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파리 시간으로 5일 23시 21분
매주 토요일마다 한국에 있는 두 아이와 화상 수업을 한다. 독서논술 수업이다. 요즘 같은 세상에, 돈을 주고 아이들에게 독서논술 교육을 시키기를 원하는 학부모님들이 계시다는 게 항상 신기하고 감사하다. 내가 부모가 되면 그렇게 하지 못할 것 같다. 존경스러운 마음이다. 그런 부모님들에 걸맞게 아이들 역시 아주 똑똑하다. 중학생인 아이들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항상 좀 어쩔 줄 몰라 한다. 두 아이에게선 서로 다른 광채가 나는데, 모든 사람이 다 같아지기를 요구하는 이 세상이, 그런 아이들의 빛을 조금씩 앗아갈까 봐 두려워서 그렇다. 그리고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나도 모르는 새 아이들에게 그런 일을 해버릴까 봐 항상 초조하다. 직접 말로 하지 않더라도 나의 작은 눈빛이나 표정, 말투, 몸가짐과 행동 들을 통해 아이들 각자가 갖고 있는 고유한 색을 부정하고 어른들의 무채색을 닮아가기를 종용하는 짓을 해버릴까 봐 불안하다. 아이들은 내게서 무언가를 배운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아이들이야말로 나를 공부하게 만들고 독서하게 만든다. 나는 마치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인 것처럼 굴지만, 사실 아이들이 내게 던지는 질문은 언제나 동시에 나의 의문이 된다. 그 질문들에 대답하려 애쓰면서 모든 것을 한 번 더 생각하고, 한 번 더 정리한다.
오늘은 각자 편한 판본으로 미리 독서해 온 <오만과 편견>을 가지고 수업했다. 우리는 평소 <국어시간에 생각 키우기>라는 논술교재를 가지고 수업을 하는데, 한 달에 한 번씩은 교재 대신 내가 선정하는 책 한 권을 모두 함께 읽어온 다음 관련된 활동을 하며 평상시의 수업을 대신한다. 지금까지는 다양한 주제에 해당하는 비교적 근간의 책들을 골라왔는데, 이유는 아이들이 읽기에 ‘재미’가 없어서는 절대 안 된다는 내 철칙 때문이었다. 그러다 이번 책부터는 약간의 진입장벽이 있더라도 고전 작품들을 읽혀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도 남을 만한, 내가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유용한 선물이 무엇일까를 고민해 보았을 때 100년 200년이 지나도 그 가치가 변하지 않는, 그러나 혼자서는 시도해보기 어려운 고전 명작들을 읽게 해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나부터도 여전히 고전 읽기를 어려워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너무 고역이 아닐까 우려가 됐지만, 그것이 기우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아이들은 나보다도 훨씬 더 책을 잘 읽어왔다. 책과 관련된 여러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비슷한 시대에 쓰인 다른 고전 작품들이 언급되기 시작했다. 특히 여성으로서 특별히 직업을 가질 수도 없었던 그 시대에 놀라운 문학작품들을 남긴 천재적인 여성 작가들에 대해 설명하다가, 나도 모르게 꽤나 열정적으로 메리 셸리에 관해 최근 우연히 알게 된 흥미로운 사실들을 이야기하게 됐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우리의 다음 책으로 <프랑켄슈타인>이 선정되었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 덕분에 오늘 하루 내내 <프랑켄슈타인>을 읽는 중이다. 고전의 장점 중 하나는 전자책을 비교적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자도서관에서 대체로 여러 버전들 중 한 가지 판본 정도는 구할 수가 있다. 아이들과의 수업을 마친 오전에 바로 다운받아 밤이 된 지금까지 거의 절반가량을 읽었다. 여느 다른 고전소설들과 달리 묘사가 적은 데다 대사도 장황하지 않고,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플롯 구성에 흥미진진한 서사가 속도감 있게 진행되는 작품이라 아주 흡인력이 강하다. 사실 오늘 이 글도 쓰지 않고 책을 계속 읽으려다가 말았다. 저녁에 잠시 산책 겸 밖으로 나가 저녁을 먹은 사거리 레스토랑의 테라스에서도, 식사를 마치고 마트를 두 군데 들러 필요한 식료품 몇 개를 사서 집으로 걸어오는 길에도 짬짬이 계속 읽었다. 이 작품을 가지고 아이들과 수업을 하려면 무려 한 달을 기다려야 한다니 믿을 수가 없다. 영리한 아이들과의 수업인 만큼 수업 준비는 언제나 내게 제법 스트레스를 주는 편이지만 이렇게 좋은 작품을 읽는 시간만큼은 온전히 날 위한 것이다. 오늘 혼자 테라스에 앉아 감자튀김을 곁들인 홍합 요리를 먹는 동안 보았던 풍경, 저녁 시간동안 내게 말을 걸었던 사람들, 집에 오는 길에 산 1.75리터짜리 콜라 한 병의 가격 같은 것은 잊어버리게 될지라도 어쩌면, 열아홉 살짜리 영국 소녀가 스위스를 배경으로 쓴 최초의 공상과학소설을 이곳 파리에 있는 동안 열네 살짜리 두 소녀 덕분에 읽게 되었다는 사실은 보다 오래 기억에 남게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