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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른 Oct 20. 2022

017. 파리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난다

2021년 6월 파리 시간으로 12일 23시 27분




  파리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난다. 파리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생각하는 그런 일이 일어난다.


  토요일, 집에서 아침 일찍 화상 수업을 마치고 한국의 가족, 친구들과 영상통화로 신나게 떠들고 나니 오후가 됐다. 사실 이것부터가 기록해둘 만한 경험이었다. 카페에 모여있던 친구들과 영상통화를 하는 동안 정말로 그곳에 함께 앉아있는 듯한 착각을 했다. 핸드폰을 든 손이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으로 옮겨지고, 말소리는 들리다 끊기다를 반복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온전히 그곳에 함께 있다고 느꼈다. 무슨 VR도 아닌데, 꼭 물리적으로 내가 거기 같이 있는 것만 같았다.


  워낙 이른 시간에 일어나 쉬지 않고 몇 시간을 떠든 터라 잠시 잠이 들었다. 30분만에 깬 건 기적이었다. 이곳에 온 후로 낮잠을 자는 일이 잦지만, 대체로 정신을 차려보면 이미 저녁 무렵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물론 이 법칙은 한국에서도 동일하다). 잠시 고민하다 집을 나서기로 했다. 책 읽기에 좋은 장소면 어느 곳이든 가보자 싶었다. 혼자 책 읽을 시간이 필요했다. 집은 가장 조용하고 편안한 장소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결국 잠에 빠지기 일쑤다.


  좋은 장소를 서치하는 방법은 많지만, 어디든 새로운 곳에 가보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경험을 토대로 스스로 세운 하나의 철칙이 있다면 바로 ‘오래 검색하지 말 것’이다. 검색창 맨 위에 뜨는 곳은 이미 너무 유명해서 ‘좋은 곳’의 의미를 상실해버린 곳일 확률이 높은 것도 사실이지만, 검색하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다 소모하느니 그냥 대충 느낌 오는 곳이면 일단 찾아가는 게 현명하다. 그곳이 별로인 곳이면 차라리 빠르게 실패하고 근처의 다른 곳을 찾아가는 게 낫다. 그렇게 헤매는 시간들은 이야기가 되지만, 자리에 앉아 검색하는 시간은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간단히 구글맵에 book cafe를 검색했다. 가장 먼저 등장한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를 지나 스크롤을 조금 내리니 눈길을 끄는 곳이 나타났다. 물 위에 떠있는 서점이었다. 그러니까, 강 위에 배가 하나 떠있는데, 그곳이 서점 겸 카페로 운영되고 있는 것이었다. 서점은 심지어 보태니컬이 컨셉이라 가드닝이나 채식, 환경, 동식물에 관련한 책들을 판매하고 있었다. 근사했다. 사람들의 리뷰도 훌륭했다. 마침 오늘 어떤 저자의 사인회가 있다고 해서 사람이 너무 몰리지 않을까 걱정됐지만, 게다가 위치가 집에서 한 시간 가량 떨어진 파리 북쪽 끝이었지만, 일단 출발했다.


  L’eau et les rêves(물과 꿈)라는 이름을 가진 이 가게는 이름만큼이나 멋진 곳이었다. 아래층의 서점에는 다종다양한 ‘보태니컬’ 서적들이 가득했다. 한국에서도 종종 독립서점에 가면 대체 어떻게 이렇게 근사한 책들이 많은 거지,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다 사고 싶다, 하는 생각을 늘 하게 되는데, 여기서도 기획부터 내용, 디자인, 하물며 제목까지 너무도 사랑스러운 책들이 한가득이었다. 하나같이 환경을 생각하는 마음들로 만들어진 책들이라 더욱 예뻤다. 동그랗게 뚫린 창밖으로는 강물이 찰랑이고, 그 위로 물가를 산책하거나 요트를 타고 여유를 즐기는 이들의 모습이 지나갔다. ‘한국에 다 못 가져가’, ‘한국에 다 못 가져가’, 계속해 되뇌면서 자꾸만 책을 집어드는 오른손을 왼손으로 붙들고, 카드 세 장만을 구입했다. 실제 식물의 씨앗이 종이와 함께 압축돼있는 ’Seed Paper’ 카드였다. 메시지가 적힌 카드를 받은 사람이 카드를 통째로 밭에 심고 물을 주면 당근이 자라고 꽃이 피는 거다. 잘 키울 자신 있는 세 명한테 주겠다.


  배의 위층에서는 사람들이 찰랑이는 강물을 바라보며 마실 것을 시켜놓고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나는 한켠에 앉아 복숭아맛 탄산음료를 마시면서 <프랑켄슈타인>의 남은 분량을 마저 다 읽었다. 곧장 독후감을 쓰려 했지만 집중해서 글을 쓰기엔 너무 아름다운 풍경이라, 포기하고 그저 가만히 앉아있었다. 그렇게 한동안 기분 좋은 이들의 수다 소리를 귀로 듣고, 출렁이는 물결과 그 위를 지나는 요트 위의 사람들을 눈으로 좇으며 앉아 있다, 슬슬 느껴지는 허기에 그곳을 나섰다. 그리고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된다.


  친한 친구가 파리를 여행할 때 아주 맛있게 먹었다며 꼭 가보라고 알려준 레스토랑이 하나 있었다. 고맙다고는 했지만 위치를 보니 집에서 너무 멀어서 딱히 갈 일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출발할 때쯤 지도를 보니 목적지로 삼은 서점이 마침 그 레스토랑 바로 옆이었다. 밖에서 한 끼를 사먹는 일은 꽤나 금전적으로 부담스러운 일이라 언제나 망설이지 않을 수 없지만, 다시 또 이 먼 곳까지 올 일도 없을 것 같아서 오로지 친구와의 공통된 추억을 만든다는 데 의미를 두고 그곳을 찾았다. 혼자 앉기 적절한 테라스의 작은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친구가 먹었던 것과 동일한 메뉴를 주문했다. 장난하는 건가 싶을 정도로 적은 양의 고등어 요리를 조금씩 아껴먹는 동안 내 테이블로부터 겨우 20cm 정도 떨어진 바로 옆 테이블에 나이가 지긋한 마담 한 명이 자리를 잡았고, 곧이어 그 맞은편에 남자 한 명이 다가와 앉았다. 남자는 자신이 그린 그림들을 마담에게 보여주었고, 둘은 그 그림들을 보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만화 같은 스케치들이었는데, 잘 그린 건지 못 그린 건지 쉽게 말할 수 없는 그림들이었다. 알아들을래야 알아들을 수 없는 그들의 대화가 한창 이어지고 내 식사가 거의 끝나갈 때쯤, 나와 마주보는 자리에 있어 한두 번 눈이 마주쳤던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프랑스어를 못한다는 나의 말에 고맙게도 능숙하지 않은 영어로 친근하게 대화를 이어나가주었다. 26일, 그러니까 2주 뒤에 전시가 있어서 마무리해야 할 작업이 산더미같이 쌓여있다고 했다. 식당에서 우연히 나에게 말을 걸어온 사람이 마침 (프로든 아마추어든) 화가이고, 그 사람이 하필이면 곧 열릴 전시를 준비 중인 사람이라니. 이게 영화라면 진부하다고 느낄 만한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 전시에 초대받아 가게 되는 건 아닐까, 이 때까지만 해도 내 상상은 그 정도에 그쳤다.


  사실 이야기가 어떻게 순서대로 흘러갔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가에탕(남자의 이름)은 마주앉은 엘리자베스(마담의 이름)가 샤넬의 디자이너라고 했고, 엘리자베스는 본인이 디자인한 드레스 사진을 보여주었다. 새파란 드레스는 정말 아름다웠다. 그리고 식당의 직원들이 지나갈 때마다 뺨키스를 나누며 친근하게 인사하는 엘리자베스를 보고 그냥 꽤나 단골인가 보다 생각했는데, 시간이 좀 지나니 그 정도가 아니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나를 포함해 세 명이었던 무리는 순식간에 다섯, 여섯, 일곱, 혹은 그 이상으로 불어났다. 레스토랑을 방문하는 손님뿐 아니라 그저 지나가던 사람들도 모두 이들을 보고 멈춰서서 인사와 안부를 나누고, 한동안 수다를 떨다 제 갈 길로 갔다. 거의 이 동네 전체가 한 무리의 친구들이었다. 모두가 서로를 잘 알고 있는 듯했고, 바로 이 레스토랑이 그 만남의 중심지였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엘리자베스가 그 무리의 중심이었다. 가에탕과 엘리자베스의 설명에 따르면 이들은 모두 이 동네에 사는 이웃들이었고, 엘리자베스와 그 친구들은 모두 예술가들이었다.


  건축가도, 작가도, 여행가도, 모두 나를 진심으로 환영해주었다. 나의 서툰 불어를 기뻐해주고, 자기들끼리 나누는 대화의 내용을 꼭 한 명이 내게 따로 통역해주었다. 이들은 끝없이 담배를 피우고 각양각색의 술들을 마시면서 담배나 술은커녕 오렌지주스 한 잔을 끝낸 뒤에는 물만 몇 잔이고 마셔댈 뿐인 나와 조금의 허울도 없는 친구가 되어주었다. 내게 맛있는 술을 대접해주고 싶다며 술을 마시지 않는 나를 속상해했지만 그 또한 그대로 존중해주었다.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환경에 기여하는 삶을 살 수 있는지를 논했고, 자기가 작곡한 노래를 들려주었으며, 뭔가를 쓰고 있다는 내게 유명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일을 계속 혼자 해나가는 일 자체가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라며 진지한 응원을 해주었다. 어떤 이와는 인스타그램 맞팔을, 어떤 이와는 번호 교환을, 어떤 이와는 뺨키스를 나누었다. 집까지 한 시간을 가야 한다는 내 말에 말도 안 된다며 놀라고, 시간이 늦어서 귀가한다는 개념 자체를 모르고 있는 듯한 이들은 영락없는 파리지앵들이었지만, 마치 낮의 영상통화에서 느꼈던 것과 같은 편안함을 느끼게 만드는 친근한 친구들이었다.


  내게 이 레스토랑을 알려준 친구는 내가 이곳에서 이런 경험을 하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으리라. 물론 나 역시 마찬가지여서, 가에탕이 보내온 우리들이 함께 찍은 사진이 마치 수 년 전의 것인 듯 느껴진다. 다만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내 옆에는 짤뚱한 장미 한 송이가 컵에 꽂혀있다. 파리 어디서든 만날 수 있는, 길에서 꽃을 파는 사내조차 그 구역에서는 모두의 친구였는데, 그가 내게 선물하라고 가에탕에게 주고 간 것이다. 파리를 배경으로 한 많은 영화들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클리셰, 우연한 만남과 예술가들과의 대화와 저물어가는 노을에 따라 반짝이는 강물과 한 송이의 장미꽃 같은 것들, 그것들은 그저 황당할 만큼 모두 다 현실이었다. 그래, 이왕 꿈을 꿀 거라면, 파리까지 와서 꿔보는 것쯤 나쁘지 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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