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파리 시간으로 7월 1일 22시 34분
관광객 모드는 금세 해제되고 말았다. 뭐, 내 이럴 줄 알았지. 어학원이 끝나면 딱히 할 일도 없고 그대로 집에 들어가기엔 아쉬우니 어디라도 좀 쏘다니며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아이폰에 담던 게 처음의 일상이었다면, 요즘의 일상은 훨씬 더 단조로워졌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어학원에 출석하고 이 시리즈를 연재하는 것 외에 한 가지 더 매일 해야 하는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일을 시작하게 됐다. 정확히 말하면, 일을 늘리게 됐다. 나는 이미 스무 살 무렵부터 얼추 십 년 가까이 계속 학생들을 가르쳐오고 있는데, 프랑스에 오면서는 한 팀하고만 화상으로 수업을 이어가던 중이었다. 그리고 한 업체로부터 수주를 받아서 가끔(대충 한해에 손에 꼽을 정도의 빈도로 가끔) 수요에 따라 스크립트 작성하는 일도 해오던 게 있었다. 이 일을 다른 업체하고도 하는 중이고, 또 매일 온라인으로 한국어 과외를 하게 됐다. 순전히 학생 쪽에서 그런 스케줄을 희망해서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오후마다 한 시간씩 수업을 한다. 아직도 왜 그렇게까지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처음에 실수로 말도 안 되게 낮게 책정해버린 내 시간당 수업료가 아마 이유였겠지라고만 추측하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매일 오전에 어학원 수업을 들으러 나갔다가, 늦어도 오후 네 시 정도에는 얌전히 집에 들어와서 노트북을 열고 수업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수업은 겨우 한 시간이기 때문에, 수업이 끝난 뒤에 다시 집을 나서도 된다. 아니면 아예 아침에 노트북을 챙겨나간 다음 오후에 어디 카페에 앉아서 수업을 해도 된다. 둘 다 해봤다. 근데 아무래도, 집에 있자니 영 편하고 좋은 거 있지.
이런 걸 보고 적성이라고 부르는 건진 모르겠지만, 만으로 8년 반 동안 가르치는 일을 할 수 있었던 건 바로 그게 즐겁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잠깐, 나는 사범대에 진학했거나 국문과에서 교직이수를 했거나 임용고시를 봤거나 하다못해 교원자격증 코스 같은 것에 등록조차 해 본 적 없는 완전한 야매 선생이다. 얼마나 야매 선생이면 야매 선생이라는 말 따위를 쓰겠나. 전세계의 정식 선생님들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그러니 정확히 따지면 선생이 적성인 게 아니라 야매 선생 정도가 내 적성에 맞는다고 하겠다.)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이십대 초반에는 왜 다른 사람들이 수업 준비라는 걸 하는 건지 이해를 못했었다. 그냥 그 때 그 때 책에 있는 대로, 내 머릿속에 있는 걸 가지고 수업했다. 당시 학생들에게 미안하기도 하지만, 수업준비 없이는 수업을 할 수 없게 된(늙어버린) 지금의 내 수업이 그 때의 수업보다 딱히 더 낫지는 않다. 그냥, 그땐 그만큼 젊었던 거다. 수능을 친 나이로부터 멀어질수록 뇌는 빠르게 늙어간다.
내가 스무 살이 아니라 스물한 살 때부터 과외를 시작한 데는 이유가 있다. 스무 살 때는 내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게 정말 양심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남의 인생을 망칠 권리가 나한테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누굴 가르쳐 가르치긴. 그래서 그냥 아르바이트를 했다. 레스토랑, 카페, 빵집, 호텔 등. 한 달 먹고살 만한 돈을 벌려면 일주일 내내 일해야 한다는 단점은 둘째 치고, 한두 달을 못 버티고 자꾸만 잘렸다. 그냥 내가 봐도 나는 잘릴 만했다. 집이 멀다는 핑계로 툭하면 지각에다, 별로 성실한 일꾼이 되지도 못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교 1학년 때를 돌이켜 보면 아무래도 아르바이트를 한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축제에 싸이가 와도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을 정도였으니 말 다했지. 그렇게 버스비가 떨어지면 학교 한번 빠지고, 밥값이 떨어지면 한 끼 굶고, 뭐 그런 식으로 지내다가 결국 과외를 시작했다. 내가 망치게 될 인생의 주인에게는 너무 미안하지만 아무래도 내가 일단 먹고 살아야겠다, 그땐 그냥 그런 마음이었다.
국문과에 진학한 고등학교 선배가 한 명 있었다. 이 선배가 ROTC라 여름방학 동안 훈련을 위해 자리를 비워야 해서, 내가 잠시 선배가 가르치던 고3 학생 하나를 대신 맡게 됐다. 두 달이 지나고, 어머님은 나에게 말씀하셨다. 김 쌤한텐 미안하지만, 그냥 선생님이 수능 때까지 계속 수업해주시면 안 되겠냐고. 오. 나는 결국 그렇게 그 친구가 대학 가는 모습까지 지켜보게 됐다.
나는 내가 단순한 관종이자 투머치토커라고만 생각했었는데, 그걸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는 내가 스스로 알고 있는 지식을 누군가에게 설명하는 일을 좋아한다는 거였다. 또 누군가와 있을 때 분위기가 처지거나 어색해지는 걸 못 참는 습성 때문에 학생에게 쉬지 않고 농담을 하거나 장난을 치는 것도 한 몫을 한 모양이었다. 무뚝뚝한 K-아들내미로서 그동안 숱한 과외 선생들을 붙여줬어도 한 번도 수업을 딱히 좋아한 적 없었던 그 학생이, 처음으로 국어 수업이 재밌다, 이 선생님하고 계속 수업하고 싶다, 하는 요지의 발언을 해 어머님을 심히 감동시켜버린 것이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학창시절은 특별하고 의미 있겠지만, 나는 때론 지금의 삶도 어느 정도 중고등학교의 연장선이라고 느끼곤 할 정도로 인생에서 학창시절을 크게 받아들인다. 길에서 교복 입은 학생들을 보면 갑자기 혼자 눈물을 훔치곤 하는 정도. 이 말에는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그건 특히 내가 좋은 선생님들을 참 많이 만나서이기도 하다. 학교나 학원 선생님, 하다못해 인강 선생님으로부터도 나는 너무 많은 걸 배웠다. 외워야 할 지식이 아니라 세상과 삶을 배웠다. 그래서 나는 절대 선생님이 될 수 없다고, 이미 고등학교 졸업 전에 생각을 정리했었다. 내가 되기에 선생님은 너무 중요한 존재라고, 선생님은 정말 진짜로 훌륭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거라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런 마음조차 어느 정도 교만한 생각이었다. 양아치 야매 선생인 나를 제법 괜찮은 스승으로 만들어주는, 영특하다 못해 아름다운 수많은 학생들을 만날 때마다 깨닫는 부분이다. 아이들과 겪은 일들이라면, 이 지면에 결코 다 적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문득, 이 친구들이 어느 한편으로 내가 이십대를 잘 버틸 수 있게 꾸준히 도와주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한국어 수업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너무 떨리고 긴장돼서 오후에 있을 한 시간짜리 시범수업을 앞두고 이른 아침부터 학원에도 못 가고 하루 종일 벌벌 떨기만 했다. 스트레스, 그 자체였다. 예약된 첫 수업을 캔슬하면 페널티가 가해진다는 사이트의 규정 때문에 수업을 취소하거나 미룰 수도 없었다. 그렇게 꼼짝없이 화면을 마주한 순간, 천사 같은 리아가 내 마음을 통째로 녹여버렸다. 리아는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는 열세 살짜리 미국 소녀다. 정답을 맞출 때마다 ‘예이~’하는 특유의 탄성을 내지르는데, 그럴 때마다 너무 귀여워서 노트북 화면을 뚫고 들어가 볼을 깨물어주고 싶다. 내 모국어를 가르치는 일은 대학 입시를 시키는 것보다 어떤 면에서 더 뿌듯하고 즐겁다. 내 서툰 영어로 베개, 옷, 쬐다 같은 사소한 단어들의 뜻을 일러줄 때마다 그 새로움에 놀라는 아이들과 보내는 한 시간씩은 요즘 내 하루하루에 활력을 더해준다. 가르친다는 것, 누군가의 성장을 꾸준히 지켜보고, 그저 선생이라는 이유만으로 존중받을 수 있다는 것은 세상의 다양한 직업들 가운데서도 가장 특별한 특권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이렇게, 요즘 내 하루는 아는 것을 가르치고 모르는 것을 배우는 일로 채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