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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른 Oct 20. 2022

026. 당신은 마치 수조에서 도마로 옮겨온 횟감 같다

2021년 파리 시간으로 7월 9일 21시 11분




  지금부터 최악의 하루를 보내는 나만의 비법을 소개하도록 하겠다. 우선 유비무환이라고, 뭐든 마음을 먹었다면 미리부터 준비하는 게 좋다. 전날 새벽(정확히는 당일 새벽이 되겠다) 깊은 시간까지 야식을 잔뜩 먹고 피곤해도 잠을 참으며 최대한 늦게 잠자리에 들기를 권한다. 그리고 결전의 날인 그 다음 날에는 무언가 아침부터 해야 할 일이 있는 편이 좋다. 그래야 알람도 못 듣고 정오 가까운 시간에 겨우 눈을 떴을 때 더욱 확실한 자괴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눈을 뜨면 절대 자리에서 곧장 일어나서는 안 된다. 바깥 하늘이 보일 만한 창문은 사전에 다 차단해두는 것이 좋다. 굳이 시계를 확인하지 않으면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조차 알 수 없는 상태로 방을 유지해야 한다. 그렇게 침대에 누운 채로 핸드폰을 들어 이런저런 쓸데없는 일들을 한다. 이때는 SNS와 유튜브의 피드를 마냥 스크롤하는 일이 적격이다. 그러다 보면 한두 시간 정도는 훌쩍 지나있게 된다. 슬슬 침대에서 일어날 시간인데, 절대 일어나고 싶은 마음에 일어나서는 안 된다. 너무 배가 고프거나 너무 화장실이 가고 싶어서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가 되어 침대를 나서는 것이 조건이다. 이제 대충 씻고(당연히 양치에서 세수 정도까지를 말한다. 샤워나 머리감기는 절대 금지다) 첫 끼를 먹을 차례인데, 결코 제대로 된 밥이나 신선식품을 먹어서는 안 된다. 주방이나 거실에서 먹어서도 안 된다. 과자나 빵이나 아이스크림 같은 간식거리들을 한 아름 가지고 재빨리 방으로 복귀해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보면서 먹어야 한다. 그렇게 우물우물하며 화면을 응시하다 보면 배가 좀 차서 슬슬 다시 침대에 들어가고 싶어질 것이다. 아니, 가장 이상적인 경우는 그냥 정신을 차려보니 다시 침대에 들어와 있는 일이다. 처음부터 눕는 일은 금기다. 방안도 쌀쌀하고 하니 이불을 덮고 좀 앉아있겠다는 마음으로 우선 침대에 올라야 한다. 그러다 모래성이 무너지듯 서서히 몸이 침대와 가까워지고, 따끈따끈한 이불 속 온도와 밀폐된 방안의 부족한 산소로 눈이 꿈뻑꿈뻑 감기는 게 순서다. 이때쯤 잠시 한번 시계를 확인하는 일도 나쁘지 않다. 아직 이른 오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여전히 하루의 대부분이 남아있고, 해야 할 일들도 산더미지만 뭐 오늘 하루쯤이야 괜찮다. 잠이 오는 마법의 가루라도 얼굴에 뿌린 것처럼 다시금 지옥 같은 잠에 빠져든다. 침대의 무게보다도 무겁게 느껴지는 잠이 온몸을 짓누른다. 내리깔리듯 잠에 들어 근본 없는 악몽을 꾼다.


  잠에서 깨면 시간을 먼저 확인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이제 다섯 시 정도의 애매한 시간이 되어 있다. 오늘 하루를 완전히 포기해버리기엔 아직 좀 이른 시간이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새롭게 마음을 먹고 매무새를 단정히 한 뒤 해야 할 일들을 처리하기에는 말도 안 되게 늦었다고 여겨지는 시간이다. 자, 이제 미칠 듯한 무력감과 자책감을 만끽할 시간이다. SNS든, 유튜브든, 인터넷 기사든, 뭐든 열어서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잔뜩 봐야 한다. 내가 평소에 부러워하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일수록 효과는 확실하다. 이때 반드시 하루 종일 제대로 씻지도 먹지도 않고 침대 속에서 잠만 자고 있는 한심한 내 모습을 철저히 자각하며 그들을 봐야 한다. 그리고 지금 나의 이 모습이 곧 내 인생 전체라는 생각을 가지는 것이 필수다. 당신이 몇 살이든, 뭘 하는 사람이든, 뭘 꿈꾸든, 주변에 어떤 사람들이 있든, 아무 상관이 없다. 다음의 문장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든 인류에게 통한다. ‘이 나이 먹도록 아무것도 한 게 없네.’ 당신이 빌 게이츠든, 방탄소년단이든, 이 순간만큼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 따라해 보라. 남들 다 각자 갈 길 갈 때 나는 이 나이 되도록 아무것도 한 게 없다!


  그러다 보면 또 한두 시간이 우습게 지나있을 것이고, 이제는 나름 저녁식사를 할 차례다. 당신은 어쩌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오늘 그래도 본의 아니게 일일일식해서 살 빠지겠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당신은 이미 점심에 먹은 과자들로 하루 섭취 권장 칼로리와 당류와 나트륨 수치를 넘겼다. 아무쪼록 저녁은 그래도 좀 시간을 들여서 조리해먹도록 하자. 밥을 해먹든, 파스타를 해먹든 상관없다. 만사가 귀찮고 스스로 딱히 밥해먹을 자격이 있는 사람처럼 여겨지지도 않는 당신은 그냥 햇반이나 데우거나 라면이나 끓여먹을 가능성이 높기는 하지만, 혹시 당신이 유럽에 산다면 파스타를 해먹을 확률도 무시할 수 없다. 아, 설마 밥을 차리는 동안 유튜브나 넷플릭스를 잊은 건 아니겠지. 동영상에 영혼이 철썩하고 붙어버린 사람마냥 화면을 계속 응시하면서 밥을 차리고 먹어야 한다. 다 먹은 다음 설거지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혹시 노이즈캔슬링 기능을 갖춘 블루투스 이어폰을 가지고 있는가? 물 흐르는 소리도 두렵지 않다. 당신의 목표는 오로지 밥을 먹어도 먹는 줄 모르도록 계속 동영상에 시선을 고정하는 일이다. 이날 무슨 영상을 봤는지를 나중에 기억하는 건 반칙이다. 누군가 물을 때 당신은 대답해야 한다. 하루 종일 뭘 보긴 봤는데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하나도 기억 안 나.


  자, 이제 명백한 저녁 혹은 밤 시간이 되어 있다. 당신의 하루는 이제 거의 끝장났다. 아, 물론 하루는 자정까지니까 아직도 서너 시간 정도가 더 남아있다. 진짜 충격적인 건, 그렇게 잤는데 이 시간에 또 잠이 온다는 거다. 하루종일 핸드폰만 봤으니 양심껏 오늘 남은 시간에는 책이라도 좀 보자는 마음가짐이면 완벽하다. 두 장을 채 넘기기 전에 레드썬, 하고 잠에 빠질 것이다.


  아, 아직 잘 준비를 하지 않은 채 또다시 잠이 들었던 당신은 이제 정말 하루가 끝나가는 시점에 다시금 눈을 뜬다. 지금 당신은 마치 수조에서 도마로 옮겨온 횟감 같다. 흐느적흐느적, 뻐끔뻐끔 숨을 내쉬는 게 전부인 존재. 마지막까지 바로 그 감각이 가장 핵심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제 정말 제대로 씻고 잠자리에 들어야 할 시간인데, 다시 침대에 눕기가 너무나도 민망할 것이다. 침대 볼 면목이 없는 느낌이라면 정상이다. 침대가 말을 걸어오는 것 같다. 야, 하루종일 잤는데 또 자? 그럼 감지 않아 기름에 전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하라. 그래도 지금 자야 내일 아침에 일어나지... 그렇다. 그렇게 자고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보면, 인생에서 어제 하루를 삭제한 일이 생각보다 그리 별 일이 아니었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악몽처럼, 혹은 장난처럼, 새로운 하루가 또다시 시작될 것이다. 그러면 당신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웃고, 밥을 먹고, 씻고, 걷고, 잠을 자고, 일어나고, 잠을 자고, 일어나고, 잠을 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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