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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른 Oct 20. 2022

024. 내 몸에 날개를 달고 하늘 저 한가운데로

2021년 파리 시간으로 7월 5일 18시 09분




  파리에 오겠다는 계획이 푹 익다 못해 다 낡아서 떨어질 정도로 오래돼서 이제 환상 같은 건 일절 없다 싶던 나에게도 몇 가지의 소박한 로망은 있었으니, 그 중 하나가 바로 자전거였다.


  나는 자전거를 잘 못 타지만 자전거 타기를 좋아한다. 한국에서도 실력에 비해 과한 빈도로 자전거를 타곤 했었다. 혹시 카카오바이크를 아시는지. 서울에 따릉이가 있다면 분당에는 카바가 있었다. 따릉이가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저렴한 일반자전거 공유 서비스라면, 카카오바이크는 카카오라는 사기업에서 운영하는 비싼 전기자전거 대여 서비스다. 송도와 분당에서 한정적으로 시범운행하면서 서비스를 시작했는데, 전주와 울산 등 조금씩 그 범위를 넓혀가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서울에서 학교를 다닐 때도 따릉이를 가끔씩 타고 한강 일대를(정확히는 중랑천을) 종종 달렸었지만, 가파른 오르막길도 슝슝 오르는 전기자전거에 맛을 들이면 쉽게 헤어나기 힘들다. 날씨 좋은 날, 노란 카카오바이크 한 마리를 잡아타고 기분 좋은 음악을 들으며(위험하다. 하면 안 된다) 탄천을 따라 달리면 그야말로 천국이 따로 없다. 온몸으로 느껴지는 바람에 걱정거리들이 다 씻겨 내려가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정확히는, 어떤 걱정거리도 애초에 다 가진 적 없었던 것처럼 되어 버린다. 사람은 반드시 햇볕을 쫴야 한다지만, 내 생각엔 일정량의 바람을 쐬는 일이야말로 빼놓을 수 없는 것 같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고민이 다 불꽃놀이마냥 펑펑 터져버리고 마치 내 몸에 날개를 달고 하늘 저 한가운데로 슝 날아올라가는 것 같은 짜릿한 느낌을 느끼고 싶다면, 경기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잠실구장 내야석에서의 야구경기 관람을 권한다. 물론 그 대신 응원하는 팀이 진다면 전인류의 스트레스를 혼자 다 끌어안는 듯한 괴로움을 얻을 수 있다는 작은 단점이 있다. 아무튼 그곳에 앉으면 파아란 경기장을 아래로 굽어보는 좌석을 향해 멀리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몹시도 시원하다. 그 바람은 소피와 하울이 하늘 위를 걷게 하는 바람, 토토로와 함께 우산을 쓰고 날아다닐 때 머리칼을 헝클어트리는 바람이다.


  앞바구니에 바게트를 길게 꽂고 챙이 넓은 모자를 쓴 채 자전거를 타고 파리의 길거리를 누비는 모습은 언제부터 사람들 머릿속에 각인된 걸까? 바게트와 모자까진 몰라도(참고로 프랑스 자전거라고 특별히 바구니가 깊지는 않아서 보통은 바게트 같은 건 안 들어간다) 나도 파리에 가면 자전거만큼은 꼭 타고 다니겠노라고 막연히 다짐하곤 했었다. 물론 이 다짐은 경기도 광주라는 애매한 지역에 살면서 서울 왕복 네 시간, 분당 왕복 두 시간을 버스에다 버리는 일(지하철 안 다닌다)을 10년 이상 거듭해온 한恨 때문이기도 하다. 어디든 자전거로 다닐 수 있는 거리에 위치한 집, 그래 나는 그걸 원했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 이루어져서, 집에서 매일 가는 어학원까지가 자전거로 딱 14분 정도 걸린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이용하는 것보다 빠르다. 한 가지 복병은 전기자전거를 이용할 수 있느냐다. 파리에는 ‘벨리브Velib’라는, 파리 버전 따릉이가 있는데, 초록색 일반자전거와 파란색 전기자전거로 종류가 나뉘어 있다. 정류장에 어떤 자전거가 주차되어있는지는 물론 랜덤. 내가 사는 아파트 앞에, 그러니까 정말 문자 그대로 우리 아파트 바로 앞에 벨리브 정류장이 하나 있는데, 여기에 이용 가능한 전기자전거가 없는 날은 일이 좀 복잡해진다. 집에서 학원까지가 오르막길이기 때문이다. 수년간 꾸준히 상하체 근력운동을 해왔지만 이건 불가능하다. 수년간 자전거로 오르막길 오르는 연습만 했으면 몰라도. 일반자전거로 오르막을 오르는 사람들을 보면 늘 놀랍다. 늘 커다란 내적 박수를 친다. 아무튼 이 자전거를 정기권 없이 그냥 이용하면 30분에 1유로(일반), 2유로(전기) 이런 식이지만, 월 정기권을 끊으면 한 달 만 원에 거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정기권에도 종류가 있어서 고민을 한참 한 끝에 나는 결국 모든 종류의 자전거를 거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만 원짜리 정기권을 끊었다. 단 이 정기권의 이용 조건은 1년 약정이라는 건데,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면 위약금을 물지 않아도 된다고 들었다. 파리에 살아야 벨리브도 타는 거니깐.


  최근 본 어떤 영화에서, 그 장소가 파리임을 나타내기 위해 짧게 화면에 담긴 풍경이 바로 길거리를 다니는 수많은 자전거들이었다. 마치 런던을 위해서는 늘 빨간 2층 버스를 택하듯이. 파리에 와 본 사람은 참 자전거가 많이 다니는 도시라는 걸 알 것이다. 몇 년 전 베트남에 갔을 때 예상보다도 더 오토바이가 많아서, 말하자면 오토바이가 거의 보행자처럼 다니는 모양새여서 제법 놀랐었는데, 여기에서 자전거가 그 정도는 아니라 해도 그만큼 이용하기가 편리하게 되어 있다. 거의 모든 도로에 충분한 자전거도로가 마련되어 있고, 운전자들도 도로 곳곳에 자전거가 다니는 걸 자연스럽게 여긴다.(배려하고 말고는 각 운전자들의 선택이지만) 조금만 걷다 보면 벨리브 정류장들이 계속계속 등장하고, 라임Lime 같은 사설 전기자전거나 전동킥보드, 스쿠터 들도 제법 많다.(하지만 정말 엄청나게 비싸기 때문에 절대 타면 안 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내가 더 이상 걷지 않게 된 경위다. 이곳에 도착한 첫 몇 주 동안은 버스나 지하철을 아무리 탄다고 해도 그 사이사이를 끝없이 걸어야 했기 때문에 매일같이 만 보씩을 걸었었는데, 이젠 그때만큼 길거리의 모든 것이 신기하지도 않을뿐더러 100미터 정도만 이동을 할래도 주변에 벨리브 없나를 두리번거리게 됐다. 거의 50%에 가까운 확률로 고장난 자전거들이 많아서, 이젠 정류장의 다른 벨리브 사냥꾼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도 하곤 한다. 그거 돼요?Ça marche? 아뇨.Non. 이것도요.Celui-ci aussi.


  처음에 말했듯이 나는 자전거를 결코 잘 타지 못한다. 매일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도 매번 도로에서 차들과 함께 달릴 때마다 무서워서 죽을 것 같다. 내 뒤를 쫓아오는 다른 자전거들도 신경 쓰이고, 좁은 길을 빠져나갈 능력이 없어서 어버버거리고 있으면 주변 모든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 같아서 더 식은땀이 나기도 한다. 그럼에도 내가 꿋꿋이 자전거를 타고 다닐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 아 뭐 어때, 라고 생각할 줄 알기 때문이다. 한 번은 정신 차려보니 트램이 다니는 레일에 들어와 버려서 트램이 언제 와서 나를 덮칠지 모른다는 생각에 얼른 인도로 올라서려다 그대로 앞으로 자빠져버렸다. 사람 많은 길 한복판에서 엎어져 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런 때는 아픔보다 쪽팔림이 문제다. 잠시 후 자전거 한 대가 맞은편에서 다가오더니 나를 거들떠도 안 보고 지나쳐갔다. 모른 척해주는 게 고맙긴 하지만 그래도 좀 매정하네 생각할 때쯤 다음 자전거가 가까이 오며 한 마디를 던졌다. 괜찮냐?Ça va? 거 아주 상당히 괜찮다고 쿨하게 웃으며 대답한 다음 쿨하지 못하게 후들거리는 두 다리로 자전거를 끌고 가던 길을 마저 갔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도 심장은 진정되질 않았지만, 그때 넘어져 본 덕에 이후로는 트램 레일을 아주 조심하게 됐다. 그리고 이곳 파리의 길바닥에서 뭔가 일이 풀리지 않을 때면 쓸 수 있는 유용한 무기가 또 하나 있지 않은가. 짧고도 속시원한 한국어 욕 몇 마디. 한국에 사는 여러분은 써먹을 수 없으니 대신 프랑스어 욕을 가르쳐주겠다. 퓌탕Putain! (농담이다. 나쁜 말이니 써먹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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