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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른 Oct 20. 2022

021. 언니, 저 소리 들려?

2021년 파리 시간으로 6월 30일 22시 35분




  시즌 1의 마지막 글을 발송한 날이었다. 스무 번째 이야기를 완성해 보낸 다음, 노트북 앞에 앉아 잠시 소소한 감정들의 잔치를 누렸다. 한 달 동안 매일 쓴다는 게 정말 가능하구나. 돈 한 푼 받지 않고도 매일 그저 내가 쓰고 싶은 걸 쓰고, 그걸 읽어주는 사람들이 있고, 또 내 글에 활력을 얻고 재미를 느낀다는 이야기를 듣는 게 이렇게나 기쁜 일이구나.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방학을 맞이해 신나기도 했다. 쓸 게 없어 고민한 적은 없었어도, 어쨌든 매일 자기 전에 마무리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는 사실은 부담이 아닐 수 없었는데,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튼 그렇게 만족감에 한껏 미소 지으며 편히 잠자리에 누웠다.


  새벽 한 시쯤 됐나. 아파트 1층 현관의 벨이 울렸다. 우리집을 호출하는 건 아니고 아랫집 정도인 듯했는데, 워낙 조용한 시간이라 벨소리는 아주 선명하게 들려왔다. 이 건물의 구조는 일반적인 한국의 아파트와 흡사하다. 아파트 내부로 들어오기 위해서는 잠겨있는 현관문 하나를 통과해야 하는데, 주민들은 그 열쇠를 가지고 있고, 외부인의 경우 방문하고자 하는 가구를 밖에서 호출해야 한다. 한국 아파트의 경우 대부분 이게 키패드로 되어 있어서 방문하고자 하는 집의 호수를 숫자로 입력하지만, 여기는 호수별로 살고 있는 사람의 이름과 함께 제각기 버튼이 달려있다는 것 정도가 차이점이다. 예를 들어 4층 뱅상 씨네 집에 방문한 사람이 1층 현관 앞에서 뱅상 씨 이름 아래 달려있는 버튼을 누르면, 초인종소리를 들은 뱅상 씨가 집안에서 인터폰으로 방문객을 확인한 후 인터폰에 달린 버튼을 눌러 원격으로 현관문을 열어주는 식이다.


  벨소리는 요즘 흔히 방송에서 ‘부잣집 초인종소리’라며 성대모사를 하곤 하는, 바로 그 애애액- 하는 부저 소리다. 특별히 불쾌할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딱히 유쾌할 리도 없는 그런 소리. 오래된 아파트라 바로 아랫집의 현관 초인종 소리 정도는 우리집 소리로 착각하고 자주 방문을 나서게 될 정도로 다른 집의 소리가 잘 들린다. 그런데 새벽 한 시에, 그것도 아직 코로나 확산 방지를 위한 야간 통행금지가 풀리지 않은 상태였던 당시에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한 것이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잠이 오길 기다리다가, 그야말로 막 경계가 흐릿해지면서 잠에 빠져들려던 찰나였던 나는 어수선한 정신상태로 잠시 의심했다. 꿈인가.


  그러자 또다시 울리는 소리. 애애액-. 순간 너무 황당해서 코웃음을 쳤던 것 같다. 아니. 혼잣말을 했다. ‘진심이야?’ 연재를 마무리하고 세상 누구보다 뿌듯한 마음으로 깔끔하게 잠자리에 들어 막 잠에 들려던 나한테, 정말 지금 이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이 시간에 벨을 누른다고? 대체 왜? 워낙 선명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설마 우리집을 호출하는 건지도 여러 차례 고민했지만 명백히 다른 집에 울리는 소리였다. 벨소리는 끊이지 않고 울렸다. 애애액- 하는 부저의 특징은 누르고 있는 시간만큼 소리가 지속된다는 거다. 처음 몇 번 애애액- 애애액- 하던 벨소리는, 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액- 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액- 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결국 침대에서 일어났고, 옆방의 룸메이트에게선 문자가 왔다. 언니, 저 소리 들려?


  사실 이때 내 머릿속의 가설은 하나였다. 이 멍청한 인간이 키를 안 갖고 나갔구나. 나라도 그냥 열어서 들여보내주고 빨리 자자. 도둑놈이든 뭔가 나쁜 의도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온 동네를 다 깨울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그치만 혹시나 하는 생각에 선뜻 문을 열어줄 용기가 나진 않았다. 다른 입주민들도 다 안 열어주고 있으니까. 그래서 큰방 베란다로 나갔다. 큰방 베란다는 큰길 쪽을 향해있어서 아파트 현관으로 출입하는 사람들의 정수리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조용히 새시를 열고 나가 보니 1층 현관 앞을 초조하게 왔다갔다하고 있는 젊은 남자 한 명이 보였다. 벨을 누르다가, 길가로 물러섰다가, 다시 현관으로 와서 한참 벨을 누르다가, 다시 물러섰다가를 반복하더니 화단에 털썩 걸터앉아 어딘가로 메시지를 보내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내 모습이 들킬까봐 숨을 죽인 채 쪼그려 앉아서 베란다 난간에 몸을 숨기고 그런 그를 훔쳐보고 있었다. 열심히 고개를 꺾어가며 아래를 내려다보다 그 사람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 같으면 얼른 몸을 숙이기를 반복하면서. 스스로가 웃겼다.


  근데 그 사람 모습이 꽤나 초조해 보였다. 그래. 그니까 누가 열쇠도 안 갖고 이 시간에 돌아다니래? 이웃주민 잠이나 깨우고 말이야. 내일 일찍 일어나야 되는데. 아무튼 그렇게 어딘가로 전화를 걸기 시작한 남자의 모습을 보고, 잠시 더 고민하다가, 결국 몸을 일으켜 말을 걸었다. “여기 사세요?” 그렇단다. 바로 요 집(내가 사는 집의 아래 호수)에 산단다. “문 열어드릴게요.” 아니란다. 키 여기 있단다. 근데 자기 집에 있는 누군가가 어쩌고저쩌고. 못 알아듣겠다. 다시 말했다. “문 열어드릴게요. 들어오세요.” 아니 그게 아니란다. 키는 여기 있는데 (짤랑짤랑 소리까지 들린다) 글쎄 어쩌고저쩌고. “... 오케이.” 후퇴했다.


  결국 룸메도 큰방으로 나왔다. 여기까지 상황을 공유한 후 나는 새로운 가설을 하나 내놨다. 말하자면 약간 스릴러 버전. 그니까 저 사람이 자기 집 키가 뻔히 있는데 자기 집에 못 들어가고 현관 벨을 부서져라 눌러대는 이유가 대체 뭘까. 내가 저 사람이 뭐라고 하는지 도저히 못 알아듣겠는데 자기 집을 가리키면서 “누군가quelqu’un”라고 하는 거만 알아들었거든. 그니까 자기 집에 누군가가 있다는 게 아닐까? 밤늦게 집에 도착했는데 글쎄 혼자 사는 내 집에 웬 사람 실루엣이 어른거리는 거야. 그러니 무서워서 들어갈 수가 없는 거지. 그치만 정말 그런 상황이라면 바로 이웃에 도움을 청하거나 경찰을 불러야지 벨을 왜 눌러. 불러내서 직접 맞서 싸우게? 아무래도 폐기해야 할 가설이었다. 남자는 이제 아파트 안으로 들어와서는 자기 집 현관문을 직접 두드리기 시작했다. 쾅 쾅 쾅 쾅 쾅. 할 수만 있다면 철로 된 문을 부수기라도 할 듯한 기세였다. 이제 무섭다는 말을 안 하기는 살짝 어색해질 만한 타이밍이었다.


  그 남자가 전화를 건 곳은 119였던 모양이었다. 머잖아 큰 소방차와 함께 구급대원들이 출동했다. 이들은 몇 번 더 아랫집 현관문을 가열차게 두드리고 소리도 몇 번 지르더니, 결국 그 집 베란다에 사다리를 설치하고 창문을 깨기 시작했다. 쾅 쾅 쾅 쾅 쨍그랑. 그 새벽에 길 건너 사는 사람들까지 잠옷 바람(이라기보다는 딱히 뭔가를 걸치지 않은 편인 상태)으로 길가에 나와 구경했다. 잠시 뒤, 상황파악이 끝난 것인지 남자의 표정이 한결 안정된 듯 보였다. 남자와 대원이 나누는 대화를 들었다. 확실하진 않지만 한 문장 정도를 들은 듯했다. “그녀가 거기 있네요. Elle est là.” 구급대원들이 철수했다.


  새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세운 내 마지막 가설은 다음과 같았다. 남자는 몸이 편치 않은 노모 혹은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는 여자친구와 단둘이 살고 있는데, 집에 늦게 도착한 이날 새벽 집에 들어가려고 했더니 문이 잠겨 열리지를 않는 거다. 동거인은 전화를 받지 않고, 밖에서 보이는 모습으로는 집안에 있는 것이 분명한데, 뭘 어떻게 막아놨는지 출입문은 꿈쩍을 안 하고, 잠이 들었나 싶어 아파트 현관 벨을 하염없이 울려봐도 소용이 없다. 동거인이 행여 잘못됐을까 걱정한 남자는 결국 구급대원을 불러 강제로 창문을 깨고 무사히 집안에서 쉬고 있는 동거인을 확인한 뒤 안심한다. 이날 이후 2주 정도가 지난 지금까지 가장 유력한 가설이다.


  아직까지도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는 모른다. 언젠가 내 프랑스어가 유창해지고 아파트 주민들과도 친해지게 된다면, 그날 대체 무슨 일이었던 거냐고 한번 물어보게 될 날이 올런지 모르겠다. 그 새벽, 한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참 많은 생각을 했지만, 마지막에 다시 침대에 누우면서 했던 생각은 하나였다. 아, 하필 연재 끝나자마자 이런 일이 생길 게 뭐람. 너무 아깝네. 그렇게 나는 이 이야기를 연재글에 적을 오늘만을 기다려왔고, 결국 이 일은 시즌 2를 시작할 원동력의 하나가 된 것 같기도 하다. 다음날이 되고 어젯밤 이런 일이 있었노라고 신나게 보고하는 내 얘기를 들은 집주인이 마치 영화라도 한 편 보는 것 같다고 대답하자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는데, 살면서 겪는 난데없는 일들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결국에는 다 이야기가 된다는 사실만큼이나 삶을 삶으로 만들어주는 요소가 또 없는 것 같다. 기가 막히지 않은가. 연재를 쉬는 2주 사이에 겪은 크고작은 일들을 차차 전할 생각에 나는 이렇게 신이 나있다.








큰방 침대에 걸터앉아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두 관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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