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른 Oct 20. 2022

023. 파리에 있어 가장 좋은 점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2021년 파리 시간으로 7월 2일 23시 21분




  우리는 열한 시까지 생 미쉘 분수(la fontaine Saint Michel) 앞에서 모이기로 되어 있었다. 거의 최근 2주 내내 춥고 흐리고 비 오던 날씨가 오늘 아침이 되자 갑자기 갰다. 놀라운 타이밍이었다. 출발부터 이미 늦어버린 나는 지하철역에서 내려 부랴부랴 생 미쉘 다리를 건넜다. 새파란 하늘과 물결이 주름진 센 강과 하얗고 오래된 건물들이 이루는 언제 봐도 근사한 조화를 향해 빠르게 셔터를 눌러대면서. 약속장소에 가까워지자 언뜻 봐도 국적이 다양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분수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바로 앞에는 또 다른 한 무리의 관광객들이 누군가의 설명을 경청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횡단보도를 건너, 막 단체사진 촬영을 마친 다국적 무리에 합류했다.


  오늘은 어학원에서 야외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내가 파리에 도착한 후로 줄곧 한 번쯤 가보려 했으나 매번 아쉽게 스치고만 말았던 뤽상부르 공원(le jardin du Luxembourg)에 간다고 했다. 생 미쉘에서 출발해 라틴지구(le quartier latin)의 오래된 거리를 지나 팡테온(Panthéon), 소르본 대학(la Sorbonne), 오데옹 극장(Odéon Théatre)을 죽 거쳐서 뤽상부르 공원에 도착하는 루트로 이동했다. 패키지 관광도 아니고 이렇게 여러 명이 몰려다니면서 현지인의 설명에 따라 관광지를 차례로 훑다니, 기분이 묘했다. 어학원에 가던 첫날부터 한 생각이지만, 이 어학원이라는 곳이 다 큰 성인들을 참 묘하게 어릴 때로 돌아가게 한다. 그 책상이며 의자, 학생들과 선생님들, 선생님이 하는 말을 따라하거나 간단한 질문에 답하면서 진행되는 수업과, 오늘 같은 현장학습까지. 모든 것이 열한 살 때 다니던 키즈 헤럴드 스쿨과 하나도 다를 게 없었다. 그때 내 영어이름은 제니퍼였고, 내 ‘원어민’ 담임 선생님은 제프였다. 몇 년 뒤 경기도로 이사를 하고 중학교 때 단체로 간 영어마을에서 나는 그를 우연히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워낙 파리의 중심부이자 두 달 새 벌써 몇 번을 들락거린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가 위치한 곳 근처라 거의가 이미 한두 번씩 구경을 했거나 언뜻 지나치기라도 해 본 곳들이었다. 선생님은 이 길이 어떤 길이고, 저 건물은 어떤 건물인지 틈틈이 설명을 해주었고 나는 나름 대답도 질문도 심심찮게 던졌지만 솔직히 딱히 기억에 남는 건 하나도 없다. 내가 수능 때 역사 과목을 한 과목도 선택하지 않은 데는 다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오늘을 마무리하는 지금, 눈앞에는 자꾸만 초록의 뤽상부르 정원이 한가득 펼쳐진다. 오늘은 7월의 둘째 날. 온 파리가 여름 맞이 세일을 시작한, 하늘도 맑은 여름의 초입이었다. 드넓은 공원에는 녹음처럼 사람들도 우거져 있었다. 이제는 파리의 상징과도 같이 느껴지는, 공원 어디에나 놓여있는 시민을 위한 초록 의자들에 편히 걸터앉아서, 책을 읽거나, 낮잠을 자거나, 함께 앉은 이와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 공원의 사람들. 공원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나를 확 덮친 것은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기이하리만큼 크게 느껴지는 고요함이었다. 아니, 분명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니 고요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마치 풀잎 하나하나 흔들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처럼 드넓은 공원 전체에 흩뿌려져 있는 촉촉한 정적감이 있었다. 이곳의 사람들은 모두 제각기 그 정적에 몸을 편히 기대고 있었다. 공기 중에는 한가득 실려오는 향기로운 꽃 냄새, 높고 넓은 나무들과 대칭을 이루며 초록빛의 작은 호수를 이루고 있는 분수와, 더운 태양을 친절히 가려주는 두툼하고 올록볼록한 뭉게구름들. 그리고 이곳에 연인, 저곳에 가족, 한켠에 친구들과 다른켠에 아이들. 한 달 남짓 함께 수업을 들은 사이인 우리들은 그 사이를 건너며 서로에게 늘 같은 것을 묻는다. 우리 모두는 서로가 과연 왜 파리에 온 것인지가 항상 궁금하다. 그리고 언제나 확인한다. 저 사람도 나처럼 꽤나 용감하구나.


  훈은 학창시절부터 사진을 찍었다. 사진학과에도 진학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는 더 이상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그가 속한 세상은 사진이 그가 믿어오던 것보다 훨씬 더 작은 일밖에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왜, 라는 한 글자를 이고 파리로 건너온 그는 이곳에서라면 다시 예술을 겪어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중국에서 태어나 학창시절을 전부 부다페스트에서 보낸 소피는 패션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파리로 건너왔다. 반에서 가장 잘 웃는 학생인 그녀는 늘 나를 볼 때마다 오늘 머리가 맘에 들어, 자켓이 예쁘다, 하며 살가운 칭찬을 해준다. 주말에 뭐 할 거냐는 선생님의 질문에 그는 동사 시제 변화에 열심히 실패해가며 남자친구와의 기념일이라고 말한다. 우크라이나에서 온 타티아나는 미인이다. 프랑스어를 누구보다 어려워하는 그녀는 나보다 겨우 조금 더 연배가 높아 보일 뿐인데, 서른 살과 스물여덟 살 먹은 아들들이 있다고 한다. 하얀 원피스에 하얀 미니백을 메고 초록의 뤽상부르와 완벽히 어울렸던 오늘의 그녀에게 나는 조금 더 많은 질문을 하고 싶었다.


  정해진 수업시간이 끝나고 이제 어떻게들 할 거냐는 선생님의 물음에 많은 학생들이 공원에서 조금 더 시간을 보내다 돌아가겠다고 했다. 파리에 있어 가장 좋은 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아마, 바로 내가 파리의 멋진 풍경의 작은 일부가 될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확실한 허기가 미세한 두통을 야기하기 시작하는 오후 한 시, 그렇게 한 명의 프랑스인과 여러 명의 외국인들은 제각기 푸르른 뤽상부르의 풍경 속으로 하나둘 흩어져갔다.










이전 17화 022. 아는 것을 가르치고 모르는 것을 배우는 일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