번 나오는 ‘보이지 않는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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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은 노동 착취를 고발할 의도는 아니라는 데에 있다. 『도덕감정론』이라는 책이 떠올랐다. 『국부론』의 애덤 스미스가 쓴 책으로 서두에 “우리가 타인의 슬픔에 함께 슬퍼하는 것은 너무 명백해서 증명할 필요조차 없는 사실이다”으로 시작한다. 극 중 미키 반스 (로버트 패틴슨)와 나샤 에쟈야 (나오미 애키)의 사랑 이야기는 저 문장의 문맥과 일치한다. 〈옥자〉의 생태주의로 읽히는 비인간 존재와의 공존을 모색하는 태도도 저 측은지심(惻隱之心)에 근간을 두고 있다.


자본가들은 보이지 않는 손을 들먹거리며 노동착취, 임금체불, 탈세, 투기, 불공정 경쟁 등을 옹호해 왔다. 근로조건 개선, 최저임금 상승, 중대 재해처벌법 등 최소한의 안전 규제도 반대하며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는 것을 반대하는 명분으로 삼아왔다.


그러나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의도치 않은 결과로써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유익함을 가져다준다는 것은 기업가, 자본가의 탐욕을 정당화하는 ‘시장 논리’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스미스에게 가장 중요했던 명제는 ‘개인과 사회의 균형 발전’이었다. 개인은 고립된 혼자가 아닌 ‘공감’이라는 도덕감정을 천성적으로 지니고 있는 공동체의 일원이었다.


그렇다, 《미키 17》에서 봉준호가 말하는 해법은 스미스의 ‘공감’이다. 보이지 않는 손은 구성원들 간에 상호공감과 배려가 작동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자유 방임주의를 위한 슬로건이 아니었다. 미키 같이 소모품으로 버려지는 것을 넘어, 공감이라는 기제로서 소통하는 사회적 관계망을 형성하라는 메시지인 것이다. 이것은 에드워드 애슈턴의 원작소설 《미키 7》에서의 해법이다. 애슈턴이 『도덕감정론』의 ‘공감`을 소설에 끌어왔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미키 17》의 층위는 대한민국의 열악한 노동권, 『도덕감정론』의 공감 그리고 (아직 리뷰에서 다루지 않은) 착취로 이득을 보는 엘리트로 구성되어 있다. 마지막 세 번째 층위를 설명하고 리뷰를 끝마치겠다. 봉준호 감독은 마샬 부부를 과거 독재자들 필리핀의 마르코스 부부,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 부부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인터뷰했다.


원작에 남편 혼자 나오던 것을 부부로 바꾼 감독의 결정은 놀랍다. 그 결과, 2021년에 쓴 극본으로 2022년에 촬영을 끝내고 2023년에 후반작업을 끝낸 영화가 윤석열, 김건희를 연상시킨다. 그웬 조핸슨 (토니 콜렛)은 이멜다 마르코스와 엘레나 차우셰스쿠와 비슷하면서도 김건희가 오버랩된다. 왜냐하면 독재자들은 국민을 위해서 정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독재자들은 자신과 주변 사람을 위해 권력을 휘두를 뿐이다. 소수를 위한 정치는 당연히 패망할 수 없는 것이다.


많은 비평가들이 영화가 덜컹거린다면 일관성이 없다고 하지만, 『도덕감정론』의 공감을 돋보기로 삼으면 영화의 메시지가 한 가지 결론으로 도출된다. 스미스가 가장 주안점을 둔 ’개인과 사회의 동반성장‘은 구성원끼리의 ’공감(측은지심)‘으로 연대되어 있다면 보이지 않는 손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고 설파하고 있다. 그리고 SF 영화일수록 사회과학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봉 감독은 다시 한번 해냈다.


★★★★ (4.2/5.0)


Good : ’공감(측은지심)`이 자본주의 치료제

Caution : 풍자극 너머에 인류에 대한 희망이


●애덤 스미스는 직업이 윤리학자(도덕철학자)였기에 함께 나누는 공유의 개념을 개인의 이기심을 상징하는 보이지 않는 손보다 더 강조했고, 국부의 증진보다 사회구성원 전체가 공감하고 배려하는 ‘도덕감정’에 먼저 주목했다. 경제학자들은 보이지 않는 손의 조화를 단지 시장의 자기 조절적 기제로 써먹지만, 스미스는 공동체에 속한 자유로운 개인이 공동체에 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이기심과 탐욕을 부릴 것이라는 사회적 행위의 조정양식인 것이다. 스미스는 〈국부론〉의 저자로서 업적을 인정받아 부와 명예를 누렸다. 국부론이 스미스의 저서 중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정작 본인은 국부론보다는 〈도덕감정론〉을 더 높이 평가했다. 그는 죽기 전 자신의 묘비명을 〈도덕감정론〉의 저자 애덤 스미스라고 적어주길 바랐다고 한다.


■마크 러팔로가 연기한 정치인 캐릭터 '예로니모 마샬'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연상시킨다는 물음에 봉 감독은 마샬은 전부 과거의 독재자들이나 나쁜 정치인들의 모습을 융합해서 만들었다고 하며, 레퍼런스로 삼은 인물들은 모두 (현역이 아닌) 과거의 한국 정치인, 미국 정치인이라고 한다. 만약 마샬을 보며 현시대의 누군가가 떠오른다면 "역사는 반복된다는 분명한 증거"라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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