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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른 Oct 20. 2022

020.시간은 알아서 자기 자리에 가있을 테니까

2021년 6월 파리 시간으로 15일 22시 27분




  프랑스에 와서 생활한다는 것은 나에게 단지 외국에서의 삶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가족이 있는 집을 나와 살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먹을 음식을 내가 하고, 내가 입은 옷은 내가 빨고, 내가 지내는 공간을 내가 치우는 삶은 조금 더 나라는 한 사람의 존재감과 무게감을 실감하게 한다.


  나는 매일 몸을 씻어야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분개하던 사람이었다. 스무 살 이후 단 한 번도 그리 열성적인 학생이나 직업인인 적 없었으면서, 하루 24시간을 생활에 빼앗기는 것이 그렇게나 아까웠다. 스톱워치를 이용해 초 단위로 시간을 재가며 공부하던 고3 때의 버릇이 나쁘게 남은 건지, 매일매일을 꼭 쫓기듯이 산다. 이렇게만 말하면 내가 늘 시간을 쪼개가며 성실하고 바쁘게 사는 사람처럼 보이니 재빨리 부연하자면, 하루 일과는 나태하기 그지없으나 그 와중에 마음만 혼자 바쁘게 달리고 있다는 말이다. 온갖 합리화를 동원해 ‘난 좀 쉬어야 돼’를 되뇌면서 침대에 드러누워 놓고는, 몇 시간이고 넷플릭스를 쳐다보면서도 수시로 시계를 확인하는 식이다. 괜찮아, 아직 x시니까. 음, 이제 곧 있으면 y시네. 아, z시 지났네. 젠장.


  시간이란 것은 정말 오묘해서, 시간을 생각하는 방식으로는 결코 시간을 올바로 사용할 수 없다. 시간을 잘 쓰는 방법은 시간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시간을 계산하는 일은 그 사람을 쪼그라들게 만든다. 글쎄, 기상부터 취침까지 분 단위로 타임테이블을 만들어서 정확하게 그것을 엄수해가며 생산적이고 건강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분들도 물론 있겠지만 그쪽은 아예 다른 우주이기 때문에 패스해도 될 것 같다. 여기 이 우주에서, 당신은 매일 눈을 뜨고 다시 잠자리에 들 때까지 무슨 일들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가? 그 일들은 당신의 하루 중 제각기 어느 정도의 분량을 차지하는가? 당신은 그 비율이 마음에 드는가? 딱히 계산해보기도 귀찮고 그다지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내가 그렇다.


  그래서 나는 나름 아침 일찍 일어나 운동을 하고, 씻고 아침을 먹은 다음 성경 묵상과 기도를 하고, 때에 따라 화장하고 옷을 입으면 이미 점심때가 되어 있는 일, 점심때가 됐으니까 점심을 차려서 먹고 다 먹은 후에는 설거지와 뒷정리를 하고 그러면 또 두어 시간이 훌쩍 지나 있는 일, 필요에 따라 빨래를 돌리거나 널거나 개거나 청소를 좀 하면 저녁 시간이 되어 있는 일, 또 저녁을 굶을 수는 없으나 점심의 거사를 반복해서 치르기는 싫으므로 최대한 간단히 먹고 나면 이제 후식 생각이 나니까 뭐라도 틀어놓고 주전부리를 좀 주워먹다 보면 하루가 완전히 끝나있는 일, 이런 일들을 혐오하는 사람이다. 왜? 전부 필요하고 중요한 일들인데 대체 왜 그럴까?


  아마 내가 스스로를 단지 그 일들을 통해 유지되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특별한 사람이라고 여기기 때문이겠지. 내가 그저 적당히 숨 쉬고 적당히 먹고 적당히 배설하고 적당히 자면서 적당히 생명을 유지하는 것만을 삶의 목표로 삼는다면, 그리고 만약 그렇게 사는 사람이 있고 그 모습이 꽤나 마음에 든다면 나의 하루하루는 단지 그렇게 공들여 목숨을 부지해나가는 데만 그치겠지. 심지어 위에서 언급한 일과에는 가장 중요한 생명유지수단인 돈을 버는 부분이 빠져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렇게 바쁘고, 그런데도 그 이상 더 바쁘기를 원한다. ‘진짜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살기 위해서, ‘진짜 나’라고 생각하는 모습이 되기 위해서.


  내게 정말 꿈이고 마법 같은 시간이었던 지난 토요일 밤, 집을 나서기까지 나는 아주 여러 차례 망설였다. 이미 오후 네 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그 하루를 특별하게 만들기엔 늦었다고 느껴졌다. 머릿속의 시간계산기가 자동으로 작동을 시작했다. 지금 대충 챙기고 집을 나서는 데 몇 분, 집을 출발해서 거기까지 도착하는 데 얼마, 글을 쓰고 적당한 시간에 잠들기 위해서는 몇 시 정도까진 집에 돌아와야 하니까 거기서 머물 수 있는 시간은 몇 시간, 그렇게 따지면....... 그렇게 따지면 그냥 집에 누워서 쉬는 게 낫다. 언제나 그렇다. 하지만 지난 나의 경험들이 속삭였다. 내 인생 전체를 바꾸는 데 필요한 시간이 단 5분일 때도 있는데, 한두 시간 정도의 특별한 외출은 24시간 혹은 그 이상을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데 전혀 부족하지 않을 거라고. 힘도 들고 돈도 들겠지만 언제나 그랬듯, 절대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누가 모르는가. 안 하고 후회하는 것보다는 하고 후회하는 게 늘 낫다는 걸. 시간을 잘 쓰려면 시간을 생각하지 말라는 말은 바로 이런 뜻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밤에 야식 먹는 일만 빼고. 그것만큼은 안 하고 후회 안 하는 쪽이 좋다.


  프랑스로 가는 나에게 부럽다거나 용감하다거나 대단하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 분명 그런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내 그런 면을 사랑한다. 하지만 망설이고 걱정하고 계산하고 두려워하던 시간들을 돈으로 바꿔 인출할 수 있다면 나는 얼마나 부자가 될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설렐 정도다. 근데 그냥, 이렇게 생각해보는 거다. 하루가 내가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일들, 아무 의미 없는 것 같지만 삶을 지탱해주는 일들이 차지하는 시간들로 구성되어 있듯이, 인생 전체에도 그런 시간이 있는 것이라고. 왜냐하면 혼자 사는 나를 위해 내가 장을 보고, 음식을 하고, 빨래를 하고, 쓰레기를 버리고, 청소를 하는 것과 같이 걱정하고 망설이고 겁내하는 시간 역시 나만이 나를 위해 갖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오늘 나는 늦은 오후 5시에 있을 한 시간의 수업을 염려하느라 아침 7시 반부터 오후 5시까지 9시간 반이라는 시간을 썼다. ‘어떡하면 좋지’ 하는 생각에만 완전히 잠겨서 정말이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쓰게 된 글이다. 터무니없이 흘려보낸 시간에 대한 분노와 절망으로. 하지만 좀 짜증은 나도 후회는 없다. 눈에 띄게 남은 것은 하나도 없지만 대충 어떠한 방식으로 영혼에 밥을 주고 쓰레기통을 비우고 빨래를 널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늘이 30분 정도 남은 지금, 남은 30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나에게는 아무런 대책이 없다. 그뿐 아니라, 내일은 또 어떻게 살아야 할지 또한 아무런 계획이 없다. 해야 할 일들과 그에 따른 스트레스만이 있을 뿐. 그렇다면 시간에 짓눌려 압사당하지 않기 위해, 대신 당장 하고 싶은 일이 뭔지나 알아보자. 이 글을 마무리하는 대로 오늘의 남은 시간 동안 나는 차가운 물로 샤워를 할 것이다. 하루 종일 땀에 절었다 잠시 말랐다 다시 땀으로 덮이기를 반복한 온몸이 후끈대서 견딜 수가 없다. 30분동안 샤워를 하겠어, 그러면 열두 시가 되겠지, 하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을 거다. 내가 샤워를 하고 싶으면 하는 거고, 그러는 동안 시간은 알아서 자기 자리에 가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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