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파리 시간으로 7월 6일 11시 50분쯤
프랑스인 친구들이 드문드문 생겨나고 있다. 이들과 몇 시간 동안 단 한 마디의 한국어도 섞이지 않은 대화를 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늘 신기함이 반, 피곤함이 반이다. 물론 한국어를 쓸 때보다 훨씬 내 말은 아끼고 상대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식이긴 하지만, 이 짧은 영어와 더 짧은 프랑스어로 세 시간이고 네 시간이고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경이롭기만 하다.
재미있는 사실. 이곳에서 만나는 이들과의 대화에는 대체로 예술이라는 주제가 빠지지 않더라는 것. 더 재미있는 사실. 그 대화상대들은 모두 각각의 뚜렷한 예술관을 가지고 있더라는 것. 친구 A는 늘 말한다. 내가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만드는 건 유명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고. 그냥 내가 재미있고, 종종 그것들을 친구들에게 보여줄 때 그들이 기뻐하면 그걸로 된 거라고. 나는 락스타가 되고 싶지 않다고. 이런 말을 하면 할수록 오히려 그 내면의 야망만을 안타깝게 드러내 보일 뿐인 사람도 있겠지만, 종종 자조 섞인 웃음을 웃으며 ‘You know, I’m just a French guy’라 말하는 A의 고백에는 한 치의 자기포장도 없다. 오늘 나는 그에게, ‘너는 네 친구들의 락스타야’라고 해주었다. 원래 대화의 주도권을 도통 놓지 못하는 나인지라 늘 상대를 더 웃기지 못해 안달하곤 하지만, 그를 웃게 하는 일은 다른 때보다 조금 더 기쁘다.
친구 B는 껍데기뿐인 예술, 예술의 탈을 쓴 허세를 극도로 경계한다. 답이 없는 질문이라는 걸 알면서도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일을 멈출 수 없는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정작 말뿐인 스스로가 한심하다 말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그가 가진 주관이 참 좋았다. 무엇이 옳은지를 발견했다 믿고 그것을 향해 달려가는 일보다는 언제나, 무엇만은 아닐 거란 생각으로 도망치는 일이 훨씬 건강할 때가 많으니까. 게다가 그는 어떤 예술에 대한 열띤 비판을 늘어놓다가도 그보다 더 길게 이어지는 내 의견들을 늘 차분하고 침착하게 경청한다. 이런 사람들과는 몇 년이 흘러도 대화를 할 수 있다. 그리고 예술이 무엇인지 감히 정의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최소한 예술이 바로 그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질문하는 이 끝도 없는 대화들에 그 존재를 빚지고 있다는 점만큼은 확언할 수 있을 것 같다.
친구 C는 이 지면에 다 적기 어려울 정도로 많고도 깊은 이야기들을 내게 들려준 장본인이다. 그는 영화 전문 기자로, 특히 한국 영화들에 대한 오랜 관심과 애정으로 많은 한국 영화인들과 직접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무려 가슴에 노란 리본을 달고 다니는 프랑스인인 그는 본인이 언급하는 작품이나 감독, 배우들의 거의 대부분을 내가 다 알고 있고 심지어 취향까지 비슷한 걸 보면서 제법 신기해하는 모양인데, 당연한 소리지만 신기한 걸로 따지면 늘 내가 훨씬 신기하다. 한번은 그와 함께 또 어느 타코 가게에서 한참 영화 얘기를 하는 동안 영화 기자로 일하는 그의 다른 친구가 합석을 한 적이 있는데, 그와 C가 한국 사람들도 잘 모르는 독립영화들에 한 번씩 조연으로 출연하곤 하는 배우의 이름과 출연작을 정확히 알고 있어서 다소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그니까 내가 지금 어디, 전주영화제에 와서 외신 프레스들과 식사를 하고 있는 거였던가? 아무튼 그를 보고 있으면 그저 그 자체로 아름답다는 이유로 예술을 사랑하면서도, 통탄할 현실 앞에 설 때마다 철저히 무너지는 예술의 무력함에 늘 함께 무력해지고 말 뿐인 나 자신을 거울 보듯 마주하는 느낌이 든다. 그럼에도 내게 지극히 개인적으로 희망적인 것은, 나보다 인생을 더 오래 산 그에게 있어 쓰는 일은 늘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 우리가 옅은 빗방울이 떨어지는 샹젤리제 거리를 걸으며 세월호에 관해 이야기할 때, 햄버거 가게에 앉아 한국의 데이트 폭력에 관해 이야기할 때, 그는 어두운 주제를 꺼내 미안하다고 했지만 나는 대답했다. 하지만, 말해져야 하는 일들이야.It has to be spoken.
외향성이 늘 내향성을 51대 49의 수치로 누르는 ENFP인 나는 언제나 사람들을 만나야만 하고, 또 그만큼(혹은 그보다 2퍼센트 정도 적게) 혼자 조용한 데 처박혀 책을 읽고 공부를 해야만 한다. 하지만 사실 전자와 후자는 서로 다르지 않다. 사람들은 걸어다니는 책들이고, 책은 종이에 묶여있는 사람들이니까. 한 번 내국인(이곳에서 외국인은 나니까) 친구들을 만나고 집에 돌아오면 한동안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게 된다. 정해져있는 나의 외국어 활용 게이지가 다 써서 닳아버린 느낌이랄까. 육체노동을 한 것도 아닌데 막 기진맥진해진다. 하지만 그 반작용으로 잠시 며칠 집에 얌전히 있다 보면 나도 모르게 금세 누군가와 만날 약속을 잡게 된다. 이때는 반대로 혼자 있기 게이지가 점점 닳아가는 것 같은 기분이다. 어릴 때 열심히 했던 온라인 게임 마비노기에서는 그 세계의 시간으로 밤이 되어 달이 뜨면 ‘마나’라는 마법 에너지가 저절로 충전됐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연명해가고 있다. 누군가의 생각과 누군가의 삶, 누군가의 이야기와 누군가의 논리를 가지고 서로를 돌려막아가면서. 그 마법 같은 타인들이 달처럼 내 시간들에 둥실 떠오르면 얼른 나의 전신을 내놓고 그 빛을 함뿍 쬐어 말과 글의 태엽을 감으면서. 치사하게, 감동적으로.
그리고 그 이야기들을 나누는 동안 우리가 바라보는 풍경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